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20대의 탄생 16회> 지원 - 펜타토닉 스케일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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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지원 (길드)


Smells like teen spirit

 십대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학교에 대한 기억보다는 학교 밖에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것이 주로 생각난다. 그런 기억들은 교실 안의 기억들보다 역동적이다. 밤에 엄마 몰래 집을 나가 친구들과 술 마시고, 건물 지하에 락카 스프레이로 아무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다른 학교 아이들과 쌈질하고, 한 평 남짓 좁은 연습실에 대여섯 명이 모여 Nirvana의 곡을 몇 번이고 합주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와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노력하던 기억들. 그야말로 smells like teen spirit이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 같다. 지루한 수업, 똑같은 일상, 내가 학생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주어진 일들로부터 말이다. 난 똑똑했다. 공부를 하지 않을 방법으로 실용음악을 선택했다. 다들 공부를 하는데, 그건 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실용음악은 ‘정당하게’ 학교로부터 멀어질 방법이었다. 입시가 다가오자 학교에선 아예 학원 연습실로 가도 출석을 인정해 준다고 했다.

 역동? 자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참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나의 일상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게임하고, 담배피고, 커피마시고, 좁은 연습실에 앉아 손에 쥔 베이스기타를 멍하니 쳐다본다. 학교가 끝나고서야 올 친구들을 기다리며 휴게실 소파에 누워 있다가, 아이들 올 때쯤이 되면 하루 종일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연습실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연출했다. 아이들이 오면 ‘아~ 좀 쉬어야겠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수다를 떨었다. 대부분 졸고, 가끔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던 시간들. 어떨 땐 막연한 불안감에 차라리 학교를 갈까, 생각했다. 그렇담 난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안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의 눈치, 학교라는 공간이 나에게 강요하는 어떤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도피 자유의 차이

 그렇게 도피한 학원 연습실엔 꼭 나보다 조금 일찍 나와 있는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밴드를 한 기타를 치는 친구다. 나는 연습실에서 친구들이 올 하교시간을 기다리며 빈둥거렸지만, 그 친구는 정말 하루 10시간씩 매일 연습을 했다. 가끔 그 친구가 쉴 때 담배를 함께 폈다. 어떤 음악가의 영상을 보았냐며, 엄청나다는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면 난 곧장 휴게실로 가서 그 영상을 찾아봤다. 멋지다고 생각하며 누워있었다. 그 친구는 연습실로 들어가서 그 음악을 연주했다.

 일주일에 두 번, 합주 때마다 친구에게 늘 혼났다. 연습 좀 하라고. 함께 밴드를 하고 있었으니, 안 혼날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점점 더 어려운 곡을 연주하고 싶어 했다. 친구는 특히 재즈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음악이 별로라는 핑계를 대며, 취향의 차이라 둘러대며, 면피하기를 반복했다. “쉽고 대중적인 음악이 좋다”며.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내 맘대로만 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도 구겨질 만큼 구겨졌을 때, 난 연습을 시작했다.

 그때 느낀 즐거움이 있었다.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났다는 기쁨. 재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가 가능하지만, 곡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크게 주제Theme-즉흥연주Improvisation-주제Ending theme의 순서로 진행된다. 주제는 주로 과거에 연주되었던 곡의 멜로디와 코드 진행을 편곡한 것이다. 밴드가 함께 멜로디와 코드를 맞추어 연주함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펼쳐갈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를 공유한다(예컨대 유명한 스탠더드 재즈 중 하나로 꼽히는 ‘Autumn Leaves’는 1940년대 작곡된 샹송이다. 이것이 1950년 영어 가사가 붙어 미국으로 넘어왔고,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히트 덕에 재즈로 편곡되었다). 그 후에 주제와 같은 코드 진행 위에서 연주자가 돌아가며 즉흥 연주를 한다. 말하자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 해석을 즉흥 연주를 통해 표현한다. 나머지 연주자들은 즉흥 연주를 하는 연주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으며 반응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맞춰주기도 한다. 마지막엔 주제로 돌아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가를 상기시키며 끝난다.

 재즈는 따라서 곡을 단순히 커버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각각의 예외적 상황에 재치 있게 반응하고,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파악하고, 무엇이 내 이야기를 하는,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좋은 방향인가를 끊임없이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선 그 어떤 커버 연주보다 직설적으로, 연주자의 능력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연주하는 곡(주제)이 어떤 곡이건 간에 똑같은 솔로와 프레이즈를 반복한다. 이는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가 적기 때문이다. 반면 매번 바뀌는 곡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매번 다른 프레이즈와 느낌을 전달한다. 무슨 차이냐 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대적인 연습량의 차이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자유로워진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내가 느낀 잠깐의 즐거움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점에서 자유는, 도피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연습실로 공간을 옮겼을 뿐, 갑자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자유는 어떤 시간, 공간에서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명령들을 거부할만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 거부, 능력은 단순히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능동적인 다른 어떤 행위로, 적극적으로 상황을 이전과 다르게 해석하고, 대처하는 일이다. 도피생활을 할 당시 우연히 내가 맛 본 자유가 재즈를 통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나에게 그것은 아이러닉하게도 (그 당시엔 도피의 대상이었던) 공부다.


    



읽어버리는

 내가 졸업을 하고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학교 친구들은 나를 걱정했다. 군대를 다녀와 목공소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내 학원 친구들은 괜찮냐며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들 입장에선 아마도 어쩔 수 없이 꿈보다 일을, 돈을 택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더러 지원이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내가 문탁에서 하는 공부에는 의문을 가졌다.

 우리가 공부에 대해 갖는 표상은 대부분 학교 공부로 귀결된다. 읽고, 외우고, 시험보는 공부 말이다. 더 많이 외우는 것, 그리하여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것. 점수는 더 좋은 대학, 한 단계 어려운 자격증, 좋은 직장으로 연결되는 목표와 관련된다―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SKY캐슬>을 보라!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단언컨대 ‘서울의대’다. 그리하여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 뒤에 공부가 있다. 친구들이 내가 공부를 한다는 말에 의아해 한 것은 이런 표상이 큰 몫을 한다. 대학도 안 나왔고, 음악을 관뒀고, 이미 목공을 통해 돈도 벌면서 왜 공부를 하지? 그 공부의 목표는 뭐지?

 레베카 솔닛의 <맨스플레인>이라는 책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2015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나는 그 즈음 페미니즘이 사회전반에 퍼져 나가고 논란이 되는 현상을 목격하며 이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저런 대화들 중에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을 권했다. 내용은 책의 제목처럼 남자들이 얼마나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 하며’ 가르치려 드는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남성문화가 여성적 주체들에게 가한 억압적 방식 전반에 대한 섬세하고도 냉철한 분석이다. ‘어떤 말들이, 어떤 행위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하고 여성을 억압해왔는가?’ 책을 펼칠 때의 나는 그저 페미니즘이 궁금한, 책상에 앉은 평범한 남자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보니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데없이 찾아온 화끈거림과 안절부절. 나는 때론 공감하기도, 부정하기도 하며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빠르게 오고갔다. 내가 어린 시절 괴롭혔던 수많은 친구들,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선의로(!) 해왔던 수많은 말들에 대한 기억이 뒤통수도 아닌 정면으로 밀어닥쳤다. 과거의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바로 그 남성으로, 다시금 발견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어떻게 사과할 것인가? 여성혐오적인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물음을 적극적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는 내가 나타났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읽기의 경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읽어버리는’ 경험이라 표현한다. 이것의 반대편엔 ‘명령’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 규칙들, 정보들, 관습들.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안다’고 믿도록 하고, 그것이 마치 당연한, 가치중립적인 것이라 생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 관습들은 특정한 효과를 가진다. 예컨대 과거의 나에게 가부장적 남성중심 문화는 성적인 농담들, 인터넷 문화들, TV시트콤들, 부모의 언행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마치 공기와 같은 것이었지만, 사실은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여성들을 향한 특정한 효과를 가진다. 이런 효과로부터 어느 정도의 혜택마저 받은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의심할 이유나 능력을 상실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것의 다른 측면이 밝혀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읽어버리는 순간이다.

 읽어버리는 일은 이런 무비판적이고 반복적인 수용을 거부한다. 나의 문제와 저자의 문제가 포개지며 일종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이 경험은 너무도 강렬해서 모른 채 할 수 없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살 수 없는 다른 신체가 된다. 그간의 삶을 반복할 수 없는,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역동’이다. 책상 앞의 남자 사람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노트를 발견하는 자유

 재즈를 연습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 나에게 즐거움이 되었던 것은 ‘펜타토닉 스케일pentatonic scale’이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7음계(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반음 부분을 제외한 5음계(도-레-미-솔-라)다. 사실상 7음계에서 음계의 성격이나 색깔, 미묘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다른 음계와의 차이를 갖는 반음 부분인데, 이를 제외함으로써 무색의 음계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음계는 그 성격상 어느 곡이건 그 곡의 으뜸음과만 맞추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예컨대 크게 보았을 때 곡이 다장조C-major scale라면, 도-레-미-솔-라의 다섯 음만 가지고 즉흥연주를 했을 때 누구에게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니 뭔가 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즉흥연주를 하는 것은 주로 하수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거나, 곡을 이해할 수 없거나, 진행 중인 곡 위에서 각 코드의 성격을 잡아내기에 순발력이 부족할 때 우리는 ‘만능열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만능열쇠는 곡의 언저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무난히 어울릴 수 있을 만큼의 자유를 주지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도록 한다. 펜타토닉 스케일이 주로 민요나 동요에 사용되어 왔던 만큼, 아무데서나 펜타토닉 스케일을 남발하는 것은 반대로 모든 곡을 민요나 동요처럼 만들어버린다. 밴드를 하는 친구들에게 ‘펜타토닉의 황제’라 불렸던 에릭 존슨(기타리스트)도 사실은 메이저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정확히는 ‘톤의 황제’다―5음계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톤 조절을 멋들어지게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능력만큼의 자유다.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무관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것이 가능할 거란 상상은 펜타토닉 스케일 수준의 자유가 아닐까. 아이러닉하게도 자유는 지금 내가 가진 자유가 어떤 한계로 기능할 때, 그것을 깨부숴야 할 것이 될 때, 그리고 그것을 고통스럽게 깨부쉈을 때 더 커진다. 익숙한 펜타토닉 스케일을 멈추고, 지금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노트note, 음이 무엇인가를 더듬더듬 찾아보는 것. 그렇게 해서 더 큰 자유로 나아가는 것. 지금 나에겐 그것이 읽기이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방황하던 십대 시절과 어떤 연속성을 가진 과정이다. fin.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3. 8.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