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수단이 되는 삶, '왜?'라고 질문하기>

728x90








글 : 지원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5년 간 다니던 목공소를 그만두고, 현재 준 백수(반쯤은 프리랜서)가 되었다. 내 삶은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다. 나는 기껏 모아놓은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퇴사 직전 유럽여행에 모두 썼고, 부양해야할 가족은 없지만(어쩌다 보니 함께 살게 된 개 한 마리가 있긴 하다.) 내 가족도 나를 부양해줄 수 없다. 말인 즉, 매달 월세를 내야하고, 생활을 위한 벌이를 해야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간단하다. 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과 사지 멀쩡한 몸, 그리고 5년 간 익힌 목공 기술이다. 누군가는 내가 가진 것을 듣는다면 충분하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5년 치 목공 기술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나 우리는 모두 무언가 하나쯤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것이든 익힌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보다도, 남들이 모두 가진 것을 일단 가지길 원하는 것 같다. 대학 졸업장이 그렇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는, 이런 필요가 만족될 때에만, 충분한 것이 된다.


 

여행이라는 목적

    나는 다행히 고등학교 졸업장은 가졌지만, 불행히도 대학 졸업장은 가지지 못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음대를 가고자 했으나 내가 원한 대학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다. 물론 다시 도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대를 가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의무감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미 3년 남짓을 그렇게 준비 했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했다. 또다시 1년을 의무감으로 음악을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은 현재의 내 삶을 즐겁게 하고 풍요롭게 하던 음악을,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대학에 모두 떨어지고, 용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여러 곳에서 알바를 했다. 빵집, 편의점, 스크린 골프장 카운터, 공사 현장, 이사 현장 등. 돈을 벌고, 쓰는 경험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알바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고, 의외로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달에 90만원 남짓을 벌면서 순진하긴 했지만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알바는 지나쳐 가는 곳이다. 나보다 늦게 들어 온 내 또래의 알바생도, 2년 넘게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형 누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만나고, 먹고, 사는 이 일터를 다음 단계를 위해 지나쳐 가는 곳으로, 지나쳐 가야할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열심히 술을 마셨다.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재수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나 사이 어딘가에 차이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똑같은 술을 마시는데도, 목적이 있는 그들에게 술은 휴식이고 여가인 반면, 나에게는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나는 특정한 목적 없이 알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벌고 있다! 그러니 친구들은 나에게 물을 수밖에. ‘뭐하고 살 거냐?’라고. “필리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가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삶의 목적이 술인 것 보다는, 아무래도 여행이 더 멋지다. 그 때부터 내 삶의 목적은 필리핀 여행이 되었다. 친구들은 부럽다고, 멋지다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말의 힘인지 술의 힘인지, 나는 그 해 가을 정말 필리핀을 가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신기할 것은 없다. 겨울에 입대하게 된 나는 말만 떠벌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가야했으니까. 나름의 절박함이었다. 여행을 가기 두 달 전부터 일을 조금 늘리고, 술을 조금 줄였다.


 

무엇을 위해?

    돈이 없었던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홈스테이’를 선택했다. 홈스테이는 마닐라 소재 NGO를 통해 난개발로 사라져 가는 판자촌 동네에 머무르며 일도 돕고, 생활을 함께 하는 일종의 국제교류-체험 프로그램이었다. 보통은 하루 이틀의 짧은 체험으로 끝나는 홈스테이를 나는 개인적으로 가정에 부탁해 2주 동안 머물렀다. 내가 머물던 가정이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집이었던 덕에 나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을 알게 되었다. 또 음악을 하는 친구였던 그 집 아들 덕에 밤마다 동네 클럽에 가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삶의 모습에 놀랐다.

    그들의 삶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하지 않았다. 물론 서울이 누리는 소위 위생적인 삶이나, 편리한 교통 시스템, 교육, 의료 복지 혜택 등 ‘선진국의 삶’으로부터는 한참 떨어져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은 이랬다. 나는 처음 내가 머물 집에 갔던 며칠간 누가 이 집의 가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0여명 남짓의 사람들이 집을 들락거리는데, 모두가 이 집의 주인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먹을 것을 가져오고, 먹을 것을 내주고, 청소를 도와주고, 설거지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잘 나오지도 않는 TV를 본다. 내 것과 네 것,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하다. ‘엄마’와 두 종류의 야채를 사기 위해 집 근처로 장을 보러 가는데 2시간이 걸린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20분씩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골목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을 찬다.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말리지 않는다. 그걸 말리려던 나를 보고 한 아저씨가 말한다. 사람들은 평생 싸우기 때문에 그걸 배워야한다고. 주말에 가족을 따라간 교회는 경건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신성모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파티를 한다. 장난기 많은 얼굴의 괴짜 같은 젊은 신부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아닌, “현재 즐거움을 주는 기쁨의 신앙이 진짜”라고 말한다. 난 교회가 이런 식이라면, 한국에서도 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 친구들은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며 나에게 무엇을 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위해?”라고 묻지 않고, “왜?”라고 물었다. 이 두 질문은 언뜻 같은 말인 듯 보이지만, 다른 말이다. 전자는 내 행위를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가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는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그러나 후자는 더 포괄적이고, 현재적인 질문이다. 여행이나 돈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 앞에 서면, 그런 말들은 같은 질문의 반복을 불러올 뿐이고, 힘을 잃는다. 그들은 나에게 계속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미래에 행복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현재의 불안한 삶을 극복하기 위한 강박적인 믿음일 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하루

    군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이 명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내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렵지 않았지만,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군대는 상명하복의 문화, 이를 이용한 부조리와 인권침해가 보통의 일상에 산재해 있다. 이런 일상은 내 안에 일종의 분열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상의 흐름이 늘 문득 떠오르는 질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군 생활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하면 힘들어지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를 질문하지 않은 채 열심히 보내고, 매일 밤 열심히 보낸 하루하루를 PX에서 먹은 라면 봉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이 쓰레기 같은 일상을 며칠이나 더 보내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300일 남았다. 299일 남았다. 남은 군 생활이 줄어드는 것이 당시 나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미래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역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마자, 모른척하고 쓰레기통에 버리던 내 구체적인 삶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임이던 시절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한 선임의 모습을 내 모습에서 발견했다. 후임에게 빨래와 PX심부름을 시키고, 전투화 손질을 맡기고, 불침번을 대신 서게 하고, 나는 TV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었다. 후임들이 한쪽 구석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쟤는 걔보다 더하다” 함께 괴롭던 시절에는 같이 선임을 욕하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내가 욕을 먹고 있었다. 나는 ‘군대가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나 자신을 합리화해왔다. 그게 늘 내가 싫어했던 선임이 나에게 하던 말이었다.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한 나의 하루들은 후임들의 뒷담화가 되어, 내 앞에 돌아와 있었다. 전역만 하면, 정말 삶이 바뀌는 것일까? 문제는 군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 잡아본 적도 없는 책을 읽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병영 도서관에서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사론」이라는 책을 만났다. 왠지 모르게 불온해 보이는 빨간색 표지의 책이었다.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책장에 꼽혀있었는데, 유독 그 책은 꼽혀있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삶과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책제목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었다. 책에는 이런 말들이 있었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힘은 언제나 길들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힘에 영향 받고 상처받을 때, 판단이 흐려지고 우유부단해집니다. (…)나는 유능하고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교사들이 따라야 할 전술중 하나는 남을 길들이는 교사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내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던 책을 통해, 내 전체 삶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 믿으며 쓰레기통에 처박던 군 생활을 돌아보았다. 교육운동가인 프레이리가 교사들에게 쓰는 편지를 묶어놓은 이 책이 결국은 불합리한 권력을 비판하고 있듯이, 자꾸만 군대 밖과 분리하고자 했던 군대 안의 생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군대 밖에서의 삶도 결국은 군대 안에서의 삶과 달라질 수 없다. 군대는 특수한 집단이 아니다. 특수하다는 믿음이 합리화를 도와주는 것뿐이다. 언제까지 현재를 부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왜?’라고 질문하기 

    어떻게 하면 현재에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전역한 나는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를 만났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라는 질문을 가졌기에, 직장보다 인문학을, 그리고 공동체를 먼저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탁은 함께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글을 쓰고, 밥을 나눠먹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공동체다. 나는 이곳에 오자마자 남들에겐 유명하지만 나에겐 금시초문인 철학자들의 책을 읽었다. 연암 박지원, 지그문트 바우만,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미셸 푸코… 중, 고등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내가 이런 어려운 책들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고 한다면 과장처럼 느껴질까? 문탁의 공부는 여행에서의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군대에서의 어떤 책과의 만남과 비슷한 효과를 나에게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여행에서의 만남은 순간적인 것이었고, 군대에서의 만남은 무력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엔 지속적이고 강력한 힘이 있었다.

    여행에 가기 전, 나에게는 추상적인 의문이 있었다. 대학으로 시작되어, 직장, 결혼, 행복한 가정으로 이어지는 당연해 보이는 삶이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문. 친구들과 나의 삶에서 느껴지는 불안감과 불안감의 유예들. 그런 느낌을 질문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한 것은 여행에서 만난 다른 삶의 구체성이었다. 그들의 ‘무엇을 위해?’가 아닌, ‘왜?’라는 질문으로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의 추상적인 질문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말이 나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 것이다. 프레이리의 문장이 그렇다. 같은 문장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같은 효과를 가져 오지는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과, 텍스트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이 맞아 떨어질 때, 내가 내 삶에서 찾고 있던 추상적인 것을 그가 구체적인 언어로 던졌을 때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순간적이고 무력했던 것은, 내 일상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것보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습관과 일상이듯이 질문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 역시 습관과 일상이다. 대부분의 일상은 ‘왜?’라는 질문에 불리하게 구성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알바가 그렇고, 군대가 그렇다. 따라서 질문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만큼 질문과 맞닿은 일상을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탁에서의 공부는 ‘왜?’라는 질문을 부추긴다. 이를테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이제 막 전역한 나에게 특히 강렬하게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던져진 질문은 다른 많은 공부들, 활동들과 엮이며 구체화된다. 문탁에서 근처 보육원 친구들과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간 ‘악어떼’가 나에겐 그런 경험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악어떼’에서의 활동은 일상에서 권력이라곤 없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통해 어떻게 교실이 구성되고, 뜻하지 않은 관계가 만들어지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만큼 질문과 그에 맞는 실천을 위한 노력은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을 참고, 모르는 척 하고, 잊는 것이 또한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린 우리 삶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가? 그러니 스스로를 부정하며 ‘왜?’라고 질문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참고, 모르는 척하고, 잊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수단으로 전락하는 삶이 뭔가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쓸 이야기들은 나의 ‘왜?’들이다. 내가 지난 5년 반 동안 일하고 공부하면서 겪고, 느끼고, 마주친 것들이다. 물론, 답은 없다. 여전히 ‘왜?’이고, 어쩌면 끝까지 ‘왜?’일 것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3. 22. 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