Writings

[책 읽습니다 ⑫]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말한다 - 장성익,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

Writings/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길드다(多)

글 : 차명식 (청년길드) 1. 도시가 탄생한 뒤 그리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도시의 침묵을 알아차렸다. 도시에서의 삶은 이전보다 외롭고, 각박하고, 파편적이다. 한동안 그것들은 그저 견뎌내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곧 그러한 침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발명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 형식의 이름을 다시 ‘마을’이라 했다. 언제부터인가 도시 곳곳에서 말해지는 ‘마을’의 이름은 도시 한 가운데서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슈퍼 아저씨’, ‘옆집 아줌마’, ‘아래층 할머니’ 등 한동안 익숙함의 루트에서 빗겨난 채 낯설음의 영역에 방치되어 있던 관계들을, 과거 시골 마을들이 그러했듯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망을 다시 이어..

고은, <길드다 2018, 마이너스 500만원>

글: 고은 공부로 돈을 벌겠다고 일층에 길드다 공간을 꾸렸을 때, 우리 앞으로 문탁 네트워크가 있는 이층에서 500만원이 뚝 떨어졌다. 물론 500만원이라는 금액에 대해서는 온도 차이가 있었다. 목공 일을 하는 지원에겐 그다지 큰돈이 아니었을 터이고,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동은에게는 꽤나 큰 액수였을 터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짜 문제가 되었던 건 500만원이라는 금액이 아니었다. 한동안 나는 이 돈을 받았으면서도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돈인 것 마냥 굴었다. 다른 멤버들도 나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우리는 장장 5년을 같이 공부했지만, 함께 돈을 만져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500만원 앞에 얼어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을 할지 논의하기 위해 엠티를 빙자한 워크샵도 가야했고, 회의를..

동은, <나에게 예술은>

1. 예술프로젝트가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다. 그 당시 문탁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가끔 만나서 놀고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들의 공통분모가 바로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 하지만 대부분 백수에 다양한 이유들로 지속적인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청년들을 모아서 “판은 깔아 줄테니 너희들은 결과물만 내라!”고 만든 것이 바로 예술프로젝트다. 그리고 나는 이 만들어진 판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 번도 그림을 배우거나 하지 않은 내가 예술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친구들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2년동안 진행하고 난 이후엔 이제 예술작업으로 밥벌이를 고민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나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지원, <청년 모임, 이제 됐다 : 해봄, 석운동, 길드다>

글: 지원 요즘 청년들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취업, 결혼, 출산, 주거 등 현재의 중년들이 청년기에 당연하게 이루어 냈던 것들을 지금의 청년들은 쉽게 이루지 못한다. 스펙 쌓기 레이스는 고되고, 점점 길어진다. 백수도 많고, 나이가 찬 알바도 많다. 아예 정상적인 루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정상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취업준비를 위해 인생을, 이 한 몸 바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깨닫는다. 그래서인지 청년은 자주, 걱정 섞인 목소리로 호명된다. 그런데 나에게 ‘청년’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어색하다. 입에 붙지 않는다. 내 입에 붙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올 때도 이상하다. 촌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사회..

[책 읽습니다 ⑪] 도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연작

Writings/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길드다(多)

글 : 차명식 (청년길드) 1. 도시는 난산 끝에 태어났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의 감시와 탐욕스런 투기꾼들의 눈치싸움, 변두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은 끝에 남겨진 땅 – 그 땅 위로 탐식하듯 허겁지겁 올라간 빌딩과 아파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도시의 모습이다. 그런 까닭에 도시에는 항상 ‘메마른’, ‘삭막한’, ‘차가운’, ‘외로운’ 따위의 형용사들이 달라붙는다. 우리는 제각기 흩어져 홀로 부유하는 도시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또한 그 상상을 실제로 살아간다. 그것이야말로 ‘도시다움’이다. 그리고 ‘도시다움’에 익숙한 나와 아이들에게 『원미동 사람들』 이 그리는 도시의 모습, 80년대 부천시 원미동의 풍경은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양귀자는 『원미동 사람들』 작가 후기에서 그녀가 영위했던 원미동..

[책 읽습니다 ⑨]가족이라는 ‘홈 패인 공간’ - 조나던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미스 리틀 선샤인』

Writings/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길드다(多)

글 : 차명식 (청년길드) 1. ‘성공으로 향하는 9단계’를 강의하는 아버지는 보잘 것 없는 출판 계약 하나만 바라봐야 하는 실패자다. 어머니는 몇 주에 걸쳐 저녁 식사를 패스트푸드와 종이 식기로 때우는 중이다. 할아버지는 마약 중독자에다 아이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섹드립을 일삼고, 문학교수이자 게이인 외삼촌은 동성 애인에게 차여 자살을 시도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런가 하면 아들은 항공학교에 들어가 파일럿이 되겠다며 아홉 달째 침묵시위 중이며 일곱 살짜리 막내딸은 오매불망 미인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만을 꿈꾼다. 대충 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이 콩가루 집안이 바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가족이 정상이 아니란 건 비단 우리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등장인물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가족이 ..

[책 읽습니다 ⑧]어머니라는 ‘익숙함’ - 김고연주, 『우리 엄마는 왜?』

Writings/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길드다(多)

글 : 차명식 (청년길드) 0. 문탁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혼 여성이 상당히 많고 그분들 중 대부분은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문탁네트워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니 가끔은 나와 함께 공부를 하거나 여타 활동을 함께하는 선생님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로 인해 나는 때때로 매우 미묘한 상황에 처한다. 한 번은 세미나 시간에 다른 선생님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가르치는 녀석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녀석은 그 선생님의 자녀이기도 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 아이의 어머니에게도 해도 될까? 무릇 아이들에게는 다른 어른에게는 말할 수 있..

[책 읽습니다 ⑦]아버지라는 ‘두려움’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커, 『오이대왕』

Writings/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길드다(多)

글 : 차명식 (청년길드) *글에서 사용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볼프강은 수학은 서투르지만 수영 하나는 자신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볼프강의 집에 느닷없이 왕을 자칭하는 자그마한 오이 모양의 괴물 하나가 나타난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오이대왕’으로, 볼프강네 집 지하에 사는 쿠미-오리란 정령들의 왕인데, 발칙하게도 그들이 자신을 쫓아냈으므로 볼프강네 집에 정치적인 망명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흉측한데다, 무엇보다도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 모두가 오이대왕을 내키지 않아 한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누나도 볼프강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막내 닉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 다만 단 한 사람, 오직 볼프강의 아버지만이 별다른 까닭도..

고은, <나는 친구가 많다>

* 이 글에 나오는 이름은 ‘명식’을 제외하곤 모두 가명입니다. 글: 고은 문탁 네트워크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다. 10~20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대부분이 40~50대이다.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지낼 때도 있지만, 또래 친구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가끔 나이의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선생님들이 자식이나 친정 이야기를 하실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피부로 와 닿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대로 내가 애인이나 또래친구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선생님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젊군”과 같은 감탄사나 조언의 말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같이 머리를 쥐어 싸고 고민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한 일 년 동안 또래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동은, <나의 뉴욕여행 레시피>

글: 동은 1. 책으로 뉴욕을 먼저 만나다 어느 가을날, 세미나 쉬는 시간에 문탁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런 말을 하셨다. “너네들 중에 뉴욕 갈 사람?!” 갑자기 뉴욕이라니? 난데없는 해외여행 제안 놀랐지만 해외에 가본 적이 없던 나는 ‘떠난다’라는 사실 만으로도 신이 났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날씨의 뉴욕이라니! 100일 수행을 함께 했던 고은이와 2030세미나를 함께하던 광합성(이하 합성), 문탁 선생님으로 뉴욕 여행팀이 꾸려졌다. 하지만 뉴욕 여행팀이 꾸려지자마자,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 난관에 봉착했다. 그 이유는 돈이 없어서도, 영어를 못해서도, 여행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바로 뉴욕여행팀이 꾸려지자마자 시작한 것이 ‘세미나’였기 때문이다. 흔히 여행을 준비한다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