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공자씨, 그동안 오해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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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은

1. 정신 차리고 보니 동양고전공부 중

   동양고전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한자로 된 책이 내 손에 쥐어져있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양고전공부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나있었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지만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 같진 않다. 문탁 네트워크의 원문을 암송하는 세미나에서 『논어』로 한 페이지짜리 글을 쓰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글을 가져가면 고전공부를 같이하는 사람들은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하고,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은 꼰대 같은 문장을 들고 왔다며 눈총을 준다.

   사실 내 친구들만 동양고전을 보고 ‘꼰대 같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건 아니다. 인터넷에 『논어』나 공자에 관련된 정보를 찾다보면 세대별로 동양고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40~50대의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원문을 꽤나 자주 인용하는데, 보통 자신의 의견에 권위를 부여하느라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오역이 빈번한 글은 물론, 『논어』를 ‘공자가 쓴 책’으로 소개한 글도 있다. 반면 20~30대의 사람들의 글에선 한자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가부장적인 사회를 만든 주범으로 유학과 공자를 지목하는 내용이 대다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야말로 동양고전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을만한 사람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줬던 건 페미니즘 공부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때부터 위계적인 가부장문화를 따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고, 꼰대와 대적하는 것이 몇 년간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한 때 몇몇 커뮤니티의 20대들이 모여 여행을 가기 위해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나보다 10살이 많은 B는 초면에 나에게 반말을 툭 던졌다. 나는 B가 무례하다고 생각해 같이 말을 놔버렸다. 훗날 B는 나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뭐하는 애인가 싶었지. 아주 황당했어.”


    

2. 깍두기의 피, 땀, 눈물

   지금 와서는 어쩌다 동양고전을 같이 공부 할 친구를 찾게 되었을까? 대학교 자퇴가 사건의 발단이었다. 백수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무슨 공부를 할 것이냐는 독촉을 받았다. 나는 -별 고민 없이- ‘왜들 동양고전공부를 하지? 뭐가 있나, 나도 좀 해볼까?’라는 생각을 했고, 이 생각은 나비효과가 되어 되돌아왔다. 졸지에 문탁 네트워크의 『장자』 수업에서 열심히 졸다가 서울로 유학을 가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문탁 네트워크의 싸부이자 서울에서 인문학당 상우를 운영 중이신 우쌤은 서울로 유학 온 나를 ‘깍뚜기’로 소개하셨다.

   내가 서울에서 들었던 수업은 ‘삼경스쿨’이었다. 그 당시 이곳엔 한문 좀 한다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문은커녕 한자에 관해서도 보통사람 이상으로 무지했다. 내가 한자로 쓰인 책을 못 알아보는 건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국어로 말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으니 복습도 예습도 할 수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매번 수업하기 전에 보는 『천자문』 한자시험을 준비해가는 것이었다. 한 주에 몇 십 자의 한자를 외워갔는데, ‘之’자도 모르던 내게 한자 외우기란 정말 곤욕스러웠다. 혼자서 문탁의 공부방에서 열심히 한자를 쓰고 있을 때 풍겸쌤은 내가 쓴 한자를 보고 (비)웃으며 지나가곤 하셨다. “크하하 이게 한자니 발그림이니?” 나는 한자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한자를 쓰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일주일 내내 한자만 외워야 시험 날 겨우 다 쓸 수 있었다.

   이렇게 백 일정도가 지나자 그 노력을 인정받아 깍두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네가 죽자 살자 외워오는구나.” 그러나 나는 우쌤의 말이 다음 과제를 주겠다는 의미일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숨 막히는 중압감이 해소되었을 무렵, 우쌤은 덜컥 『천자문』 강독을 맡기셨다. 삼경스쿨은 돌아가며 수업을 준비해오고 우쌤이 보강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수업을 준비해온 사람이 한문 읽는 것을 ‘강독’이라고 부른다. 한문을 읽으면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티가 나기 때문에 꼼수를 부릴 수가 없다. 준비를 덜 해오거나 그동안 공부를 얼마나 안했는지가 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니, 아찔했다. 수학의 부호를 겨우 막 익힌 학생이 수학응용문제를 사람들 앞에서 풀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수업에 민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극도의 긴장상태가 되었다. 밑천이 바닥이라는 걸 보이게 된다는 창피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강독준비는 마치 깜깜한 동굴에서 더듬더듬 손 감각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았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나는 또다시 무식하게 시간을 들이부었다. 사실 당시의 삼경스쿨 멤버들이 모두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치가 없는 나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고, 홀로 중압감에 시달리며 열심히 준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천자문』 강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그 뒤로도 나는 틈만 나면 시험대에 올랐다. 한자 띄어 읽기나 어조사나 종결사 같은 기본문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원문에 있는 동그라미가 뭘 의미하는지, 주석이란 게 뭔지, 창피해서 묻지 못했던 것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눈치를 잘 못 보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능력 없는 능력 다 발휘하여 눈치껏 익히는 수밖에.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드디어 삼경스쿨 세미나 시간에 멍 때리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책의 어디를 하는지 몰라서 남들 고갯짓을 따라 페이지를 넘기다가, 뜻은 이해하지 못해도 눈으로 글자를 좇을 수 있기까지 1년이 걸렸단 말이다.


    





3. 공자씨, 그동안 오해가 많았습니다.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군’의 시간을 1년 보내고 났을 때 쯤, 그러니까 내가 한자공책에 쓰는 것이 발그림이 아니라 문자가 되었을 때 즘이었다. -풍경쌤曰 “어머 고은아, 네가 드디어 환골탈태했구나!”- 삼경스쿨에선 『천자문』을 떼고 『논어』를 배우고 있었다. 사실 나는 대부분의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드문드문 귀에 들어오는 구절이 늘어나고 있었다.

   삼경스쿨에서 『논어』를 주자의 주석본으로 수업을 듣다보면 공자가 세상에 둘 없는 성인처럼 보인다. 공자는 때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천 강령들을 써놓고 마지막에 “어찌 나에게 이런 것들이 있겠는가”(何有於我哉, 술이2)로 말을 마무리한다. 그럴 때마다 주자는 겸손하고 또 겸손한 말이라며, 공자를 최고의 성인으로 떠받들기에 여념 없다. 사실 처음 『논어』를 읽을 때는 공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도저히 실존하는 인물처럼 보이지가 않았는데, 그의 말이라고 흥미롭게 들릴 리가 없었다. 공자의 말이 귀에 들리기 시작한 건 문탁 네트워크에서 『논어』로 세미나를 하고 부터였다. 선생님들은 주자의 공자 찬양에 진절머리를 냈다. “아휴~ 또 이런다, 또 이래!”

   때론 공자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꼭 자로 앞에서 이런 말까지 해야 했나? 으이구, 너무 하네 정말.” 성인의 말씀에 토를 달며 읽어도 되는 건지, 놀라웠다. 그런데 이렇게 문장을 읽다보니 언제인가부터는 공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야 이놈아! 썩은 나무에 조각하랴, 똥으로 쌓은 담장 손질하랴? 허구한 날 낮잠 자는 너를 내가 뭐하러 꾸짖겠냐?” 맨날 낮잠만 자는 제자를 보고는 열불이 터져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을 하는 공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더 이상 공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때부터 동양고전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논어』를 읽으며 무엇보다 충격을 받았던 것은 공자가 생각보다 꼰대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자는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적은 없었지만, 시대의 명망가였으므로 세력가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세력가들은 공자에게 좋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제자를 추천받거나, 통치의 방법을 묻고자 했다. 한 나라의 최고 세력가인 계강자가 물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공경심과 진정성과 자발성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과 같은 윗사람을 잘 모시게 하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공자는 직설적인 화법을 쓰는 않았다. 대신 엉뚱한 대답을 한다. “당신이 엄중하면 백성들이 공경심을 가질 것이고…”(『논어』 「위정」 20장)

   그러니까 공자는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계강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고 남에 대해서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꼰대의 전형이 아닌가? 공자는 계강자의 문제를 시원하게 꼬집었다. 하지만 마냥 시원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보면 타인의 생각이 불편해서, 타인을 나무라고 그에 반발하기만 했던 20살의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꼰대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4. 정답은 없지만 답은 있다

   공자는 높은 산을 거의 다 만들어놓고는 마지막 삽질에서 엎게 되는 것도, 이제 시작하려고 평지에다 첫 삽질로 나아가는 것도 모두 자신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읽다가 우쌤은 물으셨다. “왜 마지막 삽질에서 모든 게 무너졌다고 생각해?” 무엇이 답일까 고민하는 날 보시더니 정해진 답은 없다고 하셨다.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는 대답했다. “오만해서요. 이미 끝이 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때는 공부에 대해 오만방자했던 나를 돌아보던 시기였다. 누군가들은 솔직하지 못해서,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아직 끝나지 않은지 몰라서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맥락에서 답을 찾아냈다. 모든 대답들은 신선했다.

   그럴 수도 있다며 우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셨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야.” 나는 우쌤의 말을 들었을 때 ‘흡’하고 숨을 멈췄다. 사실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우쌤의 대답은 우쌤이 ‘공부’를 무어라 생각하시는지, 어떻게 공부해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한마디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그르친다는 것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면, 공부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동안 또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100일 수행을 한참 하고 있었을 때 내 눈에 띄었던 단어는 삼가다는 뜻의 ‘愼’과 ‘謹’이었다. 이 한자들은 주로 어떤 일을 신중히 하고, 상대를 공손히 대하고, 온 마음을 다해야하는 태도를 지칭할 때 쓰였다. 몇 달 동안 이 단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삼가다’는 것이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공자는 추상적인 개념을 거의 다루지 않아서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삼가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위사람들을 눈여겨봤다. 아무래도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이 다른 사람을 선생님으로 모시는 태도가 ‘삼가다’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함께 공부하는 사이에서 누군가를 선생님으로 모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우위를 비교할 수 없는 나름의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선생을 모시는 일의 관건은 상대방의 자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이었다. 누군가를 선생으로 모시는 건 타인이 나보다 특출 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 속에서 누군가에게 배우겠다는 자신의 겸허한 마음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드러나는 건, 그러니까 주목해야하는 건 선생의 우월함이 아니라 선생을 모시는 사람의 미덕인 것이다. 선생을 모시는 사람은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면서도 상대방을 높이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마음이 무엇인지 예측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겸손해하며 스스로를 낮춰본 적도,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5. 엉덩이가 커졌다

그동안 고전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고전에는 신체를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근 3년 동안 초등학생들과 고전을 읽고 있다. 나와 꽤 오랫동안 수업을 한 G는 운동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다. 앉아있는 것보단 뛰어다니는 것을 잘하고, 연필 잡는 것보다 야구배트 잡는 것을 좋아한다. 함께 뒷산으로 등산을 갈 때면 늘 지루해하며 말했다. “아 빨리 좀 갈 수 없어요? 차라리 저 먼저 가게 해주세요!” 언제나 같은 말을 반복하던 친구였는데, 얼마 전 등산에 가서는 상상도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 체력이 약한 친구의 손을 잡고 끌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을 앞질러서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던 G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먼저 온 사람들이 책상을 놓아주자”고 얘기했을 때 내 말을 한 번에 수긍한 친구들은 그동안 거의 없었다. “내 것도 아닌데 왜요?”라고 묻던 친구였던 Y는, 얼마 전 도자기 수업에 오지 못한 친구를 대신해서 자발적으로 선물을 만들었다. 갑자기 달라진 G와 Y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 한 학기동안 친구와 관련된 문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덕분은 아닐까? 다른 친구를 위해 무언가를 하자는 이야기를 친구들이 납득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데까지만 15주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점은 초등학생들의 자각하고 변하는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인들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분위기가 바뀌었다며 “너 부처님 닮아졌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여전하다. 두 달 전 즈음, 20살이 되어 처음으로 사귀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내 부족함으로 그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멋있는- 그 친구에게 상처주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자 나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스스로가 고대하던 새new사람이 되기는커녕, 부채감에 파묻혀 같은 자리만 뱅뱅 돌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고전을 읽은지 만으로 3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고전을 읽었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만큼의 지식을 습득하지도 못했다. 다만 내가 달라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만한 것은 신체가 바뀌었다는 거다. 전형적인 태양인이었던 나는 어깨가 골반보다 넓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엉덩이가 어깨너비와 견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실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지방이나 해외를 다니고,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느라 일사병과 햇빛 알레르기에 걸렸던 나에게 의자에 오래 앉아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페이지는 왜 그렇게 더디게 넘어가고 시간은 왜 그렇게 안 가는지, 의자에 앉아있다 보면 엉덩이는 근질거리고 볕이라도 잘 들었다 하면 마음이 간질거려 참기 힘들었다.

만약 한자를 공부해야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우쌤을 만나 공부에 대한 자극을 받지 않았더라면, 『논어』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살아왔던 대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나러 훌쩍 자리를 뜨는 것이 나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양고전을 읽다보면 살아왔던 대로 살지 못하게 만들고,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만들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신체를 바꾸어 놓는다. 이것이 내가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특별한 건 없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7. 10. 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