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20대의 탄생 15회> 고은 - “왜 그렇게 오래된 책을 읽어?”

728x90





글 : 김고은 (길드;다) 


 길드다 멤버들은 2018년 9월부터 11월까지 유투브 미니강의를 진행했다. 유튜브 미니강좌는 각각의 주제를 가진 네 사람이 15분씩, 총 3달에 걸쳐 강의하고 강의 영상을 유투브에 올리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우리 또래의 문제를 옛 할아버지들에게 물어본다는 컨셉의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자>를 준비했다. 강의를 하기 위한 강의안을 쓰고, 현장강의 리허설을 하고, 강의를 한 뒤에는 편집정보를 넘기고, 영상을 편집해주는 친구가 편집해주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우리의 예상보다 품이 훨씬 많이 들어갔다. 멤버들 모두가 다른 일들과 함께 준비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부족했고, 특히 나 같은 경우는 고전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삶의 양식으로써의 철학

 


 내 첫 강의의 제목은 <세네카 할아버지, 욜로가 뭐예요?>였다. 나는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학파의 책을 고전대중지성 세미나에서 읽는 중이었다. 고전대중지성 세미나는 동서양의 고전을 교차해서 읽는 1년짜리 세미나로, 작년부터 2년째 같은 멤버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에 세미나를 하는 고전대중지성은 하루 전 날인 수요일 밤 10시까지 과제를 반드시 올려야 했다. 과제라고 해봐야 책을 읽고 쓴 한두 페이지의 메모이지만, 글에 대한 날카로운 피드백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메모를 중심으로 세미나가 진행되니 아무렇게나 써갈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고 씨름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을 온전히 공부하는 데 쓴 건 아니었다. 수요일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이었는지, 문탁 네트워크 인문학 축제에서 선보였던 연극에 잘 드러나 있다.



“2년 동안 우리를 괴롭힌 건, 어려운 텍스트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밤 10시면 올려야 했던 숙제!

(멤버들은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하나같이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느티나무가 스르륵에게 다가가 말을 건내면 모두 스르륵을 쳐다보느라 고개를 든다.)

느티나무 : 스르륵 뭐해? 공부하니?

(스르륵은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공부하는 듯 보인다. 느티나무가 질문하자 고개를 슥 든다. 오징어를 들고 질겅이고 있다.)

모두 : 배고프니?

(옆에 앉아있던 은주가 스르륵의 수상한 행동을 감지하고 관객석 쪽으로 노트북을 돌려 보인다. 노트북에는 미드가 틀어져있다.)

모두 : 뭐야~ 미드 보네!”



고전대중지성 멤버들이 수요일이 지나간 기쁨을 만끽하는 장면이다.

 


 우리에게 공통으로 형성된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수요일 저녁 10시까지 올리는 메모에 대한 중압감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2년차가 되었으면 그 부담감이 줄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심해졌다. 2018 고전대중지성에서는 붓다와 스토아학파를 공부하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얼핏 보면 ‘좋은 삶’은 이론에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세미나의 주제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논리적인 글을 읽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때때로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구축해나가다 보면, 머릿속의 생각과 자신이 보내고 있는 일상 사이에 갭이 생기기도 한다.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이 거리감은 좋은 삶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자 좁혀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일상을 찬찬히 뜯어봄으로써 머리로만 알고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게 됐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멋진 말을 해도 그것과 동떨어진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매주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마다 넘어지고 일어났다가 또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세미나시간에 토론을 하다보면 우리가 걸려 넘어지는 간 큰 바위가 아니라 작게 솟아있는 돌부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붓다나 세네카의 핵심 이론은 알기도 어려울뿐더러, 그것에 반기를 드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문장 하나, 말투 하나에 말문이 턱 막혀버린다. “나는 내 삶이 행복하고 즐거운데, 왜 붓다는 인생이 괴로움이라고 말했을까?” “어떤 일에도 분노하지 말라니, 세네카는 세상의 불의나 부당함에도 순응하라는 건가?” 그리고 그것은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표상, 깨고 싶지 않은 생각이나 딱딱하게 굳어있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주 글을 쓸 때마다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모순투성이의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나와 선생님들 사이에는 미묘한 온도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나만이 이 세미나의 유일한 이십대여서 이십 몇 년을 묵은 카페트를 들고 먼지를 터는 동안, 나머지 선생님들은 그 두 배의 시간동안 쌓였을 묵은 먼지를 털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러한 작업을 고문이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이러한 작업을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세미나 시간마다 눈물을 보였고, 누군가는 집에서 꾸준히 명상을 하면서 자기를 살폈다.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기존의 습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책을 읽고 자기의 삶으로 가져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니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나는 자주 압도당하고 감화되었다.


 그간 또래와 세미나를 할 때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제멋대로 뻗치고 있는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거나,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일부분을 드러내는 모습은 놀라웠다. 피에르 아도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이 고대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한다. “고대철학은 생활양식이자 확고하게 담론인 것이다. 그것은 담론이자, 결코 닿지 못하면서도 지혜에로 향하는 생활양식이다.” 이 년간 고전대중지성 세미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양식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나 확인하고, 어떤 삶을 꾸려나갈지 공부하고, 그 삶을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또 실험했다. 피에르 아도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는 2년간 서로를 버팀목 삼아 삶의 양식으로써의 철학을 해왔다고, 감히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우렐리우스의 ‘자유’


 펄펄 끓고 있었던 선생님들에 비해 비교적 쿨했던 나의 고전 읽기는 아우렐리우스를 만나고 달라졌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 글이긴 하지만 하루 일과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일기라고 하기도 어렵고, 생활에 지침이 될 만한 글을 적었지만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적었으니 교훈집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단편적이고 짧은 문장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데, 처음에 나는 그의 친절하지 않은 잠언 형식의 토막글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은 당혹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우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누구이며 우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8-52)

  

 언뜻 보기에 이 책은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해 쓴 것 같기도 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상기시키고 있는데, 그 내용이 때론 누구든 납득할 수 있는 도덕적인 지침일 때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때엔 우주니 자연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와 같은 말들을 늘어놓기 일쑤다. 우주란 해와 달,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런 저런 은하들, 뭐 그런 게 아니던가? 얼핏 보기에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쌩뚱 맞아 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아우렐리우스에겐 이 시대의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이 누군지도 우주가 무엇인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야말로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편협하다는 지적을 받는 건 유쾌한 일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우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우주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태도로 대할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주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소멸하고 변화하는 것이 나에게서만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러니까 변화가 섭리이고 필요한 일이라는 걸 이해하면 우리는 유한한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하는데 이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높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가 처해있는 이 현재란 그저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주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동시에 생성과 소멸의 시간은 짧아도 그 전후의 시간은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에 따라 ‘자신을 위한 드넓은 공간’을 갖게 된다. ‘자신을 위한 드넓은 공간’을 갖는 건 이런 게 아닐까?


 한때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반려견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 뒤로, 소중한 친구 한 명이 세상을 먼저 뜬 뒤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해졌다. ‘나 혹은 내 주위의 누군가가 당장이라도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평소였다면 쓸데없는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런 생각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을 읽고는 약 일 년 간 시도 때도 없이 죽음을 떠올렸다. 자아의 소멸과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공포가 올라올 때마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되새겼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이 세계를 그려본 뒤 그 안에서 역시 변하고 있는 나를 위치시키고 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고,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을 그저 즐거워 할 수 있게 됐다. (욜로!) 나 자신에게도 내 주변의 존재들에게도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자연이 하는 일이란 여기 있는 것을 저리로 옮기고, 변화시키고, 여기서 들어올려 저리로 나르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에 불과하므로 새로운 것과 마주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8-6)


    

 그러니까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일종의 ‘수련’을 한 것이었다. 이 ‘수련’은 그의 말마따나 마음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떤 일이 자신의 능력치를 벗어나 있을수록, 당면한 문제일수록 시선이 멀리가지 못하고 눈앞에 고정되기 쉽다. 길드다 친구들과 함께 일하다가 종종 버거운 일을 맞닥뜨리게 되면, 감정이 제어가 안 되거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곤 했다. 이럴 때 나의 마음이 옹졸해지는 것은 시야가 좁기 때문이었다. 만물이 불변하는 듯이 특정한 의견을 덧붙이고, 외부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듯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따라 공간적으로 넓혀서, 시간적으로 늘려서 현재를 관조하고 나면 나를 괴롭히는 판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협소하고 고정된 판단에서 벗어나서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그마한 씨앗과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현실적인 조건이 달라지지 않았다하더라도 나의 마음의 변화가 지금 처한 문제를 다르게 –혹은 제대로- 만날 수 있게 한다.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해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아모르파티!)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자


 늘 내가 받은 감흥을 친구들과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유투브를 준비할 때만 수월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길드다 친구들과 회의를 할 때나, 사석에서 공부한 것을 전할 때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 편으로는 함께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했고, 나의 공부와 말하기 능력이 부족한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나는 친구들이 고전에 대해 갖는 막연한 거리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 책 말고 요즘에 나온 책을 읽자!” 꼭 길드다 친구들만의 일은 아니다. 주변에 현대철학이나 미학에는 관심을 갖는 친구들은 꽤 있지만, 고전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는 만나본적이 거의 없다.



9월 유투브 미니강의에서 세네카 할아버지에게 욜로에 대해 묻고 있다.


 고전을 읽는 건 ‘올드’하지 않다. 사실 과거나 현재나 세상사는 엇비슷하다. 어떤 땐 책이 어제 쓰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덕분에 사람들은 오래된 책을 읽으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건 지루하지 않다. 감조차 잡히지 않던 것을 몇 차례의 수고를 들여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즐거움을 준다. 누군가는 고전을 읽는 것을 보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일리치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세상을 봤다. 그는 게처럼 걷겠다고 말했다. 게는 도망칠 때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뒤로 걷는다. 일리치는 게와 마찬가지로 현재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앞으로 걷는 대신 뒷걸음질 치며 걸었다.


 이는 오늘날의 확실성으로 과거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시도다. 목표물을 콕 찝은 뒤, 달려들지 않고 뒷걸음질 치다 보면 조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목표물로 꽉 차 있던 시야에 주변 피사체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제야 게-인간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목표물이 어느 시공간에 놓여 있었는지, 그러니까 이 지금이 어떤 흐름 위에 위치해있는지 알게 된다. 게처럼 걷고 나면 어쩐지 협소했던 나의 감각이, 나의 시야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이해되지 않는 감각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다보면 자연스럽게 몸에 새겨지게 되고, 더 이상 부끄럽게 혹은 협소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몸에 새겨진 다른 감각들로 다른 길을 내려고 애쓰게 된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시대의 감각이 무엇인지 익혀보려고 시도하는 것이고, 내 몸에 체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감각을 낯설게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며, 낯선 감각으로 다른 삶을 살아보려고 용쓰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에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왕 태어난 김에 태어난 몫은 다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세상 내 멋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고전을 읽는 중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3. 8.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