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를 읽는다] 첫번째 시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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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 세미나, 그 첫 번째 시간에는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의 1, 2장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문탁이 다룬 주제들이 대하여 보다 신선한 시각을 접해본다는 당대 세미나의 컨셉에서, 라투르의 책은 ‘탈핵’ - 정확히는 ‘과학 기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위하여 선정되었습니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과학기술과 세상이 맺는 관계 그 자체입니다. 정확히는, 근대인이 세상을 범주화하여 인식하는 과정에서 비-인간 및 자연과학의 영역과 인간 및 사회과학의 영역이 완전히 괴리되어 버린다는 점에 대한 것입니다.



  1장 : 위기

  오늘날 우리는 신문의 지면이 나뉘어 있듯 세상도 나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투르는 우리가 특히 세 가지 ‘비판적 입장’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고 설명합니다.

  한쪽은 “비-인간-자연-과학-기술-물질-사실”들의 세계이며, 이것을 자연화의 입장 혹은 인식론의 입장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한쪽은 “인간-문화-정치-사회-계층-권력”의 세계이며, 이것을 사회화의 입장 혹은 사회과학의 입장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이과’의 영역과 ‘문과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언어-표상-수사법-의미론-텍스트학-해체주의-담론”의 입장이 있습니다. 과학의 입장으로 보든, 사회정치의 입장으로 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맥락 속에서 그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렇게 표현되고 어떤 효과를 내는가에 집중하는 입장입니다.

  이 세 가지 비판적 입장은 세계를 ‘인식’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들이지만, 동시에 이 입장들은 제각기 너무 강력한 논리구조와 설득력을 갖기에 좀처럼 서로 합쳐지지 못합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었을 당시 불거졌던 ‘과학의 중립성’ 논쟁 - 과학 기술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고, 문제는 오직 그를 사용하는 인간의 정치적 의도에 달렸다는 주장 -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의 측면이 아닌 실존의 측면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이 영역들이 서로 중첩되고 연결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 우리는 도구적 사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체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맥킨지는 미 해군 전체와 의회까지를 동원하여 그가 다루려는 관성유도장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칼론은 상당수의 프랑스 에너지 정책뿐만 아니라 아니라 프랑스 국영 전력회사와 르노자동차까지 동원하여 실험실 한 가운데 있는 전극 끝에서의 이온 변화를 파악하려 한다. 휴즈는 에디슨의 백열 전구 필라멘트를 중심으로 미국 전체를 재구성한다. 마찬가지로 파스퇴르의 박테리아를 끌어들이면 전체 프랑스 사회가 우리 눈에 들어온다.” (24-25p)


  우리 세계의 실존은 자연과학과 사회정치, 물질과 인간의 복잡한 연결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인식에 있어 이것들을 나누어서 보려고 하지만 우리 세계의 실체는 분명 이것들이 모두 뒤섞인 형태로 존재합니다. 라투르는 이러한 우리 세계의 실존-실체를 ‘연결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연결망들은 (자연처럼) 실제로 존재하고 (사회집단으로서) 집합적이며, 담론적일지라도 객관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으며, 담론의 효과는 더더욱 아니다.” (31)


  이 표현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의 세계는 이중의 분할을 통해 존재합니다. 첫째 분할은 자연과학의 입장과 사회정치의 입장으로 (+담론과 텍스트의 입장) 나누어 세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를 나누어 인식하는 것을 라투르는 ‘정화’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둘째 분할은, 이런 ‘정화’의 작용과는 별개로 세계의 실체는 이런 영역들이 모두 뒤섞인, 말하자면 하이브리드의 형태이자 연결망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혼합과 연결의 작용을 라투르는 ‘번역’이라고 표현합니다. 라투르는 세계의 실체가 나누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첫 번째 분할) 정화와 번역의 작용(두 번째 분할)도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중 분할 모두를 비판합니다 - 이것은 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아무튼, 근대인들은 세계를 자연과학의 입장과 사회정치의 입장으로 완전히 나누어 인식하면서 각 입장에서 거대한 성과를 추구해왔습니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는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고 컨트롤하는 목표가 있었고, 사회정치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인간 개인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죠.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과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 및 자본주의 사회의 파열이 사회정치 영역에 위기를 가져왔고, 오존층 파괴와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자연과학 영역에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근대가 추구하던 두 영역의 기획 모두에 회의감이 감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라투르는 분리하여 존재하는 근대 세계에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의 과제는 철저하게 분리된 정화와 번역 작용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지금껏 근대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져왔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근대의 방식으로 존재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거라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2장 : 헌법


  2장에서 라투르는 자연과학의 세계와 사회정치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이 어떻게 근대 세계의 존립에 영향을 미쳤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존재 메커니즘을 그는 근대의 ‘헌법’이라고 비유합니다.

  라투르는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보일과 정치학자로 널리 알려진 홉스, 두 사람의 사상을 대조하여 그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발제문을 인용하겠습니다.


  “ 중간 내용을 차치하고 결과적으로 볼 때, 보일은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정치 담론을 창조했고 홉스는 실험 과학이 배제되어야 하는 과학의 정치를 상상했다. 실험실을 매개로 한 사물들의 표상과, 사회 계약을 매개로 한 시민들의 대표 두 가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표상이다. (...) 정치의 대변자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다투는 시민들의 집단을 대표하며 과학의 대변자들은 말없는 물질들, 사물들의 집단을 재현한다. 전자는 그들이 대리하는 자들(시민)의 말을 번역하는 유일한 입이며, 후자는 자신이 대리하는 자들(물질들)의 말을 번역하는데 물질은 당연히 입을 열지 못한다. 이들은 모두 침묵하는 자들을 대리한다.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 정치권력이고, 사물을 ‘표상’하는 것이 과학 권력이다.”(발제문)


“  다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들과 사물이 영원히 멀어졌노라 하는 건 섣부른 결론이다. 홉스와 보일은 그들의 저서에서 양쪽 모두를 아우르려 애쓴다. 왜 그들은 정치와 종교, 기술과 도덕, 과학과 법에 모두 참견하면서도 그 과제들을 동시에 분류하는가? 그를 위해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낸 ‘헌법’에서 그들 각자가 내세우고 있는 보장에 대해 알아야 한다. 보일로 대표되는 과학권력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장한다. “자연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었으며 우리는 오직 그 비밀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로 대표되는 정치권력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장한다. “인간이, 오직 인감나이 사회를 건설하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다.”(90) 헌데 이 두 보장은 상호적으로도 자기 내적으로도 모순적인데, 각자가 초월성과 내재성 양쪽 모두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 번째 보장을 덧붙인다.”






  왼쪽 세로축은 자연과학의 영역인데, 보시다시피 자연이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라는 모순된 두 역설을 주장합니다. 오른쪽 세로축은 정치사회의 영역인데, 정치사회 역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죠. 라투르는 즉, 이 두 가지 축이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의 이미지에서 ‘두 번째 역설’이란 글자 위에 X자를 크게 그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두 세로 축은 서로의 논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자연은 초월적인 존재인데 왜 과학자들 개인의 실험실에서 발견되는가? 우리는 사회적으로 개인으로써 존재하기에 그 사실을 매우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국가(리바이어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데, (민주주의인데) 왜 인간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압도당하는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세계처럼 국가 존재가 받아들여지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그 사실을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 X - 두 축이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세 번째 보장(명제)이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는 철저하게 나눠져 있는 것이고 두 축의 결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근대인들은 자연에 극단적인 초월성을 부여하면서도 자신들의 사회를 조직해내는 모든 지점에 자연이 개입하게 한다. 또한 자신들의 사회가 자연을 동원함으로써만 통합되도록 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치적 운명에게서 유일한 행위자가 될 수 있다. 자연의 초월성은 자연이 사회에 내재적이 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인 것의 내재성은 리바이어던(국가)로 하여금 초월성을 유지하는 것을 방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실로 잘 정돈된 구축물이다.”(발제문)


  그리고 여기에 더해 신의 존재가 네 번째 보장으로 더해집니다. 모두 알다시피 근대의 신은 무력한 존재처럼 보이지요. 자연의 세계에서는 과학이 있기에 더 이상 신이 발붙일 데 없고, 정치의 세계는 국가라고 하는 지상의 신이 만들어졌기에 더 이상 신이 현실정치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신은 ‘소거된 신’이라고 표현되는데, 대신 이 소거된 신에게는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률이 충돌할 때에 사람들의 신의 초월성에 호소할 수 있는 그 권리만은 남겨졌습니다. 과학 기술이 빚어낸 끔찍한 참극 앞에 사람들은 신을 부르짖죠. 또 버락 오바마가 백인들에 의한 흑인 교회의 총기 난사 사건에서 찬송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을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지지한 것처럼. 이처럼 신이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형태로 남음으로써 근대인들은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근대의 고유성과 힘은 긴 역사를 가로지르는 세 쌍(자연과학, 정치사회,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결합이자 산물이라 할 것입니다.

  결탁을 통해 모순된 것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게 되고, 분리를 통해 그 결탁을 감춘다. 이 완벽한 건축물을 통해 근대인은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승리해왔습니다. 필요에 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어요. ‘정치사회의 내재적 측면’으로 왕정을 무너뜨림으로써 개인들의 자유를 얻고, ‘정치사회의 초월적 측면’으로 강력한 근대국가들을 건설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을 통제합니다, ‘자연과학의 초월적 측면’으로 독립된 자연과학 체계를 구성하면서, ‘자연과학의 내재적 측면’으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합니다. 때때로는 그 둘을 크로스 시키면서 (물론 그 실체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장애물을 넘어섭니다.

  근대화된 문명인이 그토록 야만적으로 원주민들을 때려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관을 깨부수어 ‘자유롭게’ 하면서도 동시에 근대국가의 시스템에 그들을 종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모든 모순을 감추고 가능케하는, 이것이 바로 근대의 힘입니다.

  하지만, 이 메커니즘 - 근대성의 ‘헌법’이 단순히 속임수나 환상, 허구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라투르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은 ‘단순한 환상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이고 본질보다는 훨씬 덜 실제적’입니다. (113p) 그는 이 헌법이 우리의 기억과 과거의 역사 속에 존재하고 활동해 온 것이지만 더 이상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1989년의 붕괴)을 설명하고 정의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만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근대인들은 자신들이 자연과 사회를 분리시킴으로써 힘을 얻었다 생각하지만 실은 그 힘이 그 모든 것들을 뒤섞음으로써 모든 모순을 포용했기에 얻은 힘이라는 걸. ‘분리의 근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번 시간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의 3장을 동은이가 발제해오도록 하겠습니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8. 6. 1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