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에 대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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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디자인 주제는 "권태"다.  권태에 대한 디자인 이전에 권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그저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자료들밖에는 읽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권태에 대한 생각들

 근대 이전에는 권태라는 것이 그저 지루함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게으름으로 이어져 굉장히 죄악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성실치 못한 이유에서 죄악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 여러 방면에서 고민해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를 침착하지 않고 불안하며 권태로운 것으로 간주했다. 파스칼에게 세상의 다양한 오락과 영위, 심지어는 학문적인 열정까지도 사실 권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 권태, 허무를 느끼게 된다.

 권태가 사람을 '무'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질문을 가져온 것은 스스로의 감정과 현상에 몰두하는 낭만주의 시대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실존에 대해 연구한 하이데거에게 있어 권태는 분산된 일상적인 존재방식으로부터 철학적인 물음으로 현존재(존재물음의 대상)의 태도를 전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 하이데거에게 있어 일생이 권태를 회피하기 위한 시도들로 이루어진다는 파스칼의 말은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권태는 단순히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에 의해 권태롭게 된다', '권태로워 무언가의 곁에 있다', '아무튼 그냥 권태롭다'라는 말로 권태가 표면적으로 나타게 되면, 하이데거는 이 표면부터 깊은 층으로까지 고찰을 진전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권태는 하이에거에게 존재물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하이데거가 이런 일상에 매몰된 현존재를 흔들어 일깨우고 "그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그 자신 앞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에 탁월한 정동은 권태가 아니라 "불안"이라고 말했다. 스스로에게 매몰되는 것은 권태로 인해, 그리고 그 안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안이었다는 말이다. 권태와 불안은 또 어떤 연관이 있을까? )


하이데거는 독일어로 권태가 말뜻 그대로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바, '이 사람은 긴 시간을 지닌다'라는 독일어 표현이 '그는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대규모의 산업화가 석권하여 인간이 고향을 상실하고 있는 시대에 권태를 지키는 것에서 다시 고향과의 이어짐을 회복할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일상의 존재방식으로부터 철학적인 물음에로의 전환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라고 하여 종래에 하이데거와 관련해서는 오로지 불안이 강조되어 왔지만, 30년경 이후의 하이데거 사유에서는 오히려 권태라는 계기가 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받아 마땅할 것이다. -다카다 다마키


 그러나 하이데거가 권태가 고향과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별로 통용되지 않는 감수성(하이데거는 감정을 단순한 감수성이 아닌 것으로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 시대에는 고향이란 것이 어느정도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향수로 권태를 이겨낸다고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결론이 어떻든, 하이데거로 인해 권태는 더이상 게으름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권태가 느껴짐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존재물음과 '무'의 만남으로 인한 존재이유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자기의 존재를 무거운 짐으로 느끼는 권태감이나 나날의 업무에 종사하는 중에 때때로 닥쳐오는 혐오 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어쩌면 권태는 근대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도시에서 살아온 세대에게 향수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근대의 권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피에르 쌍소는 권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권태에는 고상한 권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권태라는 것이 있다. 그런 권태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무한성의 시선에 비추어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의식하고서 모든 일상생활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 느끼는 권태이다. 이런 권태에 빠지게 되면 두려움과 허무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극히 초라하고 미미하게 존재하는 것과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無) 사이의 거리는 심히 좁기 때문이다” 


 그리고 쌍소는 자신이 권하고 싶은 권태를 제시했다. 


그것은 아무런 할 일이 없거나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을 잠시 뒤로 밀쳐놓을 수 있을 때, 느긋한 행복감에 젖어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러운 하품을 해댈 수 있는 그런 권태이다. 때때로 그런 권태에 빠져들 수만 있다면, 당신은 하나도 급할 것 없다는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하다? 쌍소가 권하는 권태는 오히려 과거의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진 권태와 비슷해보인다. 이는 하이데거가 권태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존재물음에 대해 고민했던 것과는 아주 멀어보인다. 심지어는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더이상 게으름은 중세처럼 죄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권태가 바로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의식하고 모든 일상생활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와서 그런 것인지 쌍소의 말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명쾌하게 느껴진다. 쌍소는 사람들이 그저 "권태의 외양"만 갖게 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살아가는 방식이 권태에 뿌리박고 있을 경우엔 잘못된 길로 들어설 위험이 있다. 나는 당신이 단지 권태의 외양만 갖게 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권태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 둥지를 틀어야 한다. 우리를 가두어놓는 온갖 것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며 하품하는 것, 그보다 더 건강에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거만함, 안락함, 사회적 신분 등에다 우리 인간들이 부여했던 가치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쌍소는 형이상학적인 권태가 바로 권태의 외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필요한 권태. 권태의 내양? 세상이 내리는 가치판단에 대해 지루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파고들어 허무를 가까이에 두는 것보단 현실의 가치판단에 지루함을 내보이는 것말이다. 저런 발췌문 만으로 어째서 그래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쌍소는 일상 속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사람이다. 일상의 느림, 그 안에서 가장 가치를 찾고 싶어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것에 반대했던게 아닐까. 쌍소가 권하는 권태라면 분명 색다른 일상의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긴하다.  아무튼 쌍소가 권하는 권태가 세상의 것들을 감내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느끼는 권태의 모습은 이상이 쓴 <권태>(1937)에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이상이 촌에서 지내며 썼던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망 전년인걸로 보아 아마 결핵 요양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글을 보면 이상이 그 곳에서 얼마나 시골의 일상을 싫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권태란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스스로에게 매몰되어 위험할 수 있다는 쌍소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권태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데크르트의 의견에 더 끌리는 것 같다. 일상의 재발견을 위한 것이든 당장 권태를 느끼고 있는 사람 에게 그 사실이 무엇이 중요할까? 당장 권태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그러했듯 내일이 마찬가지일 것이고 방한쪽이 우주로 느껴지는 것처럼 일생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건들, 사람과 일들에 파묻혀 만사가 소용없다는 허무를 느끼는 것. 그 감정에 당장 오늘 보내야하는 하루가 아득해져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것. 혹은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기위해 평생을 감당하는 것에 아무런 감흥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느껴지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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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갇힌 느낌을 주기 위해 권태에 대한 표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페턴으로 작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내가 권태의 이미지로 찾은 참조자료들이다. 




노트폴리오 일러스트레이터 수산시장님 링크



Three Taverns  by MUTI






Delicious Wallpaper by MUTI


색감참조


Txema Yeste // instagram @txemayeste

기타 여러 곤충 사진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10. 5.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