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은, <나의 뉴욕여행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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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은


1. 책으로 뉴욕을 먼저 만나다

   어느 가을날, 세미나 쉬는 시간에 문탁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런 말을 하셨다. “너네들 중에 뉴욕 갈 사람?!” 갑자기 뉴욕이라니? 난데없는 해외여행 제안 놀랐지만 해외에 가본 적이 없던 나는 ‘떠난다’라는 사실 만으로도 신이 났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날씨의 뉴욕이라니! 100일 수행을 함께 했던 고은이와 2030세미나를 함께하던 광합성(이하 합성), 문탁 선생님으로 뉴욕 여행팀이 꾸려졌다.

   하지만 뉴욕 여행팀이 꾸려지자마자,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 난관에 봉착했다. 그 이유는 돈이 없어서도, 영어를 못해서도, 여행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바로 뉴욕여행팀이 꾸려지자마자 시작한 것이 ‘세미나’였기 때문이다. 흔히 여행을 준비한다면 어떤 짐을 챙겨갈지, 현지에 어떤 곳을 갈지, 무엇을 경험할지부터 떠올릴 것이다. 정말로 나는 “책부터 읽어야지”라는 말이 어떤 여행 가이드북을 읽을지 고민하는 줄 알았지, “뉴욕 여행준비”세미나를 위해 같이 책을 읽어보자는 말일 줄은 몰랐다! 함께 읽게 된 책은 이와사부로 코소의 <뉴욕 열전>. 그렇게 단기 뉴욕 여행준비 세미나가 열렸고 나는 첫 발제를 맡았다. 하지만 첫 세미나 당일, 나는 한 시간 지각에 발제문을 완성하지도 못한 채 나타났다.

   내가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문탁쌤은 고은과 합성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당연히 문탁쌤에게 엄청난 불호령을 맞고, 너는 뉴욕에 가지 마! 라는 말씀까지 하시며 세미나실에서 나가버리셨다. 그러나 고은과 합성은 문탁쌤의 그런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주었다. 나는 만일 뉴욕에 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고은과 합성에게 미안해서라도 이번 책의 발제만은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성과 고은에게 사과를 하고 이후로 매주 <뉴욕열전> 전체를 발제를 해갔고, 내 노력이 갸륵해서인지, 안타까워서인지 다행히도 나는 뉴욕 여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파지스쿨이나, 다른 세미나에서 책의 일부를 읽고 발제를 했던 적은 있지만 책 한권을 전부 발제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여행에 왜 공부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제일 열심히 뉴욕을 공부했다. 뉴욕은 정말 신기한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흔히 미국은 “인종의 셀러드볼”이라고 불리는데 그 중에서도 뉴욕은 가장 그 별명에 걸맞는 도시였다. 더욱이 뉴욕에는 단순히 이민자들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뉴욕이라는 공간 안에서 무수한 사건들과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무시 받는 시골여자, 뮤지컬배우가 꿈인 흑인 게이배우, 이방인을 싫어하는 퀸즈출신 약쟁이 집주인들이 입체적으로 느껴졌고, 그만큼 뉴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 직접 만난 뉴욕의 모습들

   사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뉴욕 공부의 큰 보람이 느껴졌다. 뉴욕으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은연중에 ‘굳이 뉴욕에 가야할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미 비행기에 탔으면서 말이다) 생각해보자. 사실 세상 어딜 가나 맥도날드랑 KFC가 있고 건물들의 모습도 전부 비슷하고 핸드폰만 있으면 어디든 보고 듣는 것은 가능한데 이미 공부까지 한 마당에 꼭 그 현장에 가야만 하는 걸까?

   비행기를 타고 가며 한동안 그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는데,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는 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예상하지 못한 여러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대도시임에도 한국보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뉴욕의 환경이나 풍경에 놀랐다. 게다가 더럽기로 악명높은 뉴욕 지하철도 내 눈에는 그다지 더럽지 않았다. 의외로 맥도날드랑 KFC도 많지 않았다!  대신 가장 뉴욕에서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거리 여기저기 널려있는 전시와 인파에 금방 피곤해졌다.

   반면에, 뉴욕에서 재미있던 것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고은과 합성, 문탁쌤과 함께 도시락 싸서 공원에서 도시락 까먹기, 열심히 지도 찾아 대중교통 이용하면서 사람 구경하기, 매주 주말, 동네 학교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가보기, 현지에 열리는 북세미나에 하나도 못알아들어도 앉아 있어보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부리며 거리 거닐기... 정말 뉴욕에서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마주침이었다. 이런 말이 어쩌면 조금 식상할지도 모르겠다.

   오큐파이 시위가 열렸던 주카티 공원과 얼마 떨어진 곳에 있었던 월가의 황소는 생각보다도 조그마했다. 거리를 축제 장식들로 뒤덮어 이곳이 뉴욕인지 이탈리아인지 헷갈릴 정도였던 산 제냐로 축제에서는 조금만 벗어나도 중국 뒷골목의 거리가 펼쳐지곤 했다. 모퉁이를 돌았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다른 공간이 펼쳐질 수 있는지! 백인들은 맨하탄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지냈던 퀸즈 지역에서는 히스패닉과 맥시칸이 대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순간들마다 <뉴욕열전>에서 보았던대로 뉴욕은 정말 세계의 모든 것을 꽁꽁 모아놓았음에도 섞여있지 않은 ‘잡다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뉴욕의 모습에 놀라고, 여행을 재미있어 했던 것은 그 순간들 속에서 <뉴욕 열전>에서 읽은 모습들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뉴욕에 3주동안 머물렀는데, 보통 그 정도 기간을 머문다고 한다면 주로 가까운 워싱턴이나 보스턴을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거리마다 마주치는 뉴욕의 모습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뉴욕에서 있었던 특별한 마주침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3. 뉴욕에서의 만남#1, 맑스

   그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은, 바로 맑스다. 그 당시 고은과 합성은 상반기에 <자본론>을 읽고 이어 하반기에도 맑스를 공부하고 있었다. 뉴욕에 다녀오는 동안 한국에서 열리는 세미나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선 자체적으로 뉴욕에서도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해야 했다. 뉴욕 일정을 계획하면서 주에 두 번 세미나 시간을 비워두었고 그 계획표를 보며 ‘나는 맑스 공부 안하니까 따로 더 돌아다녀야지’라고 생각했다. 이미 뉴욕도 공부했는데 거기까지 가서 시간 아까워 어떻게 공부까지 한담! 그런 내 생각이 다 보인다는 듯 문탁 선생님은 “놀 궁리 하지 말고 너도 책 챙겨 가!”라고 하셨고, 그렇게 뉴욕에서 맑스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읽었던 맑스의 글들은 <자본론>을 쓰기 이전의 초기 저작들이었다. 이미 <자본론>을 읽고 맑스에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는 고은과 합성과 달리 텍스트를 읽으며 나는 혼란에 휩싸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왜 읽는 건지도 모르겠으며, 단지 뉴욕을 오는 댓가로 공부를 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렇게 졸았는지 안 졸았는지 모를 세미나를 두 번 정도 듣고 나서였다. 우리는 맨하탄 소호의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맥날리 잭슨>(Mcnally Jackson)이라는 한 서점에 들리게 되었다. 그 곳에는 직접 제본도 할 수 있는 기계도 있었고 여러 일간지와 주간지도 진열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딱! 맑스를 마주쳤다! 주간지 표지에 코카콜라와 맑스를 합친 벽화가 실린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뉴욕에서 맑스를 마주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레디컬 북카페 <블루스타킹>(Bluestockings)에서도 맑스를 공부하는 세미나원들을 모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덕분에 이를 계기로 맑스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문탁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때엔 별다른 질문 없이 새로운 공부를 하곤 했다. 그런데 뉴욕에서 만난 맑스를 읽고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맑스를 공부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왜 사람들은 아직도 이 오래된 책을 읽고 있는 걸까? 나는 뉴욕 여행을 마치고도 맑스 세미나에 합류해 맑스의 글을 읽어나갔다.

   맑스가 얘기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도 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에 대해 가장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이 없는 노동자들이면서도 자본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맑스는 이 사람들이 지금의 자본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도 스무살 이후로 취업에 실패한 이후, 알바 사장님 밑에서 불평하고 싫어하면서도 시급을 받아가며 지내고 있다. 문탁에서 공부를 하고 활동하는 것 이외에는 알바가 거의 유일하게 내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맑스를 읽기 전까지 내가 ‘노동자’라거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취직에 성공해 ‘다른 일’, ‘진짜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생각했던 ‘진짜 일’을 하더라도 자본을 더욱 공고히 하는 사람이 될 뿐이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공산주의당 선언) 내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생각했던 이유는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바로 나를 지칭하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내게 세계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말은 분명 마음 속에 뜨거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감동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익히 알고 있듯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했고, 체제의 전복이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나 역시도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프롤레타리아트라면, 맑스가 자본의 전복이라고 말하는 행위를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은 내가 프롤레타레아트에 속해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현실에 얌전히 수긍하고 싶진 않지만 적극적이지도 못하는 이중적인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맑스의 공부는 나에게 복잡한 마음을 안겨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마음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맑스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뉴욕에서의 만남#2, 해완

   맑스와의 만남 이외에도 뉴욕에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만남이 또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여행하면서 머물렀던 크크성의 관리인이었던 해완언니의 만남이다. 크크성은 문탁과 비슷한 인문학 공동체, <남산 강학원>에서 만든 일종의 뉴욕지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해완은 2014년부터 이 크크성을 운영하며 뉴욕에서 지내고 있었다.

   해완은 뉴욕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조금 나열해보자면 뉴욕에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뒤, 장학금을 받을 정도의 공부를 해야 했고, 따로 생계를 위해서 알바를 하면서 크크성도 운영하고 있었다. 세 차원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차원의 일들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해완은 거기에 개인적인 공부를 위한 글까지 쓰고 있었다. 내가 해완에게 정말 힘들지 않냐 물었을 때, 해완은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공부가 뉴욕에서 지내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것은 돈이나 짐이 아니라 다름 아닌 공부라고 말이다. 나라면 당장에라도 도망쳤을 텐데, 해완이 말하는 공부가 무엇이기에 고된 뉴욕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일까?

   귀국하기 전, 우리는 파티를 열어 해완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 친구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일본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대만이나 베네수엘라에서도 온 사람도 있었고 인천에서 왔지만 뉴욕에서 알게 된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거기서 나는 언니가 말했던 공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바로 오기 전에 공동체에서 지냈던 경험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했던 공부였던 것이다. 해완의 공부는 장학금을 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법, 그리고 그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는 법이었다.

   해완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말은 뉴욕은 특별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해완도 저마다 사연있는 과거에 놀라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모두 저마다의 다른 삶의 거쳐 뉴욕이라는 타지에서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뿐, 그저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해완의 공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다른 이를 이해하고 상대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뉴욕 거리를 거닐며 마주쳤던 잡다한 뉴욕이 바로 해완의 거실로 요약되는 것 같았다.

   현재 언니는 뉴욕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쿠바에서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쿠바 쪽에서 의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는 분명 그 곳에서도 다양한 공부를 만들어갈 것이다.


    



 


5. 여행을 마치고


   누구에게나 해외여행은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운 좋게도 뉴욕에 다녀온 이후로도 나는 몇 번 더 가족들과 해외로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 번은 일본 오사카에 다녀온 것이고 다른 한 번은 독일을 전국적으로 10일동안 다녀온 것이었다. 두 곳 다 처음 가보는 곳이고, 뉴욕에 갔을 때처럼 영화에서 보던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루하고 힘들었다. 싫었다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좋고 즐겁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계속해서 가장 돈 없이 지내고 잔소리도 제일 많이 듣고 일도 제일 많이 했던 뉴욕이 생각났다.

   사실 사람들은 일상의 일탈을 위해 여행길을 오르곤 한다. 주변 친구들만 봐도 명절 때 친척집 가듯 연례행사로 해외여행에 다녀오는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에게 해외여행은 일상에서의 단절과 또 복귀를 위한 휴식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뉴욕에서 여느 일상과 비슷한 생활을 보내고 왔다. 여행을 준비하며 세미나를 시작했고, 뉴욕에 가서도 공부를 했으며, 여행에 다녀와서도 계속해서 공부했다. 내가 이런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한다면 친구들은 하나마나 한 여행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지점이 계속해서 뉴욕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뉴욕에서 마주친 대부분이 바로 공부로 인한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다시 여행을 갈 수 있는 계획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책을 펼쳐들 것이다. 가이드북이 아닌 그 곳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책 말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9. 5. 1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