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말을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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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은


    일반중학교에서 대안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날 바라보던 성택이의 표정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런저런 친구들과 두루 잘 어울렸는데, ‘일찐’이라 불렸던 성택이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일하게 3년 간 같은 반을 하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자랐던 사이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성택이는 나에게 대안학교에 가냐고 점잖게 물었다. 그러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이야 대안학교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만 당시에 대안학교는 문제아들이 가는 곳이란 인식이 팽배했다. ‘나도 안가는 대안학교를 네가…? 왜…?’ 내가 가는 대안학교가 어떤 곳인지 알았던 몇몇 선생님들도 의아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기주장이라곤 없어 보이는 평범한 모범생이 왜 대안학교에…?’   

 중학교의 첫 국어시간이었다. 우리는 삼형제에 관한 전래동화를 배웠다. 교과서에서는 첫째와 둘째 이야기만 소개해놓았으므로 셋째 이야기는 각자가 상상해서 써야했다. 모두가 대충 넘기는 활동이었지만 나는 성심성의껏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니 이런, 내가 쓴 내용과 전과에 적힌 내용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런 일은 꽤 일어났는데 글짓기 대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산문대회에서 도대회 1등상을 수상했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2등을 했던 친구와 이야기 전개가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나의 전형적인 모범생 생활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입시공부를 시작하며 시간을 초단위로 끊어 죽자 살자 공부를 했다. 덕분에 모의고사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대학교 진학해서는 늘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의 말에 두 눈을 반짝였다. 수석과 차석을 연달아했다. 한때는 내가 전형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연봉을 모두 갖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것들 중 내가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1. 모범생인 척 입을 꾹 다물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대안학교로 진학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대안학교로의 진학은 내 나름의 반항이었고, 당시 내가 학교에 반항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에 갖는 가장 큰 불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이익을 누리고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받는 편애의 최고 수혜자였으나 사실은 나는 그 편애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매 학년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더 꽉 잡기 마련이다. 3학년이 시작되던 때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는 머리가 짧았던 '일찐' 친구는 매일같이 지적을 받았다. 어느 날 학년주임은 그 친구의 머리를 막대기로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렸고, 이에 분개한 그 친구는 나를 가리키며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쟤가 나보다 머리가 긴데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혼났던 건 내가 아니라 그 친구였다. “이놈이 어디서 말버릇이야!!”

    나는 친구들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친구가 반에서 기피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현진이는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특수학급 친구였다. 그 때 거침없이 현진에게 다가갔던 친구가 있었다. 성택이었다. 성택이는 현진이를 가장 열심히 놀렸고, 가장 열심히 싸웠다. 덕분에 현진이가 반에 잘 적응하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우리 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까지 했다. 친구들 모두는 각기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온 몸으로 부딪히는 힘, 그것이 성택이가 가진 힘이었다. 

    편애를 받을 때 마다 나는 당당해지기는커녕 더 위축되었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의 편애 속에서 나는 ‘우수한 사람’이 되었고, 다른 친구들은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더 받는 관심과 사랑만큼 다른 친구들은 무시를 당했다.

    그렇다고 선생님들을 원망한 것은 아니었다. 잘살지 못하는 동네, 그래서 학구열이 높지 않은 동네에 있는 우리학교의 학생들은 공부에 목을 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점이 좋았지만 선생님들의 사정은 달랐다. 공부는 모든 일을 제치고 우선순위에 올랐다. 그러니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소외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학생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

    순둥이였던 가정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꾸 놀림을 당하자 교사가 된지 3학기 만에 스타일을 바꿔서 나타났다. 샤랄랄라 했던 공주스타일에서 과도한 뽕을 장착한 차도녀스타일로, 강아지처럼 웃는 얼굴에서 까칠하게 남을 째려보는 얼굴로 변했다. 그야말로 ‘변신’이었다. 열정적으로 수업을 해주던 수학 선생님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교실을 떠나는 일은 다반사였고, 복도에서 혼자 울고 있는 국어 선생님을 보는 것도 영 드문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한 편을 적으로 만들고 한 편에 속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선생님을 적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친구들보다 우위에 서지도 못하는 상태로 중학교 3년을 보냈다. 선생님은 왜 학생의 우열을 나누는지, 학생은 왜 선생님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범생의 이름표를 단 채로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일 뿐이었다.

 


2. 내 말이 갖고 싶다

    대안학교에 대한 정보를 흘리듯 말해준 건 부모님이었지만, 그 얘기를 듣고 미친 듯이 찾아본 건 나였다. 그렇게 꿈에 부풀었던 날들이 또 있었을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 것 같았다. 학교에 대해 찾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다 찾았다. 찾은 정보를 바탕으로 학교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새로운 교육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학교, 학생에게 마음을 다하는 선생, 활동과 공부를 자치적으로 꾸려나가는 학생! 그러나 내가 입학한 학교는 내가 생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생들은 겉으로는 모두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같은 중학과정을 밟은 친구들 사이를 타중학교에서 진학한 친구들이 겉돌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선생님의 단호한 반응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건 어쩔 수가 없지 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야.”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툭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이후로도 ‘그건 원래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 청문회에서 메인패널로 발표중



   사실 대안학교라고 더 특별할 게 없었다.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과정이 이미 짜져있었으므로 사실은 관례를 행할 뿐이었다. 배우는 내용은 일반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색다른 수업 방식에 기존 재학생들은 이미 질린 상태였다. 그러니 수업 분위기마저도 일반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불편했던 것은 학교가 스스로에 대한 환상을 부풀린다는 것이었다. 당시 학교가 공중파의 다큐멘터리에 나오게 되었는데, 내가 속해 있던 반이 촬영의 중심이 되었다. 피디들은 시간이 갈수록 원하는 장면, 원하는 인터뷰 내용을 노골적으로 찍으려 했다. 그렇게 방송에 나간 학교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누군가의 반항마저도 좋은 소재가 되었다. 반항아를 사랑하는 교사, 같이 보듬을 줄 아는 학교. 이런 학교야말로 내가 입학하기 전에 꿈꾸던 학교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내가 찾고 싶었던 학교의 모습은 이곳에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아주 크게 감정이 동했던 것 같다. 학교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다. 스스로도 말할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동아리, 학생회, 학년잡지 등 온갖 활동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만 늘 뿐이었다.

    우연찮게 들어간 총학생회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달랐던 것은 총학생회가 비효율적이지만 열정이 넘치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모두들 내 이야기를 이해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나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이때 애를 쓴 경험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어설프게나마 내 언어로 학교의 문제를 말 할 수 있었다. 학교를 상대로 연 공청회에서 패널로 나섰던 것이다. 졸업식에 온 총학생회 선배는 그 소식을 들었다며 마침내 내 고민을 말로 정리해낸 것을 축하해줬다. “니가 그렇게 난리 부르스를 치더니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하긴 하는구나.” 학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곧 나에게는 학교 졸업과 같은 일이었다.


 

3. 어딘가에 유토피아가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내 말을 함께 찾아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대안고등학교는 내가 찾고 있던 이상과 거리가 멀었지만 어딘가에는 내 이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진보적인 교수진으로 유명한 사회과학부에만 호기롭게 원서를 넣었고 운이 좋게도 면접전형에 붙었다. “최근에 무슨 책을 인상 깊게 읽었죠?” “『상호부조론』이요. 대학에서 이런 걸 배울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신이 나고 기대돼요!”

    대학교라면 말을 찾는데 적합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문제를 ‘구조적’으로 볼 수 있어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이다. 큰 그림을 그린다면 문제를 언어로 드러내기도 쉬울 것 같았다. 처음엔 생각대로 대학공부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이상하다 여겼던 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학년주임을 이해하지 못해 진땀 뺄 일도, 내가 나온 고등학교가 앞뒤가 다르다며 감정이 상할 일도 없었다. ‘교사가 학생을 공부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였구나.’ ‘입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학교가 대안적인 교육을 하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이구나.’ 고등학교에서 터부시되던 것들도 대학에선 수업의 주제가 되었다. 20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게이가 무엇인지 왜 욕으로 쓰이는지, 유리천장이 무엇인지, 핵발전소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 역시 내가 상상했던 곳은 아니었다. 학교 수업에서 『상호부조론』 같은 책은 접할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배우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개론교재 저자의 생각을 외우거나, 교수님의 생각을 외우거나.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교수님과 면담을 할 때 이런 이야기를 꺼냈더니 교수님이 말했다. “예전엔 그런 공부를 다 학생들끼리 했었는데…” 사실이었다. 학구열을 불태우는 친구는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교수님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수업에 힘을 쏟는 교수님은 아주 손에 꼽았다.




└ 10대후반과 20대초반 내내 우리는 싸웠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내 활동이 활발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20살이 막 되었던 2013년은 이명박을 이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해이다. 내 또래는 암울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우리의 화두는 늘 ‘무기력’이었다. 진보적 학풍을 가진 우리 대학도 이를 피해가진 못했다. 열성적으로 과격시위를 주장하던 동아리 친구는 어느 날부터 냉소를 띄더니 이런 말을 툭 던지기도 했다. “어차피 너네가 이래봤자 아무 것도 안 돼.” 열정과 냉정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누가 어떤 태도로 돌아서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나마 학교에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물론 그 사람들과 활동을 해보기 전까지 말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문제로 여기고 같은 목표를 향해갔지만 뭔가 달랐다. “이런 경우엔 시의적절하게 사건이 하나 터져주는 게 좋죠.” “필요할 때 이 친구를 움직이면 됩니다. 체스말과 같이요.” 하루는 수업을 듣던 중 친구에게 이런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SNS에 네 욕 올라온 것 같던데?” 알고 보니 내가 친구들과 송전탑 싸움 지지를 위해 밀양에 가려고 계획했던 것을 아니꼽게 본 것이었다. 자신들의 조직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교 생활이나 공부를 재밌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신히 버틴다는 이야기를 왕왕 들을 수 있었고, 학교를 휴학하고 싶다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는 그보다 더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티는 친구들도 많았건만 나는 2학년 2학기 돌연 학교를 휴학을 해버렸다. 교수에게 배우는 공부도, 학교 사람들과 함께하는 활동도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나를 발견했다. 새로운 말을 찾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말도 다 뭉개질 것만 같았다.


 

4. 내 말을 찾아 삼만리

    휴학을 하고 친구와 함께 찾아간 곳은 남산 아래에 있는 달동네, 해방촌이었다. 그곳엔 함께 모여서 마을 커뮤니티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방촌엔 멋진 사람들이 많았다. 돈·학벌·권위의 특권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았고, 특출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방은 좁았고 살림살이는 멀끔하지 못했다. 옷차림은 간소했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다들 조금씩 빈티가 났다. 나는 그런 빈티가 좋았다. 그것은 새 것을 늘 소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풍족함을 찾지 않고 부족할 줄 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부족하므로 함께 살며 나누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 윤지와 함께했던 동거살이, 이젠 두 번 다시 이때처럼 못 살 것 같다.



    동거인 윤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도 나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한겨울에 보일러 틀지 않고 덜덜 떨며 아침 맞기, 한 달에 한 번 벌벌 떨며 치킨 사먹기, 과자 한 봉지 안주삼아 막걸리 먹기. 아마도 그 나이에 떨 수 있는 궁상이란 궁상은 다 떨었던 것 같다. 우리는 함께 조각하듯이 대화를 해나갔다. ‘뭘 하든 쓰레기를 많이 만들지 않겠어’와 같은 행동강령부터 ‘무엇을 가치관으로 삼을 것인가’와 같은 삶의 방향까지.

    대학교에서 교내 활동을 하는 것보다 마을에서 사람들을 만난 시간이 더 즐거웠다. 대학교에서 받는 수업보다 윤지와 나눴던 대화가 내 언어를 훨씬 풍요롭게 했다. 대학교 밖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삶의 구체적인 언어를 찾을 수 있다면 굳이 감당하기 버거운 돈을 내면서 대학을 다닐 필요가 없었다. 나는 대학생이라는 사회적 안전망 없이도,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증표 없이도 잘 살고 싶었다. 결국 대학을 자퇴했다.

    그리고 문탁 네트워크를 찾아갔다. 다른 곳을 찾아갔을 때와는 다르게 그곳에 가면 내 눈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미 몇 년간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했지만, 찾아간 동기가 이전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새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갈망하기 보단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떠돌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4. 11. 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