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P] 비평의 신(1) - 공포영화 '미드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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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프로젝트(화요P)란? 길드다의 멤버들이 각자 고민하고 있는 지점,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각자 달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업로드 합니다. 누군가는 텍스트랩 수업을 위한 강의안을 쓰고, 누군가는 길드다 이슈를 발전시키기 위한 글을 쓰고, 또 누군가는 넘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훈련을 위한 글을 씁니다. 이를 위해 멤버들은 매주 모여 글쓰기 피드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송우현은 문화 비평에 도전합니다. 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자신감에 차 있지만 피드백을 받을때마다 무너집니다.

 

비평의 新 1편

 

공포영화 미드소마

 

 

 

 [미드소마]는 올해 여름에 개봉한 아리에스터 감독의 공포영화이다. 오컬트 매니아이자 복선을 쉴 새 없이 배치하는 걸로 유명한 아리에스터 감독은 전작 [유전]으로 화려한 데뷔를 마쳤다. 이번 영화 미드소마에서도 수많은 오컬트요소와 복선을 깔아놓았는데 호러영화는 밤을 무대로 펼쳐진다는 인식을 뒤집어 대낮의 공포를 그리고 있는 게 포인트다. 소수민족 마을이라는 특이한 소재인데다가, 공포영화라고 하기엔 관객을 깜짝 놀래키는 장면이 거의 없고(다소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은 많다) 수많은 복선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결코 보기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인터넷 리뷰를 보면 대부분 ‘무섭지도 않고 기분만 나쁜 영화’라거나 영화에 깔린 복선이나 결말에 집중하여 해석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이 영화를 ‘슬픔의 빠진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영화’라고 해석하고 이야기한다.

확실히 [미드소마]는 오컬트 공포영화의 노선을 차용하면서, 소수민족의 전통을 미지에 대한 공포요소로써 사용하고 있다. 사이비집단의 의식에 주인공 일행이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사이비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진단받은 누군가가 사이비집단을 통해 정신적 불안을 떨쳐내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미드소마 속 기괴한 전통

아름다운 스웨덴 산속에서 살고 있는 한 소수민족, 호르가 일족은 폐쇄적인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주인공인 대니와 친구들은 호르가 출신의 친구인 펠레의 초대로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미드소마’라는 이름의 하지제가 9일 동안 열린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안과 조쉬는 대학 논문거리를 찾으려는 목적이 강했고, 마크는 성적인 욕망을 해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합류했다. 크리스티안의 애인이자 주인공인 대니는 남자친구를 따라서 오게 되었다. 호르가 사람들은 외부인들을 환영해주는 의미로 다 함께 술을 한잔 들이키는 것으로 축제의 막을 올렸다.

축제가 시작된 지 얼마 안지나,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한 노부부를 중심으로 한 식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근처에 한 절벽으로 향했다. 노부부는 그 절벽 위에서 특이한 의식을 행하나 싶더니, 이내 아내가 먼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던 마을에서 벌어지는 첫 번째 공포이다. 아내는 절벽 아래에 있는 큰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그대로 즉사한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남편이 몸을 던지는데, 살짝 멈칫하는 바람에 다리부터 떨어졌다. 덕분에 다리만 부러지고 목숨은 건진 남편에게 마을사람들은 야유인지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울부짖는다. 곧이어 집행관이 큰 나무망치로 남편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렇게 모두 완전히 숨을 거두게 되는 것으로 의식은 끝이 났다.

말로만 들어도 끔찍한 이 장면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절벽에 오르는 노부부는 정말로 몸을 던졌고, 떨어진 노부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대니 일행은 큰 충격에 휩싸였고, 다른 외부인(영국인 커플)들은 당장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제사장으로 보이는 호르가의 여인이 흥분한 그들을 붙잡고 설명한다.

 

저들은 인생 주기의 끝에 다다른 사람들이고, 삶의 순환을 위해 기쁘게 몸을 던진 것이에요. 곧 태어날 아기가 저들의 이름을 물려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요. 저도 제 차례가 된다면 주저 없이 기쁜 마음으로 몸을 던질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이 와중에, 저 대사를 듣자 나는 호르가의 전통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르가 사람들은 삶을 사계절로 나누는데 0~18세까지는 아이(봄), 18세에서 36세까지는 순례자(여름), 36세~54세까지는 일꾼(가을), 54세부터 72세까지는 스승(겨울)으로 나눈다고 한다. 이 의식은 72세가 된 노인들에게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삶을 포기하면서, 선물한다.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을 스스로 행하면서 새로운 생명에게 삶을 선물하는 신성한 행위인 것이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 일행과 영국인 커플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그 자리를 급히 떠났다.

 

삶은 원이에요. 순환하는 거죠. ...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죽는 게 아니라 망가지기 전에 생명을 주는 거예요. 선의의 표시(Gesture)로요. 필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영혼을 더럽히는 거니까요.” - 호르가 제사장의 대사 

 

 

환자였던 대니, 메이퀸이 되다

재밌는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드소마]의 주인공인 대니는 환자로 묘사된다. 초반부부터 심한 조울증을 겪고 있는 동생을 신경 쓰느라 본인까지 조울증, 우울증 등을 겪게 되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달래주는 것에 지친 크리스티안과 권태기가 온지 꽤 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쉽사리 헤어지자는 말도, 적극적으로 대니에게 의지가 되어주지도 못한다. 결국 아무리 약을 먹어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던 날, 대니의 동생은 부모님이 주무시는 침실과 자신의 입에 가스를 주입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날 이후로 대니는 트라우마에 갇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던 대니 앞에 떨어진 게 호르가 마을의 노부부였다. 트라우마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온 여행에서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얻게 된 것이다. 떨어진 노부부와 부모님이 겹쳐 보이면서 더욱 괴로워했다. 그런 대니를 위로한건 크리스티안이 아닌 호르가 출신인 그의 친구 펠레였다.

 

나도 너의 괴로움을 알아. 어렸을 적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지.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나를 받아주었고 정말 큰 의지가 되었지. 진짜 가족이 되어주었어. 너도 그 기회가 주어진 거야. ... 너의 남자친구는 정말 너에게 의지가 되니?”

 

얼핏 보면 로맨스 같기도 하고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이 대사는 대니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을사람들의 큰 환영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던 대니는 이 사건 이후로 마을 사람들을 더 이해해보기로 한다.

친구들이 실종되고 마을의 성경이 없어지는 등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축제는 계속됐다. 조금 이상해 보이는 의식들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대니에게 진심으로 다가갔고, 덕분에 대니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게 된다. 대니는 전통 춤으로 메이퀸(5월의 여왕)을 가리는 행사에 참여해 결국 메이퀸으로 선발된다. 그 과정에서 대니는 언어가 다름에도 함께 춤을 추면서 서로의 말을 알아듣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함께 호흡하고, 진심으로 교감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만한 대목이었다. 그렇게 대니는 점점 활력을 찾다가 다시 절망에 빠지게 된다. 크리스티안의 바람을 목격한 것이다. 이는 호르가의 근친상간을 막기 위한 외부인과의 잠자리문화였고, 크리스티안이 동의가 있었다. 덕분에 대니에겐 마지막 신뢰가 무너지고 남아있던 과거의 잔해가 솟구친다. 하지만 이 역시 호르가 사람들 함께 호흡하고 오열해주면서 극복해내었고, 대니는 점점 호르가의 일원이 되어간다. 축제 4일째 되던 날에는 호혜의 신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진행되는데, 메이퀸인 대니가 마지막 제물을 선택하게 된다. 대니는 제물로 크리스티안을 선택하고, 모두 불태우면서 자신의 과거와의 깨끗한 작별을 고한다. 불타고 있는 움집과 절규인지 뭔지 모를 마을사람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그녀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꽃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현대인들이 보기엔 아주 잔인하고 기괴한 풍습을 가진 사이비종교 집단이었기에, 애인까지 제물로 바치면서 호르가사람들과 함께할 만큼 대니의 상황이 비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애인과 의학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던 대니를 구원하고, 함께 살아갈 동력을 제공한 것이 호르가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이비집단인 호르가가 대니에겐 훌륭한 의사이자 동반자가 되어 준 셈이다. 무관심한 크리스티안 대신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던 대니를 위로하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게 도와주었으며, 결국엔 대니가 갇혀있던 과거를 깨끗이 불태우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록 비인도적이지만 호르가의 의식들 자체가 대니를 위한, 대니라는 인간의 균형을 되찾게 해준 하나의 연극이자 처방이었던 게 아닐까?

 

 

죽음이 없는 세계

현대의학은 비약적으로 발달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덕분에 인간의 평균 수명자체는 늘어났지만 그러기 위해 우린 의사와 병원에게 우리의 몸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린 늙으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요양원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데, 그곳에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정신을 잃으면 기다란 관을 입에 넣어 삶을 유지하고, 암세포가 생기면 다른 세포까지 함께 몰살하면서까지 삶을 유지한다. 정확히는 의사와 병원이 강제로 수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건강’은 고통의 제거, 병에 대한 처방이라는 의미로 재정의 되었는데, 이러한 생각 자체가 굉장히 최근에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의 의사가 하는 일은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픈 이유와 상황을 자유롭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 사람이 교수형 당하는 것을 본 뒤로 제 눈이 말을 듣지 않아요.” 라거나 “부모님과 동생이 죽은 뒤로 몸이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 없어요.” 같이 말이다. 당시 의사들은 이런 말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우주적 요소를 연결시켜 처방을 내려주었다. 실제로 식물을 인간의 신체 기관과 연관지어 분류하는 도표는 중세 이후 서양 의학 교과서에도 발견 된다. 문제가 있는 기관과 연관 있는 식물을 처방한다거나, 한 기관의 혈액을 차거나 따뜻하게 하는 행위를 추천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마치 동양의 한의학과 유사한 형태의 의술이 실제로 중세 이후까지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비과학적이라고? 물론이다. 1800년대까지의 의학사에 관한 책들을 살펴보면 당뇨가 명백한 환자에게 얼마나 엉뚱한 처방을 내렸는지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당뇨’라는 병명 자체가 없었고, 의사들 또한 당뇨라는 객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신체의 기능이 훼손된 부분을 고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신체의 균형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 것이다.

호르가의 전통 또한 잔인하고 기괴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잔인함과 기괴함을 논한다면 현대사회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어버린 대니에겐 현대의학도 애인도 전혀 의지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비인도적이고 말도 안 되는 행위이지만, 단순히 사이비라고 내칠게 아니라 대니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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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12. 17.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