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를 읽는다] 세 번째 시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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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4장에 이르러, 라투르는 ‘대칭성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통하여 앞에서 논의하였던 근대성의 견고한 분할들을 뛰어넘으려 시도합니다. 기존의 근대질서는 자연과학 혹은 정치사회 한쪽으로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져 세계를 파악해야만 했지만, 대칭성 인류학은 양쪽 모두에 주목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집중하죠. 대칭성 인류학의 의의를 보여주기 위해 라투르는 지금껏 인류학이 가져왔던 포지션들을 차례로 보여주며, 각각이 어떤 한계를 갖는가를 설명합니다.


  우선 절대적 상대주의는 모든 문화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에 비교도 소통도 불가능함을 가정합니다. 당연히 위계질서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형태로도 결코 연결될 수 없이 각 사회들은 제각기 고립되어 있게 됩니다. 자연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한편 문화적 상대주의는 자연이라는 직접적 대상이 있고, 그 자연에 대처이자 전략으로 제각기 다른 문화들이 나타났다 가정합니다. 이 문화들은 옳은 답, 틀린 답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답’이므로 여전히 상대적으로 존재합니다. 이 때 자연은 그 존재가 드러나긴 하나 모든 문화들의 외부에 존재합니다.


  특수 보편주의에서는 특정 문화(서구 문화)가 갖는 자연의 접근법만이 옳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정치사회와 자연을 완벽하게 분할함으로써 포함하는 근대적 접근이 일종의 특권적인 형태가 됩니다. 이에 따라 근대 = 서구문화가 됩니다.


  허나 라투르가 주장하는 대칭성 인류학은 문화 - 자연을 배제한 - 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우리가 기존에 문화라 부르던 것을 현존하는 ‘집합체’, (자연+문화)로 보려 합니다. 근대의 과학과 기술은 점점 더 많은 비-인간적 요소들을 집합체에 추가하고 근대 사회는 더 많은 하이브리드들을 더해가며 집합체의 규모를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근대 과학기술의 힘은 바로 이 확장의 힘입니다. 그것이 딱히 과거에 비해 진실이라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이 대칭성 인류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상대적 상대주의(관계주의)의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상대적 상대주의란 다양한 척도를 만들어 그 척도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즉 위계를 만들어내긴 하나 단일 척도를 사용하진 않으므로 보다 다각적인 접근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더 낫지만, 저렇게 보면 또 저것이 더 나으며, 그렇기에....) 이 시대 넘쳐나는 하이브리드들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단일 위계를 상정하는 보편주의나 모든 위계를 동등하게 만드는 절대적 상대주의에 비해 다양한 척도들로 다양한 위계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상대적 상대주의는 집합체들의 관계 형성을 이해함에 있어 주요한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단, 비대칭적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근대성을 포기한다는 전제 하에서만요.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상대적 상대주의란 도구를 들고 대칭적 인류학의 관점에서 셰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확인했던 근대의 영역들인 자연, 사회, 담론, 신, 존재로 분활되지 않는 하이브로서의 세계. 그럼으로써 우리는 근대인에서 벗어나는데요. 그렇다면, 근대인에서 벗어난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마지막 5장에서, 라투르는 근대인에서 벗어난 인간을 위한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위치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근대화의 기획이 암초에 부딪힌 지금, 우리는 전근대인으로 ‘퇴행’할 것인가? 반근대인으로 물러나야 하는가? 탈근대의 중간지대에서 근대인이기를 지속할 것인가? (...) 대상들의 기원을 하나의 자연과 하나의 사회의 본질적 요소로 변형시키고, 그것의 생성부터 안정까지 행해지는 과정들은 모두 밝혀져야 하며, 그 작용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닌 자연의 무리와 아무도 지배하지 않을 인간 다중, 이 새로운 전지구전 존재들을 아우를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변형시켜야 한다. 인간의 위치 자체가 재조정되어야 한다.」 (발제문서 발췌)

 

  그 존재란, 자연과학과 정치사회라는 근대가 만들어낸 두 극의 중앙에 위치하는 중재자입니다. “인간 본성은 그것을 위임받은 대리인과 대표자들, 그것의 형상과 그것의 전달자들의 집합이다.”(341-343) 여기서 ‘대리’, ‘위임’이라는 표현이 낯설 수가 있는데요. 뒷부분의 용어해설에서 역자가 이 개념을 잘 풀어쓰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대리와 위임은 표상과 대표의 대안개념입니다. 앞서 살폈듯 자연의 극에서 과학자들은 ‘말할 수 없는’ 자연을 대신 표상하고, 정치의 극에서 정치인들은 ‘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표하죠. 라투르는 여기서 사라지는 자연과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살리기 위해 더 기계적이고 취소 가능한 관계인 대리/위임 개념을 주장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과속방지턱에는 교통경찰의 의지가 시멘트나 아스팔트와 결합되면서 위임되며, 이 의지가 과속방지턱을 이루는 물질과 다시 분리될 때, 즉 과속방지턱의 물리적 실존이 해체될 때 위임은 철회된다. 라투르는 이러한 대리위임의 관계가 기존의 표상/대표의 관계와 공존할 수 있는, 사물들에게까지 확장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p.371)


  기계, 사물, 정치, 종교, 경제 등 인간과 밀접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분리되어 있던 형태들을 다시 인간과 연결시킴으로써, 인간을 그 모든 것이 관통하여 흐르는 중재적 존재로 만듦으로써, 하이브리드를 받아들임으로써 근대가 마주한 파국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결국 라투르가 하고 싶은 말인 듯 보입니다.


  우리는 세미나에서, ‘밀양’, ‘페미니즘’, ‘예술’ 등의 문제를 가져와 라투르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문제들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서 해석되고 있는가, 장차 라투르의 방식 - 대칭성 인류학으로 사람들이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작금의 일들, 밀양의 저항과 페미니즘적 행동들에서 분명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나 또한 지금껏 있어왔던 그와 같은 운동들이 항상 근대적 방식으로 환원되어 왔음도 이야기했습니다. 과학계가 인정하는 발견, 혹은 법률의 제정, 이것이 이루어졌을 때에만 우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생각하기 쉬우니까요. (혁명적 단절의 역사관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공부와 글로써? 혹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써? 명확한 답은 낼 수 없었지만, 여러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다음주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그 서설과 1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발제는 상익입니다! 다음주에 만납시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11. 1.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