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참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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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고은


    문탁 네트워크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온 내게 내려진 첫 미션은 ‘수행’이었다. 수행승도 아닌 내게 수행이라니, 이게 웬 말인가! 사실 이 수행은 내가 아닌, 나와 동갑내기 친구 동은이에게 내려진 지령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동은이에게 문탁쌤이 말했다. “100일 동안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너는 곰에서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런데 때마침 동은이와 또래인 내가 대학을 자퇴하고 갈 곳이 없어졌으니, 나도 수행에 동참해보라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1. 쓰레기봉투만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수행 하루 일과는 아주 단출하다. 아침 아홉 시까지 문탁 네트워크에 도착하기 위해 일곱 시 반쯤 집에서 나온다. 보통은 한 시간 남짓이면 공간에 도착하지만, 이른 시간엔 출근시간이 겹쳐 삼십분이 더 걸린다. 도착해 문을 열고 청소를 마치고나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공부방에 틀어박혀 있기로 다짐하곤 한다.

    여느 때처럼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뒷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쓰레기봉투에 쓰레기를 담아 누르고 또 눌렀지만 그날은 더 이상 눌러지지 않았다. 백일수행을 시작한 건 내가 문탁 네트워크에서 세미나를 시작한지 이미 2~3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 나는 청소기도 돌리고, 접시도 닦아왔기 때문에 이 공간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쓰레기봉투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건 쓰레기봉투의 위치만이 아니었다. 걸레 건조대가 어디 있는지는 알았지만 마른 걸레들을 어디에 정리해두는 지는 몰랐다. 화장지가 어디 있는지는 알았지만 누군가들이 항상 화장지를 선물한다는 건 몰랐다.

    문득 세미나 뒷정리를 잘하지 않는다고 혼났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잔소리라며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보내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작은 거 하나쯤 안 치우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 늘 공간에 상주하며 청소하시는 게으르니쌤이 나에게 물건을 주던 일도 생각이 났다. “이 색연필 굴러다니던 건데, 필요하면 가질래?” 게으르니쌤은 분실물을 얼마나 줍는지, 근 몇 년간 필기도구를 사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공간을 매일같이 청소 하다 보니 나도 길 잃은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서랍에는 손톱깎이나 연고 같은 생활용품 뿐 아니라 누가 쓰다만 파란 동그라미 스티커, 주인 잃은 USB도 있었다.

    누군가는 연필 하나 흘리고 가는 것이지만, 모두가 한 개씩 흘리고 가면 모여서 잡동사니 산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게으르니쌤은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의 산신령마냥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적절한 사람들에게 보내주었다. 쌤이 길 잃은 물건을 발견하고, 필요한 것과 불필 한 것을 분류하는 건 매일같이 공간에 머무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일같이 공간에 있던 나 또한 곧 “여기 혹시 두꺼운 색 도화지 같은 거 있을까?”하는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물건을 금방 찾아낼 때면 나는 꽤 뿌듯했다. 비로소 이곳을 삶의 근거지로 삼는 사람, 그러니까 터전에 머무는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2. “왜 혼자 밥 먹으러 가요?”

    백일수행을 하며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때마침 중국고전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자로 읽기 위해 적잖은 공부양이 필요했다. 그때 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 문탁은 ‘인문학’ 공동체이니까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 공부는 많았고 늘 시간에 쫓겼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숨 가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조금 늦게,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다. 잡생각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하루 공부시간이 열 시간이상일 정도였다. 덕분에 모의고사에서 상위권에 들 수 있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없었다.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이면 몸이 땅 밑으로 꺼지는 듯 했고, 낮잠을 잤다하면 무조건 가위에 눌렸다. 이렇게 공부하지 않겠다고 중도에 입시를 그만둔 것이었는데, 또 다시 스스로를 몰아가며 공부를 하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나는 공부방에서 숨 가쁘게 공부했지만, 사실 문탁 네트워크의 공부방은 여느 독서실처럼 숨 막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공부방에서 나는 주로 풍경쌤 맞은편에 앉았다. 풍경쌤은 나에게 궁금한 게 많았던 것 같다. 공부하던 중간에, 밥 먹고 난 뒤에, 잠깐 물을 뜨러 간 사이에도 항상 말을 거셨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지내는데 외롭지는 않니?” “공부는 어떻게 해? 이런 건 참 어렵지 않아?” 비단 풍경쌤만이 아니었다. 문탁 네트워크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한 마디씩, 공부방에 자주 계시는 선생님들은 여러 마디씩 질문하고 말을 걸었다. 

    함께 쓰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버린 한 개의 물건이 모여 잡동사니더미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함께 지내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한 질문이 한 개씩 모여 질문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혼자 알아서 하던 것, 누군가와 공유해본 적이 없었던 것들에 대해 물었다.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 같다고 느꼈던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으면서 어물쩍 상황을 넘기곤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밥시간이 되어 주방으로 가려는데 뿔옹쌤이 말을 거셨다. “왜 혼자 밥 먹으러 가요?” 아주 친한 몇몇의 사람이 아니면 같이 밥 먹는 게 불편해 차라리 굶고 마는 내가, 한 공간에 있었을 뿐이었던 사람에게 함께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할 리가 없다. 어리둥절해하는 날 보고 뿔옹쌤은 이어서 말했다. “공부방에 같이 있었는데 같이 먹어야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같이 밥을 먹는 사이가 된단 말인가? 공간에 오래 있으면서 스스로가 터전에 머무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3.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문탁 네트워크에는 주말에 초등학생들과 한문 원전을 읽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어느 날부터 이 프로그램에 인턴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초등서당을 함께 진행했던 진달래쌤과 게으르니쌤도 다른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많은 걸 물어봤다. 나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일이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대화를 할 필요가 있나?’ 내가 별 대답을 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또 물었다. “해보니까 어때?” 자꾸 물으니 조금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아주 끈질겼고, 나는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모습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뭘 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게으르니쌤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학동들을 압도했고, 진달래쌤은 상황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이미 좋은 호흡을 맞추고 있었던 선생님들 사이에서 나는 내 역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선생님이었던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나이어린사람들에게 선생님보단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한 번 이야기를 꺼내니 두 번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게으르니쌤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내쉬는 깊은 한숨, 진달래쌤이 어떻게 선생님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는 각 잡고 하는 공식회의에서 나눈 이야기가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있다가 우연찮게 나누게 된 이야기들이었지만, 어찌 보면 이것이 곧 회의이기도 했다. 수업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데, 파트너가 합을 맞추는 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선생님들과 나눴던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3년째 초등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초보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배려를 받은 것이었지만, 사실 이런 대화들은 보통 순탄하게 나눠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들은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에 대해 묻고(문), 쪼았다(탁). 우연히 환경다큐멘터리 감독님인 황윤 감독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문탁 네트워크로 감독님을 초대해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상영한 뒤 사람들은 쟁쟁하게 토론을 이어갔다. 이를 본 황윤감독님은 깜짝 놀라 물었다. “저기… 다들 내일이면 또 얼굴 볼 사이들 아니세요…?” 문탁 네트워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묻고 쪼는 모습이 마치 서로를 씹고 뜯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맛보고 즐기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하지만 문탁 네트워크 사람들은 이래야만 그 상대가 다듬어지고, 자신도 다듬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묻고 쪼아 다듬어진 것이어야만 문탁 네트워크의 공통의 활동이 되고, 활동들이 모두의 공통 감각이자 넘치는 에너지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묻지도, 쪼지도 않았던 나는 홀로 독서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남들이 공부방에, 터전에 머무는 동안 말이다.


 

4. 참견대장 이동은

    백일수행에서 처음 마주치게 된 동은이는 난생 처음 만나보는 인간상이었다. 동은이와 나는 나이만 같았을 뿐이지 접점은 전혀 없었다. 이 친구는 정말로 규칙적인 생활습관 갖기를 어려워했다. 동은이는 언제나, 단 5분이라도 지각을 했다. 처음엔 일정한 생활습관을 갖지 못하는 동은이를 내가 닦달하기만 했다. 십분만 일찍 나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냐, 스스로에게 떳떳해야하지 않겠냐…. 그러다가 동은이는 언젠가부터 울기 시작했고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열심히 달랬다. 쉽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를 너무 책망마라….

    선생님들에게 질문 받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나는 동은이에게 평소에 묻지 않던 것을 물었다. “오늘은 뭘 하다가 20분이나 늦었어?” 한 편으로 나는 ‘굳이 이런 것까지 물어봐야하나’ 생각했지만, 질문을 받은 동은이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동은이는 울음을 그치고, 죄스러운 얼굴 짓기도 그만두고, 활기를 띄고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백일수행 이야기를, 그러니까 터전에서 희귀한 청년으로 생활하는 것에 대한 애로사항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친구가 갑자기 곰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동은이는 지각을 했다. 내 백일수행의 가장 큰 화두는 동은이였다. ‘자꾸만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이 친구를, 때론 너무 울고 때론 너무 당당한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사주상으로 동은이와 나의 기질은 상반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동은이가 어려워하는 것을 거뜬히 했다면, 동은이는 내가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산책을 같이 가면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동안 동은이는 쉼 없이 말을 한다. “내가 지난 주말에 재밌는 걸 봤는데…” “어머 이 꽃 좀 봐! 너무 예쁘다!!” 맛있거나 예쁜 것을 보고 지나치는 일이 없고, 사람들 대화하는 데 안 끼는 데가 없다.

    앞만 보고 걷느라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잘 모르고, 내 할 일 하느라 남들에게 크게 관여하지 않는 나와는 달랐다. 동네 고양이들 일광욕에까지 참견하느라 지각하기도 하는 동은이는 가히 참견계의 대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동은이를 따라 열심히 오지랖을 부려보기로 했다. 동은이가 존재감을 뽐내듯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나도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눈인사했다. 동은이가 할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꼭 그 사이에 껴있는 것처럼, 나도 밥 먹고 공부방에 가기 전에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어색해 아무 말이 안 나오더라도 삼십분 동안 그냥 앉아 있기도 했다.


   



 


5. 열심히 한다고 능사는 아니야

    동은이를 열심히 따라한 덕인지, 백일수행이 끝날 즈음 나는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하나를 진행하게 되었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가 누군가에게 아침 운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마침 나는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아침 운동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 화려한 언변이 아니어도, 세련된 포스터가 없어도 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꾸릴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문탁 네트워크는 ‘인문학’ 공동체이지만, 인문학 ‘공동체’이기도 하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부양이나 공부시간이 적다고 불안해했지만, 그것은 공부를 ‘나 혼자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도 문탁 네트워크가 독서실이나 학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그러니까 회의하듯 수다 떨듯 일상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일을 꾸려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일에 참견할 줄 알아야 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백일수행이 끝나갈 때 즈음이었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찾아갔던 해방촌에서 정착하지 않았던 건 사실 그곳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사람들은 늘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주변을 겉돌았다. 문탁 네트워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100일 수행을 시작했을 땐 해방촌에서 지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터전에선 공지에 올라간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나는 뭐든 열심히 했으니까 스스로를 능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주어지는 조건,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보고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비판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곳들을 나와 내 활동을 꾸리지는 못했다. 처음 백일수행을 하면서도, 초등서당을 하면서도 주어진 일만 깔끔하게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일수행이 끝 난지 한참 된 지금, 여전히 나는 능동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무언가에 한참 집중하다보면, 또다시 내 말은 먹고 남의 일엔 간섭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동은이가 아직 곰에서 사람이 되지 않은 것처럼, 나 역시 아직 백일수행이 끝나지 않은 듯하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5. 23. 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