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겨울 다섯 번째 시간 <한홍구의 특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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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년 1월 23일

작성자: 차명식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 특강, 그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다루었던 ‘과거청산’, ‘간첩사건들’, ‘헌법과 민영화’ 등의 주제에 비해, 이번 주제는 상대적으로 더 여러분과 가까운 주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어떤 부분에서는 그랬던 것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좀 거리감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만약 좀 더 시간이 많았다면 찬찬히 풀어가면서 좀 더 여러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좀 아쉽기도 하네요.


  우선 첫 번째 이야기는 <괴담의 사회사 :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까지> 였습니다. 괴담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 괴담에 대해서 말해보았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연예인 X파일 같은 연예인 괴담부터 시작해서, ‘빨간 마스크’ 같은 무서운 도시 괴담, 또 몇 년 몇 월 몇 일에 지구가 망한다더라 하는 종말론까지 여러 괴담들이 나왔었지요. 하지만 한홍구 교수가 이 파트에서 다루고 있는 괴담은 그것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합니다. ‘국가’와 ‘대중’ 사이에 나오는 괴담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금강산 댐’ 괴담, 국정원이 만들어낸 특정 정치인을 공격하기 위한 루머들, 그 외에도 수많은 정부발 괴담들. 또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괴담들도 있지요. 광우병에 대한 공포로 빚어진 광우병에 대한 과장들, 유병언과 세월호에 얽힌 이야기들 등등.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실제로 드러나기도 했고요. 


  이러한 괴담들에 대해 한홍구 교수는 결국 대중이 만들어내는 괴담이란 사회적 병폐와 잘못된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괴담에 대하여 보다 부드럽게 접근하면서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 괴담이라는 것이 꼭 정부 대 대중의 구도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고, 연예인 같은 특정 개인을 타깃으로 하여 ‘관심 받고 싶어서’ 같은 아주 불순한 동기에서 나오는 괴담들도 있으며, SNS 서비스의 발달로 개인이 만들어내는 괴담도 아주 강한 파급력을 갖게 되었으므로 한홍구 교수와 같은 태도가 꼭 옳을까는 의문이 듭니다.


  다음, 두 번째 이야기는 <경찰 폭력의 역사 :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인데요. 여기서 우리는 ‘합법적 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합법적 폭력’이란, 국민이 국가에 허락한 권리입니다. 국가에게 무력을 사용할 자격을 주는 대신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혼란에서 국민을 지켜달라 부탁하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군대와 경찰로, 군대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한 합법적 폭력이고, 경찰은 내부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합법적 폭력인 겁니다.


  이 중 경찰, 즉 내부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합법적 폭력’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까딱하면 내부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자국민에게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경찰은 대개 정부의 뜻에 순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질서를 유지한다고 하면서 정권이 없애버리고 싶은 적들을 제거하는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영화 ‘변호인’, ‘1987’에서 보이는 독재정권 치하 경찰들의 악행도 그렇고,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낸 ‘전투경찰’도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전투경찰은 내부의 악폐습과 지난 몇 년 간의 촛불시위에서 보인 가혹한 시위 진압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다가 2013년에 폐지되었는데요. 웹툰 ‘노병가’나 ‘뷰군’ 같은 데서 그들의 고통이 다루어지기도 했지요.


  ‘합법적 폭력’이란 단어에서 ‘합법’이란 단어는 매우 묘한 느낌을 줍니다. 법에 부합한다, 즉 법대로 하는 폭력. 법이 허락하는 폭력. 자동적으로 이 합법적 폭력의 대상들, 거리의 시위자들,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같은 국민들을 이렇게 때려도 되나’ 하는 고민보다는 ‘저들은 법을 어긴 사람이고, 나는 법을 집행하는 거야. 이건 정의로운 행동이야’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되지요. 변호인과 1987의 경찰들이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굳게 믿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가능했던 겁니다. 사실은 법을 집행하는 게 아니라 독재 정권의 뜻을 집행하는 것이었는데도요.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하여 한홍구 교수는 경찰이 보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권에 아부하지 않는 중립적인 힘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요.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아마도 여러분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었을 부분인 <사교육 공화국, 읽어버린 교육을 찾아서>입니다. 여러분들 중 세 사람 정도를 빼고는 모두 학원에 다닌다고 했지요. 왜 우리나라 학생들은 이렇게 학원엘 많이 다니는 걸까요.


  예전에 ‘아이들’이라는 것은, 그냥 크기만 작은 어른들이었습니다. 영화나 책 같은 거 보면 시골 아이들은 다 일하잖아요. 농사 거들고, 소 데리고 풀 먹이고. 다 일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학교 안 보내고 농사일 돕게 하면 뭐가 됩니까? 법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도 다 이유가 있긴 있습니다. 유럽 쪽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을 돌려야 했는데 이때 아이들을 데려다가 아주 가혹하게 부려먹었습니다. 돈도 별로 주지 않으면서 아주 힘든 일만 시켰고 아이들이 매일같이 죽어나갔지요. 결국 이게 문제다, 하면서 조금씩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동’이 탄생합니다. 아직 다 못 자란 존재.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받고, 교육받고, 성장해야 하는 존재. 그리고 이런 아이들을 모아 보호하고 교육시키는 공간, 그게 바로 학교입니다. 이게 근대 학교의 탄생입니다.


  학교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데에 아주 최적화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 모르는 친구들 없죠? 운동장에서 줄맞추기를 하잖아요. 학교는 모든 게 줄 세우기죠. 출석번호부터 시작해서, 줄맞춰서 교실에 앉고, 줄맞춰서 수업 받고, 성적도 줄맞춰서 순서대로 쫙 나오고, 밥 먹을 때 줄서고, 체육 할 때 줄서고, 무슨 행사를 하건 다 줄 맞추고. 이렇게 줄을 맞춰놔야 ‘관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교실을 상상해보세요. 여러분은 다들 앞쪽에 선생님을 보게 자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옆이나 뒤를 보면 안 되죠. 딴짓하는 거니까. 계속 앞만 봐야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 딱 한 명만 보게 되어있습니다. 한편 선생님은, 앞자리에서 여러분 전부를 다 볼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누가 딴 짓 하거나 하면 금방 알 수 있도록요. 그래야 ‘관리’할 수 있으니까요.  


  사교육은, 이런 ‘줄세우기’ 시스템에서 조금이라도 더 앞줄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줄세우기를 하면 반드시 앞자리에 서는 사람과 뒷자리에 서는 사람이 생기니까요. 학교에서 앞자리에 서야 나중에 어른이 돼서 사회에 나가도 앞자리에 서고, 잘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니까요. 그걸 위해 돈을 써서 학원에 보내는데, 다들 학원에 보내니까 차이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더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더 돈을 많이 쓰고, 모두가 그렇게 경쟁하니까 돈이 점점 더 많이 나가고,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한홍구 교수는 이런 걸 막기 위해 사교육 시장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요. 사교육 시장을 공교육이 흡수하고, 무의미한 경쟁을 줄여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학생 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고 선생님 수도 정해져 있으니 지금 학원 선생님들이 다 학교 선생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돈을 내고 골라서 배울 수 있는 게 학원이니 아무래도 학교보다 더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도 있지요. 모르는 것 물어보면 다 대답해주고, 보충 공부도 해줍니다. 왜냐? 안 하면 학생이 그만둬버리니까요. 이건 아주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사교육 시장을 없앨 수 있을까요? 사교육 시장을 없애면, 또 다른 방식으로 앞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대학교 수시의 ‘자기소개서’를 빵빵하게 만들기 위한 각종 스펙 쌓기라던가? 이 또한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겠지요.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촛불, 몸에 밴 민주주의 역동성>....인데, 세 번째 이야기까지 하니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말았었지요. 결국 이 부분은 아주 짧게 말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지난 수십 년 간의 민주화 운동이 남긴 것이 바로 여러분이라고 했어요. 민주화 운동을 해서 독재자를 쫓아내도 또 다른 독재자가 나오고, 그런 일들의 반복에 때때로 아주 허무하기도 했지만 결국 여러분이 나왔다고요. 아주 작은 ‘독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몸에 민주주의 개념이 배여 있는 아이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민주주의에 대해 배우고 자라서, 스스로 거리로 나올 힘을 가진 아이들. 그것을 보면서 한홍구 교수는 ‘세상이 바뀌었다’라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은 앞으로 무얼 보고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를 보면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잖아요. 지금이야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나와서 ‘세상이 바뀌었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재인 대통령 이후 또 다른 독재자가 나온다면? 제 2, 제 3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여러분도 똑같이 허무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죠. 내가 그 때 거리에 나갔던 건 뭐였지? 세상이 바뀌긴 하나?  


  그 때 여러분도 세상은 바뀐다는, 나의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아마도,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삶의 이유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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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3. 11. 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