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여전히, 쪽파가 철탑을 이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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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원

   2015년 4월 17일에 나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집회 및 시위 법, 도로교통법 위반. 그날은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거센 시위였다. 정부의 은폐 의혹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거리로 나왔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시위 행렬의 뒤쪽에 있던 나는, 함께 간 친구와 함께 앞으로 조금씩 나갔다. 앞으로 갈수록 시위는 거칠었다. 아니 내가 기억하기에, 시위가 거칠었다기보다는 경찰의 진압이 거칠었다. 간혹 경찰버스 위에 올라가 욕을 해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장한 경찰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욕이 전부였다. 물대포를 쏘고, 방패로 밀고. 눈 깜짝할 새에 나는 방패 바로 앞에 서 옆 사람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경찰의 무전기 소리를 들었다. 방패 사이로 물총 같은 것이 나와 내 눈에 액체를 쐈고, 화끈거리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비비려 잠깐 옆 사람과 팔짱을 푼 사이 나는 방패사이로 끌려들어갔다. 경찰들도 화가 나있었다. 그들은 방패 안쪽으로 넘어진 나를 군화발로 걷어차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들은 나를 경찰 버스에 태웠고, 곧이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 더 탔다. 버스에 올라온 사람들은 유경험자처럼 보였다. 잔뜩 긴장한 나에게 그들은 괜찮다며 경찰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조언도 해주었고, 경찰에게 욕도 하고 경찰과 날선 농담도 주고받았다. 나는 서초경찰서로 향하는 경찰 버스에 앉아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덜컥 눈물이 났다. 밀양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밀양 사람들도 아마 이렇게 질문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라고.


    




 

밀양을 만나다

   밀양을 처음 만나 게 된 것은 2012년 겨울이다. 당시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문탁 사람들을 따라 삼성역에 나가 765kv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팸플릿을 돌렸다. 당시 삼성역엔 한전 본사가 있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니 어련히 좋은 일을 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다들 천막에 들어가기에, 나도 따라 들어가서 따뜻한 믹스커피를 한 잔 얻어 자리를 잡았다. 난 밀양에서 올라오신 할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내가 무엇을 하러 온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한전의 행패, 막무가내 식의 국책사업, 돈으로 찢어진 마을공동체….

   커피를 한잔 하고 밖에 나오니 점심시간이었다. 양복을 입은 근처의 회사원들이 전부 거리로 나왔다. 아마 한전 직원들도 우리 앞을 지나갔을 것이다. 다들 비슷한 옷을 입었으니 누가 한전 직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에게나 팸플릿을 나눠주었다. 대부분 거절했고, 간혹 받아갔다. 그러다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호통을 쳤다. “대낮에 젊은 사람이 할 일이 없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공부를 해서 세상을 바꿔야지, 전단지 돌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고. 난 좀 당황했지만 웃어넘겼다. 웬 아저씨는 나에게 “넌 전기 안 쓰냐?”는 식으로 묻기도 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난 세상을 바꾸러 나온 것도 아니고, 전기 안 써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문탁 사람들이 같이 가자기에 따라간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날 선 비난들 앞에서 난 질문이 생겼다. 멀쩡히 살던 땅에 송전탑이 들어온다기에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이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난 이 추운 겨울에 멀리 서울까지 올라와 천막을 쳐 놓고 이야길 하는데도 무시 받는 할머니들에 대한 모종의 연민을 느꼈고,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다음 해의 밀양 농활에서 나는 동화전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이분들은 농활을 온 우리를 ‘연대자분들’이라고 불렀다. “연대자들이 와줘서 고맙고 힘이 된다”는 말은 어쩐지 어색했다. 평상시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난 엄밀히 말하자면 연대자의 자세 같은 것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었다. 송전탑이 들어설 것이라는 밀양에 대한 궁금증 반, 돕고 싶다는 마음 반이었다. 막상 가서 보니, 밀양은 여느 시골과 다를 것 없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풍경도 사람들도 그랬다. 저녁에 모여앉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중고등학교 때의 농활과 큰 차이를 느끼지도 못했다.







나의 문제와 너의 문제의 경계

   동화전 마을의 잘생긴 대책위원장님,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것처럼 ‘쎄’ 보이는 박은숙샘, 까칠한 츤데레 귀영엄니, 뭐든 적당히 하자는 하사장님. 당시 이들이 이 마을의 송전탑 반대운동 주역들이었다. 귀영엄니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말술이었다. 소주 한두 병은 거뜬히 마셨다. 술을 좋아하는 만큼 이야기도 좋아했다. 귀영엄니는 술은 잘 안 드셨지만, 술 취한 사람보다 말을 더 재미있게 하셨다. 나는 공기가 좋아 술을 많이 마셨고 취했다. 애처럼 밀양에 대해, 송전탑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박은숙샘은 나더러 아무것도 모르고 왔냐며 핀잔을 주었고, 위원장님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며, 문탁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도 있다며.

   대화는 자연스럽게 송전탑 이야기로 이어졌다. 765kv 송전탑이 뿜어대는 전자파는 형광등의 불을 켜지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없다. 비가 오는 날엔 긴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와 물이 서로 반응하는 것이다. 밀양은 송전탑 공부를 시작하며 핵발전소 문제를 함께 공부했다. 두 문제는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밀양 송전탑은 신고리 3, 4호기가 완성되었을 때의 송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016년 3호기가 완공되어 운영 중이고, 4호기는 완공되었지만 어쩐 이유에선지 운영이 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파괴라는 문제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동화전 마을에서 지내 온 손수현 아저씨는 송전탑 운동 이후 마을의 친구들, 가족 같이 지내던 형님 누님들, 동생들, 동네 어른들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삶의 터전에 대한 문제를 한전은 돈 문제로 단순화 시켰고,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은 서로를 갈라놓았다.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붓듯, 한전은 송전탑 찬성으로 돌아선 분들을 대형 버스에 태워 관광을 보내주었다. 반대자들을 방치하고 회유했다. 한전의 전략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유치하지만, 감정의 힘은 아주 강하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밀양은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 삶의 문제이지,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사장님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송전탑을 막으려 산 중턱에 올라간 할매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땅에 밭을 일궈 쪽파를 삼는 것이었다고. 송전탑을 짓기 위해 쌓아 놓았던 철물들과 포크레인은 비와 바람에 녹슬고 있었지만, 밟히고 파헤쳐진 쪽파는 더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고. 쪽파 밭 옆에는 밀양 사람들과 연대자들이 함께 흙벽돌을 하나씩 이고지고 산을 올라 만든 황토방이 있었다. 밀양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황토방 한 켠에 종이를 붙이고 글자를 적었다. ‘쪽파가 철탑을 이길 겁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쪽파다.


    




 

내가 우리여야 할 이유

   2013년 5월 20일 오전 7시, 중단되었던 송전탑 건설 공사가 갑자기 재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날은 처음으로 공사현장에 경찰이 배치된 날이기도 하다. 한국전력 직원들과 경찰들이 마을 주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상자도 발생했다. 난 하던 일을 멈추고, 기차표를 끊고, 서울역을 향했다. 대책위원장님이 다급해 보이는 문자를 보냈다. 난 가슴이 두근거리고 화가 많이 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지키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이렇게까지 짓밟혀야 하는가? 밀양역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탔고, 사람이 가장 없다는 84번 송전탑이 들어서는 산 아래편에서 위원장님을 만났다. 산길은 경찰이 막고 있으니, 길이 없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훈련을 나가면 벌였던 작전이 생각났다. 그래선 안 되고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북한군과 전쟁이나 나야 할 법한 행동을 대한민국 경찰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난 국민인데, 경찰은 적인가? 경찰이 국가라면, 내가 적인가?

   우린 꼬불꼬불 길 없는 산을 돌아서 반듯하게 깎아놓은 모래밭에 도착했다. 몇 번이나 경찰을 마주칠 뻔 했지만 산을 잘 아는 위원장님이 여러 번 길을 틀었다. 잠시 쉬는 시간이었는지 모래 위에 포크레인 한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리는 포크레인으로 달려가 삽 위에 앉고, 운전석에, 궤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공사만 막자. 하루만 막아보자. 그게 우리 목표였다. 그러나 금새 한전 직원들과 인부들, 경찰들이 몰려왔다. 처음엔 한전 직원들이, 다음엔 경찰들이 우리를 회유하려했다. 이렇게 몸으로 기계를 막지 말고, 대화로 풀자는 것이다. 이렇게 기계를 들이지 말고, 대화로 풀자던 것이 바로 밀양의 요구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할매들이 매달려 소리치며 말했을 것이다. 말로 하자고. 어린 학생들이 서울에서 왔느냐고, 사람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공부하라고, 월요일인데 학교 빠졌느냐고, 공무집행방해죄는 빨간 줄이 긁힌단다. 제 발로 기어나갈 생각이 없다고 하자, 대화로 풀자던 그들은 우리를 강제로 끌어냈다.

   나도 쪽파다. 밀양 사람들이 약자로 보였던 만큼, 나는 내가 약자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다. 밀양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내 집 앞에 송전탑이 들어서지 않았다 뿐이지, 월세가 올라가면 방을 빼야하는 나의 상황은 이것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 싸움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이 당장 나의 권리를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국가와 자본 앞에 우리는 공통적으로 약자이고, 추방자다. 청년들은 국가로부터, 자본으로부터 매순간 추방당한다. 이룰 수 없는 것을 목표로 삼기를 요구받고, 개미지옥에서 살아남은 예외적 케이스를 신화화한다. 국가와 자본은 우리를 밀어냄으로써, 우리를 더 안으로 향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삶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아서, 멀리 있어서, 우리와 다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멀리 있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우리 청년들은 우리끼리도 멀리 있다. 그런 우리를 ‘연대자분’이라고 부르던 밀양 사람들은 이제 나를 ‘지원씨’, ‘아들’이라 부른다.


    




 

법 앞에서

   세월호 1주기 때 연행되었던 것에 대한 재판은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까지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생각했던 바와 달리, 일본의 유명 게임 <역전재판>이라거나, 넷플릭스 드라마 <슈트>같은 긴장감은 없었다. 판사가 종이를 읽으면 검사가 영혼 없이 구형을 하고, 변호사가 짧은 변론을 한다. 벌금 200만원을 구형하는 검사의 눈빛엔 영혼이 없다. 200만원이라니. 나에겐 아주 큰돈인데.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가 생각났다. 시골에서 온 한 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길 원하지만 덩치가 큰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고 기다리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전 생애동안의 시도는 계속해서 문지기의 기다리라는 말에 의해 실패한다. 후에 문지기는 죽어가는 시골사람에게 이 입구는 단지 그 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을 전하고 문을 닫는다.

   세월호 사건 이후 금새 밀양은 엄마들과 연대했다. 이는 한편으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의 아픔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닿았다. 왜 할매들이 엄마들과 그렇게 빠르게 연대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밀양에 느낀 것을 밀양은 엄마들에게 느꼈다. 엄마들은 밀양의 할매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더 빨리 오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할매들이 엄마들을 안아주는 모습은, 그렇게 안아주며 함께 흘리는 눈물은, 힐링이 무차별적으로 소비되는 사회에서 무엇이 진짜 치유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시골사람은 혼자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놓인 것은 법으로 통하는 문뿐이었다. 시골사람이 친구와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 문지기와 싸워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은, 시골사람에게 돌아서는 순간 법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법으로 통하는 문을 무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에게 농담처럼 벌금이 나오면 함께 내주겠다던, 후원주점이라도 만들겠다던 문탁과 밀양의 친구들 덕에 판결이 두렵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막으려던 송전탑은 들어섰다. 강정엔 해군기지가 들어왔고, 성주의 사드는 남북관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지속적인 주민들의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 원자력 발전소는 한차례의 공론화를 거치면서 찬성 파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사드와 원전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선거 시기 부산 유세 때 할매들은 수많은 인파를 뚫고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피켓을 들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낙담하는 마음은 컸다. 나도 그랬다. 그 허탈감과 끝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지치는 마음에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그래도 나는 계절이 바뀌면 밀양에 간다. 나를 모르던 그들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먼저 싸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이기 때문에, 쪽파가 철탑을 이길 것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7. 21. 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