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인생이 한 번뿐이라면 조금 더! 다양하게 : ‘욜로YOLO’ 라는 명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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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원

   5년간 일했던 목공소를 그만둔 것이 8개월이 넘었다. 실업급여도 끊겼다. 나는 반쯤은 공부하는 백수지만, 반쯤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아무래도 스스로 하는 일이라 돈 관리나 시간 관리에서 어려움이 많지만, 일하는 시간에 비해 벌이는 전보다 좋다. 그런데 왠지 여유가 생겼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시간도, 벌이도 분명 더 나아졌는데 통장 잔고는 여전히 쓸쓸하다. 왤까? 내가 비싼 평양냉면을 너무 많이 먹었나? 나는 내가 벌고 쓴 돈이 얼마인지,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계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헉. 이럴 수가. 누구는 월 50만원을 적금을 붓는다는데, 나는 월 70을 노는데 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소비생활을 두고 ‘욜로’라 부른다. 욜로는 ‘인생은 한 번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요즘은 이와 비슷한 용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소확행’, ‘워라밸’, ‘케렌시아’….


    





인생은 한 번뿐

   우선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그 나름의 배경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요즘 청년들은 취업도, 정년도, 내 집 마련도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일상을 산다. 10년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아빠가 신봉한 <아웃라이어outlier>의 1만 시간의 법칙을 멋지다고 믿었다. 누구든 1만 시간을 한 가지 일에 투자하면 장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냥 ‘라이어liar’다. 1만 시간을 한 가지 일에 투자할 시간이 없을뿐더러, 실상 사회는 장인이 아닌 졸업장,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를 원한다. 그마저도 통로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청년들은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성공을 교환하는 대신, 불확실한 미래와 확실한 현재의 쾌락을 교환한다.

   그런데 이해할만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욜로, 소확행과 같은 말들이 ‘트랜드’라거나, ‘라이프 스타일’로 불리는 것이 불편하다. 내 친구 범수는 자칭 욜로다. 범수는 아주 열심히 일한다.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온갖 종류의 일을 해왔다. 퇴근 후엔 소소하게 술자리 갖는 것을 좋아하고, 주말이나 휴일엔 여행 동호회 사람들과 어울리며 짧은 국내여행을 즐긴다. 그러나 내가 불편한 것은 그런 범수의 삶이 아니다. 힘들게 일한 돈으로 여가를 즐기는 것을 가지고 내가 불편해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내가 불편한 것은 범수가 스스로를 욜로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소비와 개인성이다. 욜로는 취업, 정년, 내 집 마련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인데, 나는 이러한 현실의 원인이 사실상 소비와 개인성을 강요해온 자본주의사회라고 생각한다.

   알바생만 늘고 정규직은 눈에 꼽는 이유,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고 치킨 집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평생을 일해도 내 집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내 생각에 잘못된 전제와 그에 근거한 사회적, 개인적 실천 때문이다. 취업포기를 개인의 능력 탓으로 환원하고, 정년 보장이 힘든 이유를 경제 불황으로 설득하고, 사실상 부동산 투기로 인해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을 소비의 자유라는 명목 하에 규제하지 못한 탓이다. 한편으로 욜로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변화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런 현실을 만든 원인―즉 자본주의가 조장해온 소비 중심적 삶과 개인주의적 선택―을 다시 목표로 삼음으로써 이들은 현실에 순응한다. 이런 삶을 조금만 더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욜로라는 개념이, 이 개념이 지칭하는 행복이, 이런 현실적 상황을 감추고 포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내놓고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는 나도 비판코자하는 바로 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데 너도 똑같잖아?

   내가 자본주의를 ‘나쁜 것’처럼 말할 때, 범수 같은 친구들은 나를 ‘이상주의자’ 취급한다. 그건 한편으로 옳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면서 그 조건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도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고, 졸리면 월세를 내는 집으로 가고, 날이 추워지면 옷을 사러 백화점으로 가는 세상에 산다. 나 또한 별 수 없이 소비하기 위해 퇴사 이후에도 일을 한다. “결국 너도 똑같잖아?”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할 말을 잃는 이유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가 소비를 한다는 사실이 곧 나의 모든 측면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규범의 절대화를 우리는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근본주의는 어느 누구도,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만든다. 특히나 자본주의처럼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의 사회적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절대화하면, 우리에겐 아무런 선택지도 남지 않는다. 물론 나는 “결국 너도 똑같잖아?”라는 말이, 이처럼 근본주의적인 ‘금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또한 소비와 이를 위한 노동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밝혔듯, 그럴 수도 없다.

   “결국 너도 똑같잖아?”라는 질문, 혹은 그런 질문 앞에서 스스로의 자격을 돌아보는 소극적인 태도는 오히려 통일성과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이 아닐까싶다. 나 자신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왔던 것, 앞으로 살고자 계획했던 것을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방어기제 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똑같지 않다. 같은 돈을 쓴다 하더라도 저마다 돈을 쓰는 기준이 다르고, 모두들 일을 하긴 하지만 저마다 일에 대해 갖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을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런데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소확행이나 욜로라는 말로 불려지면, 그리고 이것이 트랜드라 불리기 시작하면, 소비와 소비를 위한 노동을 전제해놓은 상태에서 소비의 방식만이 문제가 된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고 외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스스로 이렇게 질문하도록 한다. “나는 욜로인가? 욜로가 아닌가?”

   보통 이런 질문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던져진다. 예컨대 A라는 자동차 회사가 광고에서 인간의 범주를 ‘A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눌 때, 이는 명백히 이분법적으로 A를 가진 자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반대 항을 위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1%와 99%’로 나눌 때, 이는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을 전면에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욜로라는 단어에는 양쪽의 의미가 공존하는 듯하다. 한편에선 욜로를 트랜드라며 추켜세우고, 다른 한편에선 사회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추켜세우는 쪽에선 신용카드를 만들어 팔고, 문제시 하는 사람들은 청년들의 소비습관을 지적하거나, 국가의 복지정책을 탓한다. 그러나 이 기준을 넘어 진지하게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려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혹은, 당사자들도 이 쏟아지는 광고와 현상분석의 물량공세에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기가 힘들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돈을 쓰는 쪽, 아니면 돈을 아끼는 쪽이다. 그러나 내가 자본주의를 문제 삼는다고 해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듯, 우리는 범주화하지 않으면서 더 구체적으로 질문할 필요가 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모든 다양성을 집어삼키는 이분법이다.


 


평양냉면과 퇴사

   욜로라는 명명 아래, 삶의 다양한 문제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소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완전한 소비자 주체로, 혹은 소비자 인구로만 파악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비 외적으로 드러나는 개별 욕망과 다양한 조건들은 여기서 하등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소비를 위한 전제가 되는 일―즉 노동은 삶과 완전히 분리된다. 노동은 철저히 소비를 위한 준비행위로서의 노동이다. 그러나 여기에 모순이 있다. 불확실한 미래의 성공 대신 확실한 현재의 쾌락을 교환하는 욜로도, 결국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동과 소비 사이의 회전 속도가 빨라졌을 뿐, 원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즉각적인 쾌락은 벗어나고자 했던 현재의 고통에 더욱더 결합된다. 내가 사랑하는 맛있는 평양냉면도 결국 직전의 짧은 희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욜로를 통해 사회를 바라볼 때, 즉 돈을 쓰거나 아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파악할 때, 은폐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때 나의 퇴사와 평양냉면 사랑은 일관된 실천으로 읽힌다. 최소한의 고통과 즉각적인 행복의 추구로 말이다.

   그러나 나의 퇴사는 내가 하는 일이 자꾸만 돈 버는 일로 축소되고, 매몰된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5년의 경험은 내가 뜻하는 바와 상관없이 내 일상적 조건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게 견적을 내는 방식, 일이 진행되는 방식과 같은 것들 말이다. 더군다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무시한 채 나 좋을 대로 일 하는 방식을 바꿀 수도 없었고, 나 또한 관성으로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이런 반복은 내가 만드는 가구를 돈으로 보이게 하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하는 가구가 더 좋은 가구라고 생각하게 되는 프레임을 강화했다. 그리고 돈을 버는 일이 중요해지는 만큼, 내가 하는 일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퇴사는 이렇게 만들어져버린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시도의 성패와 상관없이 분명한 것은 내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것과 내가 퇴사를 한 이유가 하나의 동일한 욕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저 불확실한 미래와 확실한 현재의 쾌락을 교환하기 위해 퇴사한 것이 아니다. 이 당연해 보이는 과정으로부터 탈출해,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주어진 조건을 파악하고 조건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 나는 이것이 욜로적 소비로 설명될 수 없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욜로가 전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소비할 자유로 파악된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과 같은 자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선택의 폭은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이 다양함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자마자, 우리는 소비를 곧 자유라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부딪히는 저항은 오로지 돈의 부족함 뿐이다. 욕망과 저항의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에 훼방을 놓는 보다 다양한 욕망과 저항들이 있고, 다양한 저항들과의 결합 속에서만 우리의 욕망은 선택을 내린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다양한 한계들―돈을 포함해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찾아내고, 인정하며,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난 친구들의 평가와 달리, 스스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상상력을 좀 가진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조금 더! 다양하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나의 유흥비 70만원까지 얼렁뚱땅 합리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돈의 철학>의 저자 게오르그 짐멜이 이야기했듯, 돈을 쉽게 쓰는 사람일수록 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는 돈을 매개로 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존도를 말하는 것이며, 다른 의미에선 돈의 사용이 곧 돈으로 맺어진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원시사회에서는 현재와 같은 돈을 통한 교환이 매우 적었거나 없었고, 그만큼 스스로 해결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대인인 우리는 스스로 해결해야할 것은 매우 적고, 돈을 벌면 그뿐이다. 돈을 통해 더 쉽게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회에서 순수하게 목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많은 직업들이 내 삶에 필요한 순수한 기능들을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돈이라는 매개수단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확대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소비에 의해 정향되는 노동의 목표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분명 이 의존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끌어내야한다. 관계의 확장이 늘 유쾌한 결말만을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 매개 수단의 절대화가 다른 많은 가치들의 중요성을 잠식시킨다. 일 자체가 가지는 행복의 가능성,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많은 부분은 중요한 가치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이때, 독립성의 확보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비의 조절을 부분적으로나마 포함할 것이다. ‘잘’ 쓰는 것은 ‘잘’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이 요소들은 실제로는 결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덧붙여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인생이 두 번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인생은 언제나 한번 뿐이었다! 그런데 왜 한번 뿐인 인생을 개인적 소비와 소비를 위한 노동으로 일축해야하는가. 진짜 인생이 한번 뿐이라면, 더 상상하고, 더 자유로워야 하는 것 아닐까? You Only Live Once는 소비로 축소되지 않는, 조금 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점유해야할 문장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6. 16. 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