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은, <문탁에 처음 오는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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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은

 

1. 백수는 좋지만...

   동천동으로 이사를 온 건 고등학교 졸업을 한 직후였다. 그 때의 내 상황은 오지 한 가운데 뚝 떨어진 것과 같았다. 이 동네엔 내 친구도, 학교도, 친척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에게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스럽거나 힘들어하진 않았다. 원래 돌아다니는 것 보다 집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기에 나는 그 즈음부터 집에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뭔가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문득 떠오르긴 했지만, 그런 생각은 천천히 지나가는 구름을 보다 어느새 구름과 함께 날아가곤 했다. 그 때 생각했다. ‘백수는 좋구나...’

   당연하게도 엄마는 집에서만 지내려고 하는 나를 견디기 힘들어하셨고,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을 해야 했다. 하나, 입사시험을 계속 보고 취업한다. 둘, 뭐든 좋으니 뭐라도 해라!‘ 맞다. 백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아니다, 사실은 계속해서 이렇게 지내고 싶다! ... 이런 양극단의 갈등을 넘나들면서도 솔직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조금 복잡했다. 가족과 동생들을 위해 내가 얼른 돈을 벌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무감과 그러지 못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구석에 한데 뒤섞여 불안했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곧 소속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졸업 이후 나는 대학교, 혹은 회사로 소속이 이어져야했지만 나의 소속은 그대로 단절됐다. 처음엔 자유를 느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고 생각하자 자유는 곧 한계가 되었다. 이 때부터 소속의 결핍이 절대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취업을 하기 위해서 보냈던 시간들도 결국에는 소속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던 가장 큰 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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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지스쿨에 오다

   이후에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네에 있는 인문학 공동체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파지스쿨>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문탁네트워크의 청소년 인문 프로그램으로 부모님이 나에게 제시한 몇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였다. 파지스쿨 1기의 수업은 주에 두 번, 6개월 동안 인문, 동양고전, 영어, N프로젝트(공부하는 아이들끼리 프로젝트를 계획해 진행하는 시간)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순히 가까운 동네에 있다는 이유로 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도 수업이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동양고전 시간으로, 이 시간에는 <논어>를 읽었다. 논어의 주인공 공자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전부는 명절날 지내는 제사를 정한 사람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미 보지 않아도 <논어>가 지루하고 잔소리같은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첫인상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들과 파지스쿨러들이 함께 <논어>에 쓰여 있는 공자의 말에 하나하나 딴지를 걸고, 마음껏 반박하며, 공자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함께 파지스쿨 1기를 했던 사람들은 세 명이 더 있었다. 17세,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1년의 시간을 갖기로 한 친구, 18세, 현대무용을 하기 위해 깊은 생각을 갖고 싶었던 친구, 24세, 대학을 자퇴한 친구... 21살이었던 나. 아무래도 24살의 오빠와 내가 있기 때문이었는지 파지스쿨에서도 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곤 했다. “파지스쿨이 끝나면 다들 어떻게 살 거야?” 이렇게 묻자 모두 각자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나는 다시 고등학교를 다녀보려구.”, “나는 유학을 준비할 것 같아” “나는 일단 군대나 가야지” 어쩐지 모두 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나는 1기가 끝나면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아 이러면 부모님이 뭐 할 거냐고 또 물어보실텐데...’ 나는 부모님과의 실랑이에 대해 걱정할 뿐이었다.

   부모님과 나는 이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언제나 별다른 결론이 없었다. 답답하셨던 부모님은 쉽게 생각해보라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다.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방법이고, 다른 것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생계를 이어가는 거야.” 이 두 방법에 따르면...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찾는 건 고사하고 뭘 하고 싶은지 묻는 것 조차 소용없다고 느껴졌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을 뿐더러, 이미 취업처럼 해야 되는 것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N프로젝트를 계획하기 위해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N프로젝트 시간이 개인적인 자기계발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름 ‘유용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의견을 냈다. “컴활을 따는 건 어떨까요?”, “토익점수를 올려야 하는데...” 쉽게 결정이 나지 않자 평소에 한 번쯤 생각해본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요리는요? 한식자격증같은 걸 따는 거에요.” “한국사 공부 할까요?” “캘리그라피 같은 건요?” 등등... 내 의견이 종이 한 면이 넘어가도록 결정을 못하자 노라쌤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해보고 싶은 것은 없어?”

   그동안 나에게는 ‘나중’의 일이 가장 중요했다. 사실 학교는 나중을 위해 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하려는 것은 나중을 위한 일이 아니면 불필요한 일이 되곤 했다. 노라쌤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미끼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가 던졌는지도 모를 미끼를 좇는 물고기처럼 언제부터인가 나는 ‘하고 싶은 것’이라는 미끼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미끼를 물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 지내온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지낸 것이 모두 취업과 진학이라는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한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유용함을 생각하기보다 그저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살려 중국 고전 사기 세미나를 듣는 것으로 N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서 지옥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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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지사유 매니저가 되다

   파지스쿨 1기가 끝나고 나는 한 번 더 파지스쿨을 다니고 싶어졌다. 나중을 고려하지 않고 대학도, 일도, 취업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대학도, 일도, 취업도 하지 않고 대신 파지스쿨을 다니겠다는 내 의견에 반대를 하셨다. 파지스쿨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졸업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더욱이 이미 한 번 한 것을 굳이 더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거였다. 이어지는 대립에 급기야 엄마는 비장의 카드를 썼다. 파지스쿨을 다니기 위한 학비를 대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250만원정도 했던 파지스쿨 학비는 대학에 비하면 적은 돈이었지만 백수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굉장히 높은 벽이었다. 생각보다도 강경한 부모님의 대응에 당장 내가 학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빠른 결론을 짓고 선생님들에게 2기를 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내가 파지스쿨을 다닐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인 즉슨, 문탁에서 만든 ‘길위기금’에 파지스쿨 학비 일부를 신청하자는 것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파지스쿨이 사용하던 <마을공유지 파지사유>는 문탁에서 운영하고 있는 카페로, 문탁의 여러 활동들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지금은 자율카페로 변경됐지만, 당시 시간별로 매니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겐 월 10만원 정도의 활동비가 지급됐다. 내가 매니저를 한다면, 활동비로 월에 30만원을 줄테니 그것으로 학비를 충당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나는 이런 제안에 기쁘기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그 당황스러움이란 마치 이전에 ‘하고 싶은 것’을 물었을 때 쉽사리 말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했다. 파지스쿨을 다시 하고 싶긴 했지만 반년밖에 안 본 사람에게 일을 준단 말인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내가 카페일을 잘 못하면 파지스쿨에서도 잘리는 걸까? 아니, 젊다고 돈을 더 준다는 게 말이 되나? 이런 고민과 걱정 속에서도 나는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완전 좋죠!” 좋고말구요...

   파지사유가 다른 카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마을 공유지’라는 점이다. 공유지라는 것은 사람들이 함께 공간을 사용하고 관리한다는 의미인데, 내가 처음부터 이런 특성에 익숙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일’은 시간에 맞춰 주어진 것을 하는 알바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시키는 일만 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곳에선 그렇게 일할 수 없었다.

   파지스쿨을 다닐 땐 일주일에 두 번만 왔지만 매니저일이 더해져 다섯 번을 오자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이 곳은 특히나 외부손님보다 문탁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된 이용자였다. 그러다보니 어제 본 사람을 오늘 보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누가 언제 올지도 다 알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저녁에는 가끔 행사를 했는데 마감시간을 넘어서까지 진행되곤 했다. 나는 이미 카페 마감시간을 다 알고 있을 사람들에게 마감시간이 지났으니 나가라고 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을 하기도 했다. 만일 알바였다면, 아주 짜증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오히려 무슨 행사인지 궁금해져 한 구석 차지하고 앉아 행사를 구경하다 열두시가 다 되어 집에 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문탁에서 자주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내게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하셨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스스럼없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여기서 공부를 하는 걸까? 서로가 굉장히 가까워보이는데, 왜 그런 걸까? 왜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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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부를 하는 이유

   이런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은 2015년 문탁 축제일이 다 되어서였다. 문탁의 축제는 1년간 배우고 생각했던 것을 모아 함께 나누는 장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람의 많은 이야기들이 며칠간 집중되어 쏟아진다. 그 해의 주제는 <좋은 삶: 부엔 비비르Buen Vivir>였다. 나는 그저 참석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자료집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료집에는 문탁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들이 왜 문탁에서 공부하는지, 그들이 어떤 좋은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파지스쿨 선생님인 뿔옹쌤은 대기업을 다니다 직장을 관두고 문탁에서 공부를 시작하셨다. 청소년과의 만남이 선생님에게 질문이 되고, 적극적으로 회사를 나와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하신 것이다. 스마일리쌤은 핵발전소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에 적극적인 반핵활동을 하고 계셨다. 쌤은 발전소에 취업할 뻔 했던 나를 데리고 함께 핵발전소 반대 시위를 나가기도 하셨다. (명식오빠는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연히 가고 싶을 것이라 생각했던 대학원이 아니라 이 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또래인 고은이는 문탁에서 하는 공부가 대학에서 하는 공부보다 훨씬 더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각자 다른 방식이지만 일반적인 루트와 생각으로 살겠다고 얘기하는 우리는 결국 비슷한 곤경에 처한 게 아닐까? 각자 스스로 길을 내도록 둘 것인가? 우리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랬을 때, 여기 문탁에 공부하며 세상을 만나러온 우리는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김고은, 공부를 하기로 했다, 문탁 2015 축제 자료집) 



   나는 그 이야기들이 바로, 사람들이 이 곳에서 함께 지내는 이유라는 걸 알았다. 함께 공부를 하고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를 다지고 있는 이유는 각자가 해답을 찾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지만 하고 있는 서로의 상황은 비슷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고민,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내가 지겹게 들어왔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모아졌다. 내가 나중을 위해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내가 부딪치고 있는 삶의 문제를 위해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고은이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정말 문탁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기뻤다. 신났던 걸까? 그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답해하던 내가, 주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였고, 이 질문의 해답을 위해 함께 공부하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되어서였다. 불손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른들과 내가 함께 있어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어른들이 나와 다르지 않은 고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5. 문탁에 처음 온 친구들에게

   나는 길위기금과 파지사유 매니저 활동비로 학비 250만원을 해결할 수 있었다. 파지사유 매니저로 일하는 것은 마냥 좋은 일들의 연속은 아니었다. 이 일이 알바와 다르다고 느낀 것은 (문탁 사람들에게 매일 잔소리를 들은 탓도 있지만) 공유지 관리를 나에게 맡긴 사람들이 나를 단순히 알바생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건 정말 어마어마하고 굉장한 환대였다. 영문도 모른 채 그런 환대를 받았으니 당황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쉽게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구박하고, 돈을 주려 하고 또 다음날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이었다. 당연하지만 문탁에 있는 사람들도 백수였던 나를 단번에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 주었던 길위기금은 단순히 돈이 부족한 청년들에게 주는 기금이 아니라, 앞으로도 함께 지내고 싶은 이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파지사유 매니저는 파지스쿨만 하던 내게 다른 사람들을 알고, 나아가 문탁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매니저 일을 하지 않았다면 문탁에 대해서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길위기금과 파지사유 매니저는 내가 순전히 운이 좋고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너도 여기서도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어른들의 은근한 꿍꿍이(?)가 있었다는 거다. 그러면 어떤가? 결국 나는 문탁에서 더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이상 실현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기보다 지금 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하며 말이다. (이젠 좀 나중을 생각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처음 파지스쿨을 다닐 때만해도 문탁에서 돌아다니는 20대가 정말 몇 없었는데, 요즘에는 <예술프로젝트>나 <길 위의 인문학>을 통해 새롭게 만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나는 처음 문탁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처럼 새롭게 만나는 친구들도 궁금하다. 어쩌다 문탁에 오게 됐는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처음의 나처럼 문탁이 당황스러운지 말이다. 그리고 얘기해주고 싶다.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난감하거나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문탁은 너가 고민하는 것을 함께 고민해주고,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7. 2. 2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