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를 읽는다] 3장 혁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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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당대를 읽는다> 세미나의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부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3장 혁명 부분을 읽고 만났습니다.

정말... 어려웠습니다. 라투르가 얘기하는 구조나 하고자하는 말 자체는 크게 어렵진 않지만 쓰여있는 글은 많은 인문학적 배경지식과 철학사를 알아야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러 번 읽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정리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세미나를 하죠.

지난 시간 얘기를 나눈 헌법은 라투르가 근대성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형이상학적인 근대성 자체의 원리를 말합니다. 이 근대성의 원리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정화작용과 하이브리드의 증식하게 만들고, 그 반복으로 근대인들의 헌법을 포화상태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들을 다시 분리시키고 규정할 판사나 비판자가 점점 모자라게 되었죠. 3장에서는 과학과 사회 사이에 계속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이브리드들을 “준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철학들은 이런 근대의 헌법(자연과 사회)과 준대상을 모두 흡수하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1) 칸트는 자연과 사회의 간격을 한없이 벌려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이브리드 현상을 하나의 존재론을 부여(헌법의 적용)해 담아내려 했지만 한없이 늘어나는 준대상들을 포획하려 했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그것으로 하이브리드의 증식을 담아내진 못했습니다. 2) 헤겔의 변증법은 오히려 자연과 사회의 극단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되어버렸죠. 3) 현상학에서는 하이브리드라는 현상 자체에 중점을 두고 해결해보려 했지만 라투르는 그 시도가 자연과 사회의 분리만큼이나 극복할 수 없는 긴장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4) 근대로 올수록 하이브리드 현상의 순수성에 대해서 논하게 되었고 이는 자연과 사회를 놓치고 하이브리드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든 구분을 시도했던 것은 곧 분리가되고 분리는 결국 모순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5) 탈근대적인 움직임은 아예 자연과 사회, 준대상을 아예 구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라투르는 통탄합니다. 결국 모든 시도들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165) 헌법과 준대상을 포획하려는 시도는 기호학에서도 나타납니다. 사회의 현상을 오직 언어적인, 텍스트 위주의, 기호로 받아들이고 오직 준대상에대한 담론만을 해석하려 하죠. 그러나 라투르는 기호학이 자율성이 부여된 담론과 담론에 속하지 않은 것(담론이 잠정적으로 보류한 것)의 연계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현상자체를 보지 않고 자연과 사회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는 것이죠.

또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부분은 ... 어려워서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간단히 정리하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물음의 주제인 ‘존재’ 직접적인 물음의 대상 ‘존재자’ 물음의 목표인 ‘존재의 의미’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존재자’는 실존하는 모든 사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인간만 따로 떼어 ‘현존재’라고 불렀어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왜 태어났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간다고 말하죠. 여기사 라투르는 “인간은 이미 한번도 자신의 존재를 잊은 적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존재를 망각하지 않았는데, 근대세계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 의미에서 형이상학도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175)


이렇게 헌법과 준대상들을 흡수하려는 시도들, 라투르는 이를 칸트의 개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칭하며 일종의 “혁명”이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잠깐, 2장에서 라투르는 혁명이 과거 전체를 무화시키려는 시도라고 말하며 “그들이 이러한 과거를 보존하든, 폐지하든 모두 혁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어 혁명이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과거’가 등장하게 됩니다. 라투르는 위의 시도들이 그저 과거를 탕진하고 단절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죠. 이는 시간이 근대적으로 경과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포기했을 때, 시간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환, 혹은 타락, 몰락, 혹은 불안정성, 회귀와 연속적인 현존... 이런 방식으로 말이죠. 라투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간결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시도로 혁명을 하려 하고, 그것이 과거를 폐기하고 무화시킬수 있다고 믿지만, 결코 달성할 수 없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라투르는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전진도 후진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결코 전진하거나 후진 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시대들에 속하는 요소들을 활발히 분류했던 것 뿐이다. 우리에게 아직도 분류는 허용되어 있다. 시간들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분류에 의해서지 시간이 분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주의는 만인의 이름으로 소수의 대리자들에 의해 결정된 선택의 잠정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우리 시간에 속하는 요소들을 스스로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은 사람들이 획득하게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근대주의가 우리로부터 앗아간 이동의 자유-실제로 우리가 결코 한 번도 상실한 적이 없었던 자유-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수많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혁명을 반反하는 형식으로 가능하다고 말하죠. 혁명으로 인해 중간매체적 용어들이 생겼다면 이것으로 다시 반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존재적인 지위를 제공하고 자율성을 준다면 중간매체가 바로 매개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연과 사회의 두 극단을 계속 선회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이 매개자들은 모든 행위자들에게 옮겨가고 이는 모든 행위자들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3장의 끝에서 라투르는 자신 주장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자연만큼 실재하며 담론처럼 서사구조를 지니고 사회만큼 집합적인, 그리고 존재처럼 실존적인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들이 증식시킨 준대상들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한번 단지 우리가 결코 그렇게 존재하기를 존재하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어떤 것이 될 뿐이면서도, 준대상들을 추구할 이유가 충분히다. 우리는 바로 비근대인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29)


이렇게 3장이 끝이 났습니다. 어렵지만.. 어떻게든 읽히는 것 같아요. 다음 발제는 지원오빠입니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8. 19. 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