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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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동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직도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렵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것저것’ 하며 ‘그럭저럭’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를 명확하게 설명해줄 직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는 일 없이 놀고만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백수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를 설명하려면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나름의 굵직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기름보일러의 충격

    나는 중학교를 4년 동안 다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1년 동안 대안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내가 다녔던 대안학교는 지리산 산내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아침마다 걷던 등굣길은 아파트에서 산자락으로 변했고, 수업은 골라서 들었기 때문에 수업이 없는 빈 시간엔 처마 밑에서 낮잠을 잘 수도 있었다. 이런 변화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 시절에 나는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한다는 생각에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일은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했던 점이다. 이 학교의 기숙사는 학생들이 모두 한 건물에 사는 것이 아니라 4명에서 8명 정도가 지낼 수 있는 집을 마을 곳곳에 구해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사는 방식이었다. 우리의 하루는 아침밥을 차리는 걸로 시작해 저녁밥을 치우는 것으로 끝났다. 밥을 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식재료는 무엇이 있는지, 함께 사는 누가 언제 귀가하는지, 누가 아프지는 않은지 살펴야 했다. 거기에다 학교 일도 신경 써야 했으니 쉽지 않은 생활이었다. 이런 모든 일을 챙기는 것이 귀찮고 익숙하지 않았지만, 세 남매와 떨어져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참고로 나는 네 남매 중 둘째다).



>>기름보일러는 이렇게 생겼다.



    11월의 어느 날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아이들이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고 등교해 단체로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하교 후 아이들과 함께 원인을 찾다가 기름보일러의 연료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 땐 수도를 틀면 언제나 따뜻한 물이 나왔기 때문에 나는 기름보일러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연료가 떨어진 자동차가 달릴 수 없듯이 보일러도 마찬가지라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그게 가능하냐는 듯 “정말?” 이라며 놀랐지만, 당연히 그렇다는 듯 행동하는 친구들을 보니 더 이상 놀란 것을 티낼 수도 없었고 이제야 알았다며 신기해 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그 공간에서 내가 얼마나 다른 존재의 사람이었는지……. 지리산에서 살고 있지만 지리산에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부끄러움은 지금까지도 내가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에 대한 느낌과 비슷하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것, 그러면서 다른 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나름대로 지리산 마을 속에서 잘 적응하고, 그 생활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것이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것, 어쩌면 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후로 내게 기름보일러는 내 무지의 상징이 되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아(?)

    이후 나는 다시 일반중학교에 편입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생각보다 친구들은 나와는 다르게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미 외고나 과고같이 구체적으로 진로를 결정한 친구들도 있었고, 정해진 것이 없어 일반 인문계에 올라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개 대학을 생각하며 불안해 했다. 하지만 나는 대학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는 이런 내게 마이스터고등학교를 소개시켜주셨다. 마이스터고등학교는 당시 이명박 정권이 교육정책으로 내놓은 산업형 고등학교다. 이전의 상고, 공고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입시교육을 하지 않고 산업현장위주의 수업을 한다는 점, 졸업하는 연도의 수능에 지원하지 못한다는 점 정도였다. 나는 ‘이참에 일찍 취업해 돈이나 벌면서 나중에 뭐 할지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큰 고민 없이 집 근처에 있던 마이스터고등학교인 수도공고에 진학했다.

    취업에 최종 목표를 두고 있는 학교였으니 2학년 중반부터 여러 기업에서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면접을 본 회사는 발전소 기업 중 한 곳이었다. 학교는 적극적으로 면접을 위한 많은 준비를 지원해줬다. 문을 여는 법과 인사를 하는 법, 걸어가 의자에 앉아서 시선을 맞추는 법과 면접관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 대답하는 법을 배우면서 몇 번이고 모의면접을 연습했다. 면접 대기실에는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가득했고 난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내가 연출했던 모의면접을 곱씹었다. 내 번호가 호명됐을 때는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면접실로 향하며 연습했던 대로만 하자고 다짐했지만, 두 명의 면접관과 단독으로 마주하게 된 나는 첫 질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면접을 준비하며 가장 신경 썼던 것은 당연히 1년 동안 다닌 대안학교 시절에 대한 질문이었다. 면접관의 첫 질문은 “대안학교에서 어땠어요?”였다. 예상대로였지만 준비한 대답이 무색해질 정도로 면접관에게 설명하는 내 지리산 시절의 일들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지금 삼성동 무역센터에 앉아 지리산 산내마을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늘어놓는 것이 면접관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걸까? 나에게 가장 의미있던 일들이 면접관들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울었던 이유는 이런 허탈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나는 왜 여기 앉아서 이걸 얘기하고 있는 걸까?’ 이후로 내가 본 대부분의 면접은 이런 느낌이었다.

    당연하게도 첫 면접의 결과는 실패였다.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나는 보는 면접마다 떨어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친구들은 한둘 취업확정이 됐지만 나는 여전히 면접 준비를 맴돌았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 취업준비를 했다. 면접비로 받은 돈(기업에선 면접을 보면 교통비 명목 하에 3~5만원씩 면접비를 지급한다)이 50만원이 된 즈음엔 졸업한 지 1년이 지난 후였고 그때서야 나는 취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기호의 단편소설 <낮은 곳에 임하라>에서는 취준생의 표정을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고 쓰고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자마자 어떤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취업에 성공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잔류로 남아 앉아있는 아이들의 표정…… 그 표정이 바로 그 시절의 내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조금만 더 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것에 지쳐갔다. 나의 모습은 면접결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납득시키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다.



밀양을 알게 되다

    2014년 봄,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여느 20대 초반들이 그러하듯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공부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슨 공부를 해야 할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입시공부? 아니면 다시 기술을 배워야 할까? 국가지원을 받는 직업교육이라도 받아야 할까? 여러 가지를 고민했지만 나는 동네에 있는 문탁네트워크의 인문학 프로그램 중 하나인 파지스쿨에 갔다. 파지스쿨에 대한 얘기는 후에 적겠지만 지금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지스쿨을 통해 밀양으로 간 일이다. (파지스쿨 이야기는 이후에 연재될 파지스쿨 편을 기대해 주세요!)

    밀양에 처음 간 것은, 그 해 가을 파지스쿨에서 문탁 네트워크의 사람들을 따라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밀양에 대해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밀양에 갔지만 하루이틀뿐이었으므로 관심이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밀양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16년 국회의원선거에 밀양대책위에서 일하는 이계삼 선생님이 녹색당 비례대표로 출마하면서 열린 북콘서트에서였다. 이계삼 선생님께서 해주신 밀양이야기를 듣고, 나는 농활을 가기 이전부터 내가 밀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밀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언젠가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졸업 후 간만의 연락이었기에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눴다. 친구의 직장이 한전 강원도지사였기에 나는 강원도는 시원하겠다며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러자 친구는 지금 강원도에 있는 게 아니라 밀양으로 출장을 왔다고 말했다. 친구가 가장 어리고 말단이라는 이유로 밀양으로 출장을 갔던 날, 그날은 정부가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기 위해 250명의 한전직원과 3000명 이상의 경찰병력을 투입해 강압적으로 밀양사람들을 끌어내린, 2014년 6월 11일 밀양행정대집행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친구는 나에게 “선배들은 고스톱이나 치고 있고 여기 뭐 하러 왔는지 모르겠어. 심심해서 전화했어.”라고 불평을 했고, 나는 “그러면 너도 같이 고스톱이나 치라”고 대답했다. 그 날이 어떤 날인지는 나도, 친구도 몰랐다.

    이런 사례는 하나가 더 있다. 내가 다녔던 수도공고의 재단법인은 한전이다. 이 때문인지 학교 수업에는 한전의 이사진들이 와서 강의를 하는 시간도 있었다. 하루는 그분께서 너무 고민이라며 말을 꺼냈다. “송전탑을 세워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너무 심하다.”라고 말이다. 나는 그 때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아이들의 대답을 들었다.


 “당연히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사람들의 반대가) 크게 문제가 되나?”

“이거 그냥 님비현상 아니에요?”


    한전 이사 앞이라 잘 보이고 싶어 그렇게 말한 것인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그 이야기가 바로 밀양의 이야기였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그 말을 듣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한전에 취업한 그 친구는 수도공고에 진학하는 아이들의 ‘워너비’이다. 그 친구는 정부가 의도했던 교육정책대로 어린 나이에 누구나 꿈꾸는 직장에 취직했고,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 친구에게 밀양 송전탑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항상 고민한다. 이 친구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단지 정부의 정책으로 만들어진 학교에 다니다가 취업한 것 아니냐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뒤늦게 이계삼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내 이전의 경험을 기억하게 된 나는 당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밀양에 내려가 일손을 도왔던 시간들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우리가 뉴스를 보면서 마음 아파할 수는 있어도, 뉴스 속의 당사자가 될 거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고졸취업의 신화가 된 친구와,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린 경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몰랐던’ 내가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외면이 ‘모르는 척’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기름보일러를 처음 알고 친구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밀양송전탑에 대해서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이 옛날에 생각 없이 한 행동이나 말의 의미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한 자책만 늘었지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문탁에서 나는 많은 일을 했다. 파지스쿨을 다녔고, 중등인문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고, ‘2030 도시부족’ 세미나팀과 뉴욕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많은 일들 속에서 나는 지각을 하거나, 해오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문제가 ‘꾸준하게’ 일어났다. 혼나기도 하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하며 이런 점을 고치기 위해 100일 동안 수행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혼난 것도 쉽게 잊고 다짐했던 것도 삐끗하기 다반사였다.

    그렇게 문탁에서 지내는 것이 어느새 5년이 되었다. 그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은 나는 요지부동하고 엄청난 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는 기름보일러나, 밀양의 일뿐만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굉장히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내가 문탁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 자리에서 계속하는 요지부동하고 관성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문탁이라는 공간이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하지 않도록,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말이다. 문탁 5년차, 나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무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을 위하여 그동안의 시간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젠 찌르는 대로 찔려서 두꺼워진 낯짝에 단단해진 맷집만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문탁에서라면 ‘그 다음’을 향하는 나의 헛발질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4. 30.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