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인문학] '뉴욕열전' 발제 (1) - 뉴욕과 힙합의 탄생

송우현의 [힙합인문학]에서는 [랩인문학-장르 너머의 힙합] 수업의 강의안을 업로드 합니다. 힙합과 인문학을 엮어 다양한 질문들과 답을 모색해봅니다. 

 

뉴욕과 힙합의 탄생

 


 뉴욕을 가리키는 말이 몇 개 있다. ‘세계의 수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이자, 세계경제, 문화, 패션의 중심지여서 붙은 수식어이다. 실제로 미국의 4대 지상파 방송국의 본부가 모두 뉴욕에 있다고 하며,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타임스퀘어 같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렇게만 보면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떠올리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빈민촌이 따로 존재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한 도시이며, 세계적인 이민 도시이기도 해서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만큼 차별과 억압 또한 만연해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공부하는 ‘힙합’의 고향이라는 것도 납득이 될 것이다.
 [뉴욕열전]을 ‘힙합 인문학’ 커리큘럼에 포함시킨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뉴욕열전]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탄생을 바라보는 책이다. 어떤 억압과 저항이 있어왔는지, 그 속에서 어떤 꽃이 피었고 지금의 뉴욕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자가 직접적으로 힙합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은 매우 적었고, 나는 간접적으로 힙합과 연관있는 도시와 사건들을 통해 유추해나가며 읽었다. 이번 시간에는 그 내용의 일부로, 뉴욕의 탄생비화와 힙합의 탄생을 이야기해볼 것이다.

1. 뉴욕이전의, 미국이라는 영토
 미국의 지도를 보면, 다른 나라들과의 차이점이 눈에 띈다. 자치구의 경계가 마치 칼로 대고 자른 듯이 반듯하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정말 칼로 대고 자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콜롬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대륙이라는 말은 철저히 유럽인들의 관점일 뿐, 현 미국의 땅에서는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아오고 있었다. 뉴욕의 맨하튼 땅은 1624년에, 네덜란드의 식민지 감독관인 피터 미뉴이가 레파네족의 추장으로부터 ‘사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아주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서로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여오던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은 당시 원주민들에겐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런 ‘교환’의 결과로 개척자들은 원주민 사이의 교류, 문화의 땅이었던 맨하튼을 단순히 방치되어있던 야생의 땅으로 규정하여, 개간(=파괴)하고, 자신들의 거주지로 만들어 갔다. 원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이었고, 그들에겐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거처’(=방랑=교류)한다고 표현했으며, ‘명문화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 지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체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개척자들은 그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원주민들의 문명을 짓밟고, 식민지화해갔다.

 

미국 지도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수성은 최초의 식민지화를 위해 저지른 폭력을 지울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지금까지도 지배계급들은 그때그때 폭력과 법과 돈을 노골적이면서도 교묘하게 사용하면서 권력을 확장해왔고, 그들과 피지배자 계급들(주로 유색인종들로 구성된)간의 계급투쟁은 여전하다.


2. 북미 최대의 이민도시
 뉴욕은 세계적인 이민도시이다. 그 계보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17세기 초 이후부터 네덜란드계 및 영국계가 지배한 식민지가 형성되었고, 19세기에는 몇 백만에 다다르는 아일랜드계, 독일계 등 유렵 이민자들이 몰려왔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카리브,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계의 다양한 민족들이 들어왔다. 20세기 이후로는 특히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미국인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이러한 이민의 파도는 그때마다 도시의 사회적/물리적 공간을 변화시켰다. 새롭게 들어온 이민자들은 값 싼 노동력으로 충당되었고, 그들 보다 먼저 살고 있던 집주인들의 돈벌이 대상이 되었다. 대개의 경우, 후속 이민자들은 좁고 설비도 좋지 않은 긴 집을 빽빽이 채우며 ‘슬럼’을 형성했다. 특히 현재의 이스트빌리지, 로어이스트사이드, 리틀 이탈리, 차이나타운등의 지역이 하층 이민자들의 거주 공간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1805년대 흑인들은 위와 같은 슬럼에 분포하며 살았지만, 폭력적인 인종차별을 겪고 점차 그 곳에서 추방되었다. 대부분 하층 노동자로 구성된 아일랜드계 주민들은 점차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기 시작한 흑인들 때문에 일자리 위협을 느꼈고, 이로 인해 흑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1863년에 발생한 ‘징병봉기’는 처음에 300달러를 지불하면 남북전쟁에서의 병역징용이 면제된다는 식의 정책에 큰 반발로 일어났지만, 이상하게도 이 폭동의 표적엔 흑인들도 포함되었다. 나중엔 흑인들에 대한 집단린치나 흑인들의 집에 방화를 하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그 후, 대다수의 흑인들은 점차 업타운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도 심한 인종차별을 당했다. 결국 1904년경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 맨하튼의 최북부와 그 너머로까지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할렘’과 힙합이 탄생한 ‘브롱스’이다.

당시 브롱크스의 일상


3. 불타는 곳에도 꽃이 핀다
 맨하튼 북부에 위치한 할렘과 그 바로 위에 있는 브롱스는 뉴욕을 대표하는 슬럼가였고, 특히 인종차별에 고통 받던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세계2차대전 이후로는 더 많은 빈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뉴욕의 ‘도시 재개발 열풍’이 불던 시기이기도 하다. 뉴욕시의 관료와 은행, 개발계획자가 합을 맞추어 이민자들이 살 수 있는 지역을 표적으로 ‘황폐한 지역은 곧 개발 가능한 지역’이라고 지정하였다. 이로인해 땅값을 올려 주민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 올리는 폭력이 확대/강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브롱스를 가로지르는 ‘크로스 브롱스 고속도로 프로젝트’는 흑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민자들의 문화를 탈취하고, 파괴하였다.

 이후에도 뉴욕시의 재개발 열풍은 끊길 줄 몰랐지만, 다운타운의 주민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가 확장되어 다른 지역들까지 가세하여 결국 미친 듯이 재개발을 감행하던 뉴욕 시장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황폐해진 브롱스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파괴될 때로 파괴되어 버린 공동체에선, 살기 위해 갱스터가 되어 약탈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다. 뉴욕 주민들에겐 무조건 피해 가야할 곳 1순위로 뽑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브롱스에서도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신디 켐벨’이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새학기를 맞아 새 옷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고민 끝에 동네 오락실을 빌려 생일파티를 열기로 했고, 입장료를 받아 돈을 모으기로 했다. 부모님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부탁했고, 오빠에겐 파티의 DJ를 맡겨 음악을 부탁한다.

 

더블 턴테이블의 창시자, DJ Kool Herc. 아직도 정정하시다.


 켐벨의 오빠였던 쿨 허크(클라이브 켐벨)은 고민한다. 당시에 음악을 틀려면 LP판과 턴테이블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곡이 끝나고 LP판을 바꾸는 동안 흥이 깨질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턴테이블 두 개를 동시에 연결하여 흥을 유지할 수 있는 전주(Break beat)부분을 무한 반복으로 틀었다. 이것이 지금의 DJ들에게 익숙한 ‘더블 턴테이블’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나이 16때였다. 이 영향력은 엄청났다. DJ들 뿐만 아니라 전주, ‘Break beat’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사람들을 ‘B-Boy’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노래 중간 중간 흥을 돋우기 위해 툭툭 말들을 던져대던 MC들은 지금의 래퍼가 되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꽃이 핀다. 특히 젊은 세대로부터 말이다.
[뉴욕열전] 中


 그렇게 힙합문화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고, 암울했던 흑인 빈민가들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브롱스 바로 옆에 있던 할렘의 ‘슈가힐’이라는 동네에서 활동하던 ‘슈가힐 갱’이라는 갱스터집단은 폭력성을 거두고, 예술성을 띈 음악집단으로 거듭난다. 이들이 만든 ‘Rapper’s delight’이라는 곡은 힙합 곡으로서는 최초로 대히트하며 미국 전역의 큰 힙합 유행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켐벨의 파티에 있던 ‘그랜드 마스터 플래시’는 ‘The message’라는 곡을 발표한다. 이는 할렘가에 암울한 모습과 그 곳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담아내어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는 오늘날 ‘컨셔스 힙합’의 기반이 되기도 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가사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힙합 그 자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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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10. 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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