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청년 모임, 이제 됐다 : 해봄, 석운동, 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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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원 


   요즘 청년들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취업, 결혼, 출산, 주거 등 현재의 중년들이 청년기에 당연하게 이루어 냈던 것들을 지금의 청년들은 쉽게 이루지 못한다. 스펙 쌓기 레이스는 고되고, 점점 길어진다. 백수도 많고, 나이가 찬 알바도 많다. 아예 정상적인 루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정상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취업준비를 위해 인생을, 이 한 몸 바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깨닫는다. 그래서인지 청년은 자주, 걱정 섞인 목소리로 호명된다.

   그런데 나에게 ‘청년’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어색하다. 입에 붙지 않는다. 내 입에 붙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올 때도 이상하다. 촌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사회적으로 너무 자주 호명되어서일까, ‘뭔가를 해야 하는 사람’,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람’과 같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부담스럽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난 ‘청년모임’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해왔다. 왤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래 친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호명에 걸맞게 다들 열심히 산다. 학교로, 직장으로 사라진다. 그러곤 거기에 갇힌다. 나처럼 학교도 안가고, 일도 꽤 자유로운 사람은 심심하다. 그래서 ‘모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모임을 하려고하니, ‘청년’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2-30대를 부를만한 말이 딱히 없었고, 그런 말을 잘 쓰면 호명에 부응한 대가로(?)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약간의 보조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술로 지은 집

   2013년에 나는 부모님 집을 나왔다. 나에겐 로망이 있었다. 친구들을 초대해 밤새 술 마시고, 아무 데나 널부러져 잠들고,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기타치며 노래도 부르는. 그래서 남들과 달리, 집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은 ‘시끄럽게 굴어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엔 주로 옥탑방을 찾아다녔다. 늘 내 로망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므로. 그러나 월세가 싼 지역은 집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있어 옥상이 넓은 옥탑방이라도 파티 같은 것을 했다가는 쫓겨날 각오를 해야 했다.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원룸 혹은 투룸 뿐이었다. 그러나 월세가 싼 지역의 원룸들은 하나같이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일찍 잠드는 사람들의 장소였다. 나는 교외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들어온 곳은 교외의 작은 목공방이나 부동산, 물류창고 등이 듬성듬성 있는 시골동네였다. 난 거기서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컨테이너 가건물을 발견했다. 20평짜리 직사각형의 텅 빈 창고였다. 교통도 불편하고, 인적도 드물었다. 화장실도 집 밖에 있었고, 주거를 목적으로 만든 곳이 아니다보니 냉난방도 안됐다. 보통 사람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그 공간을 나는 덥석 계약해버렸다. 인테리어는 직접 하면 될 거라는 목공소 근무 2년차의 자신감과, 집을 찾으러 다니는 누적된 피로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월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비쌌지만, 집이 크니까 ‘누구라도 들어와 살게 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무대책이 대책이었다.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목공소에서 장비를 빌려와 공사 준비를 했고, 없는 돈 있는 돈 빌린 돈 다 끌어 모아서 재료를 샀다. 재료 살 돈이 모자라서 일단 공사를 시작하고 다음 월급 때를 기다렸다. 동네에서 빈둥거리는 친구들, 후배들을 전부 불러 모아다가 ‘부루스타’에 고기 구워주며, 소주 따라주며 공사를 돕게 했다. 페인트도 칠하고, 나무 자르는 법이나 기둥 세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술판이 벌어졌다. 돈이 없어 공사를 두 달 가까이 했고, 숙취 때문에 공사를 쉰 날도 많았지만(용케 술 마실 돈은 있었다) 어찌저찌 마무리가 됐다. 지원이가 독립한다는 소식을 들은 문탁 어른들이 생활용품을 장만해주기도 했다. 이런저런 물건들이 들어오니 얼추 사람 사는 곳처럼 되었다.

   공사하는 과정에서 공간에 정이 붙은 후배들이 자주 술을 사서 놀러왔다. 차 없이 다니기에는 대중교통이 참으로 불편했는데, 다들 어떻게든 기어 들어와서 술을 마셨다. 게 중 하나는 집에 있어봐야 부모님 잔소리만 듣는다는 핑계로 아예 집에 눌러앉았다. 나의 월세에 대한 무대책이 그 친구 덕에 일부 해결되었다.

   판을 깔아놓고 보니 뭔가를 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종종 서울의 한 문화공간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즐겼는데, 그곳에선 세미나나 전시, 공연도 했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진지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게 참 좋아보였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진지한 활동들을 만들어 내다니(!). 난 나에게도 공간이 생겼으니, 그리고 드나드는 친구들이 있으니 그런 것들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청년 모임의 전사前史, ‘해봄’

   사실 그런 시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제대를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나는 문탁에서 ‘해봄’이라는 청년 모임을 만들었다. 문탁은 공부 공동체였고, 대부분의 주체가 4-50대였다. 그 속에서도 충분히 많은 것을 배웠고, 딱히 불만이나 이질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겐 또래 친구들이 필요했다. 예컨대 <감시와 처벌>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군대나 학교에 대한 감정들은 그들보다 더 거칠고 생생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너는 그렇게 느끼는구나’가 아니라 ‘맞아, 나도 그래’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끔 문탁에 좋은 강의가 있으면 공부를 하러 오는 20대들을 꼬셨다. 함께 놀고,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많지 않은 인원이 모여 세미나를 했다. <88만원 세대> 같은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문제의식이 생겼다. 우리는 돈도 잘 못 벌면서, 늘 돈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친구를 만나기만 해도 돈이 있어야하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래서 학교 다니기도 바쁜데 알바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돈을 안 쓰고 놀아보자, 그런 일들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만든 모임이 ‘해봄’이었다. 이 모임은 ‘계’의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한 달에 한 사람이 2만원씩을 내고, 이렇게 모인 돈으로 각자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함께 해봤다. 우린 파티도 하고, 운동회도 만들고, 공연도 하고, 함께 농활을 가기도 했다. 5명 정도로 시작했던 모임이 몇 달 뒤엔 20명 가까이 참여하는 회의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저 여가생활 정도로 생각하고 모임에 나오는 친구가 있었는가하면, 이 모임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노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사실상 돈 쓰며 노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반면 학교나 직장에서도 이미 스트레스가 많은데 여기서마저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 회의를 자주하면 나오기 어렵다는 의견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은 늘 충돌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당연히 갈등은 깊어졌고, 그런 갈등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친구들은 하나 둘씩 해봄을 나갔다. 1년여를 열심히 하고보니 많은 친구들이 학교로, 직장으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석운동 88-1번지에서 ‘석운동’으로


   그럼에도 이것이 다시 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이 공간을 드나드는 새로운 사람들 덕분이었다. 난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에 언제나 공통적인 결핍이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때론 학교나 직장에 대한 불만이었고, 때론 삶의 부분들이 온통 돈 버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으며, 또 어떤 때에는 외로움 같은 것들이었다.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일단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엔 좀 더 간단하게 접근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가볍게라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석운동에 유독 자주 왔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홈파티를 기획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정해 그와 관련된 음식과 술, 놀이를 만들어 함께 즐겼다. 매번 10명에서 2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석운동에 모여 그런 것들을 했다. 그중에는 학교 선후배들도 있었고, 해봄을 함께 했던 친구들도 있었고, 그들이 데려온 새로운 사람들도 있었다. 난 신기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촌구석까지 들어와서 함께 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일들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처음엔 석운동 88-1번지라고 불리던 공간이 시간이 흐르자 그냥 ‘석운동’으로 불렸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가다 보니, 동네 이름이 공간이름으로, 고유명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 즈음 나에게 일이 하나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 청년들이 모이다 보니, 그 관계망을 통해 들어온 일이었다. 파티에 참여한 한 친구에게 건너건너 내가 목수라는 것을 전해들은 한 기획자가 인천의 바닷가에서 연출하는 파티의 무대와 공간 연출을 맡겼고, 난 이 일을 석운동 친구들과 함께 나눠서 진행했다. 무대는 꽤 성공적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몇 가지 일들을 더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몇 가지 일들을 진행하자, 몇몇 친구들과의 멤버십이 만들어졌고, 나는 좀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석운동을 “회사처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회사보다는 느슨한 일종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었다. 종종 들어오는 일들을 프로젝트화해서, 석운동에 놀러오는 친구들과 일을 나누면, 함께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돈도 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잘 되어서 일의 빈도가 늘어난다면 돈 걱정이 많은 여럿 청년들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결국 대학과 직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도 다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대기획을 가지고 나는 당시 지방자치단체에서 주최한 한 지원 사업에 원서를 넣었다. 공간을 새롭게 꾸미고, 일을 키워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덜컥 그것이 뽑혔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그러나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던 어려움이 현실화 되었다. 첫째, 적어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그것에 집중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했다. 그런 여유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젝트의 진행은 시간이 많은 사람의 어깨가 가장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생활을 책임져 줄 것이 아니라면, 시간을 들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둘째,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한들, 각자가 한 사람의 몫은 해야 할 분야의 전문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면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건 실험도, 연습도 아닌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간과 전문성이 확보되었다고 하더라도, 가치관이 충돌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세 번째였다.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함께 여러 가지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갈 능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공통의 감각이다. 하나하나 모두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동의가 가능한 감각,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 정도는 상대에게 맡길 수 있다는 믿음. 물론 이는 첫째, 둘째 문제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함께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각 분야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전문성이 때론 이 가치관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정된 네트워크에서 충분한 시간과 전문성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석운동에서 함께 세 번째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방법은, 나에게 익숙했던 공부였다. 함께 세미나를 하며 공통의 감각을 만들어보자! 하지만 ‘데 자부de javu’였다. 함께 일을 해보려 했던 친구들에게도 그건 부담스러웠다. 세미나는 한두 번 진행 되다가 바쁜 각자의 생활에 의해 흐지부지 되었다. 청년들은 언제나 바쁘다.

   어쨌든 1년 간 진행되었던 지원 사업은 마무리 되어야 했다. 우리는 사업 종료 시점에 다시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는 바뀐 공간과 우리의 포부를 들으러 약 50여명에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왔지만, 막상 그들에게 “우리가 뭘 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다. 1년의 시간동안 그것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티는 언제나처럼 “즐겁게 놀다 가세요.”로 마무리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싶었다. 그런데 내 주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2010년대 초반에는 나름 희망이 넘치던, 젊은 패기로 우후죽순 생겨나던 문화 예술 공간들이 점차 힘을 잃고, 문을 닫고, 쪼개졌다. 그런 와중에 많은 팀들이 살기 위해 지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몇몇 팀들에겐 그것이 독이 되었다. 지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그런 지원금을 찾는 젊은 단체들은 언제나 많았다. 원조가 끊기면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벌려놓은 일들을 마무리할 힘이 사라졌다. 나는 나와 많은 젊은 그룹들이 부딪친 문제가 비슷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해봄과 석운동, 약 5년간을 많은 친구들과 함께 했지만, 그것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유지하기엔 여러모로 힘이 달렸다.

   회의감은 회의감대로 들었지만, 여전히 소비 위주의 삶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소비를 감당하려면 나 역시 일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결과를 차치하고서 5년간의 경험은 돈을 벌고 돈을 쓰는 것 외에도 즐겁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도록 했다.





길드다, 이게 될까?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이젠 문탁에도 내 또래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어느새 오랜 시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우린 함께한 공부를 가지고 강의도 했고, 여행도 다녀왔다. 같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을 썼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우린 모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점점 개인화 되어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런 ‘변화 속에서 설 곳과 살 곳을 잃고 있는 우리 또래의 친구들’에 대한 관심,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하는 문제. 우리가 하는 활동들은 그런 문제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침, 우리들은 나름대로 각각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공부를 통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 늘 우리와 함께 우리의 스승이자 지원자로 계시던 문탁 선생님이 제안을 했다. “회사를 만들자” 2017년 겨울이었다. 지난 5년 간 난 놀이로도 시작해봤고, 일로도 시작해봤지만, 공부로 시작해본 적은 없었다.

   처음엔 좀 미적지근한 태도로 한 발만 걸쳐보자고 생각했다. 이때는 내가 퇴사한 뒤여서 여유가 있었고, 내 삶에 다른 특별한 대안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에겐 떨칠 수 없는 두 가지 의심이 있었다. ‘재미있을까?’와 ‘돈이 될까?’

   우선, 재미란 무엇일까? 나는 재미를 무어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간의 파티를 돌아보면 그건 의외로 간단했다. 술 마시고, 음악 듣고, 춤추고, 게임하고. 늘 비슷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은 누구든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내 걱정은 사실 내가 이들과 그것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난 언제나 나에게 익숙한 것들로 시작해서 한 발을 더 딛으려다 일이 잘 되지 않았다. 놀러 온 사람들과 노는 것 이상을 해보자는 것은 내 욕심이었고, 욕망의 불일치였다. 돌이켜보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리라 판단하고 일을 추진한 것이나, 다들 그런 욕망이 있는데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단정한 것이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길드다의 첫 번째 공식 행사는 2박 3일짜리 인문학 캠프였다. 캠프를 포함한 첫 해의 목표는 우리와 함께할 사람들을 찾고, 우리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참여했고, 질문했고, 공감했다. 물론 대부분의 참여자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간간히 우리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경험이 새롭게 느껴졌다.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이나 음악, 춤과 게임 없이도 즐겁게 수다를 떨었고(사실 술이 조금 있긴 했다), 더 깊이 서로의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 사실상 술이, 음악과 춤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의 정체도 타인과 뭔가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느낌이었다. 캠프와 후속 프로그램으로 이어진 강의들, 강의에서 나온 참여자들의 질문과 후기들은 더 구체적인 공유와 공감의 느낌을 주었다.




   돈이 될까? 라는 두 번째 질문은 길드다 활동을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투 트랙을 유지하고 있다. 퇴사 후 고유명사가 된 석운동을 회사이름으로 쓰며 작업을 통해 주 생활비를 벌고, 길드다에서 공부와 활동을 한다. 물론 이런 결정은 꼭 돈 때문만은 아니다. 목공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한 길드다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줄 수 있는 사정이 아니라는 측면도 분명히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각자 하되, 함께 한다. 예컨대 길드다에서 제안한 제품생산프로젝트, ‘공산품共産品’이 그런 활동이다. 길드다 멤버십 중 목공 기술을 가진 나처럼 특정 기술을 가진 친구들에게 정기적으로 제품제작활동에 필요한 물적 지원을 하고, 생산품에 대한 피드백에 다 같이 참여하여 ‘함께’ 생산과정을 공유한다. 이외에도 이미 문탁에서 진행되던 청소년 대상 인문 수업들을 길드다 사업으로 가져와서 더 나은 수업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피드백하고, 가능한 급여를 보장해주려 노력한다. 이런 것들이 당장에 큰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안정적으로 공부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삶의 능력을 기르는 것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능력을 기르는 것이란 뭘까? 이미 많은 청년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취직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의 활동도 한편으론 그런 노력과 비슷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 이런 활동이 우리에겐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학을 위한 수능, 직장을 위한 스펙, 결혼하기 위한 연애와 같은 조건부의 현재, 미래를 향한 현재가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 결과에 따라 과정에 의미가 부여된다. 캠프 이후 진행한 세 편의 미니강의는 유튜브 진출을 겨냥한 것이었다. 강의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 플랫폼에 올리고, 이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 공부와 관계를 확장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결과와 상관없이 이 준비과정자체가―주제를 정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피드백을 나누고, 리허설을 하는―이미 공부의 확장이고, 관계의 확장이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공통의 목표, 혹은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자면 그것은 ‘잘 사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이를 위해 ‘공부를 계속 해야한다’는 분명한 필요다. 뭘 하고 놀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하는 것은 그때그때 관심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것은 욕망의 차원에서 통합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각자의 현실적인 능력과도 관계되어있다. 목공으로 사업을 하자, 아카데미를 만들자, 글을 써서 책을 내자, 하는 등의 아이디어 전에, 함께 질문하고, 공부하며 그것을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을 구성하는 ‘일’, 우린 그런 일을 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이제 1년이다. 우리는 맨날 싸운다. 내가 보기에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 이른바 ‘청년모임’에서 갈등은 곧 위기였다. 그런데 우린 맨날 싸우면서도, 또 나와서 함께 공부하고, 회의하고, 논다. 물론 언제 어떤 욕망이 튀어나와서 찢어질지 모르는 것이 청년들의 삶이다. 하지만 과정이 이미 목적인 이상, 된다, 안 된다가 그리 중요할까. 이만큼은 된 것이 아닐까. 됐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12. 11. 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