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 강학원 시즌1, 미디어와 신체’ 에세이 및 공산품 발표회: 세션3 리뷰

<‘길드다 강학원 시즌1, 미디어와 신체’ 에세이 및 공산품 발표회: 세션3 리뷰>

글쓴이 : 김지원(길드다)

 

 

지난주 일요일, ‘길드다 강학원 시즌1, 미디어와 신체’의 12주간의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지난해 미학세미나를 진행할 때보다 어렵고 빡빡한 텍스트들을 읽으며 구성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들 힘들어했습니다. 첫 시즌의 반장으로 12주를 참여하면서 에세이와 공산품 발표가 다가오자 걱정도 부담도 많이 되었습니다. 에세이와 공산품은 어쨌든 텍스트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거기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세미나에서 충분히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12편의 에세이도, 3편의 공산품도(반장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모두 아주 좋았습니다. 어렵고 빡빡한 중에도 각자 고민들을 잡아내고 진전시켜서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다들 시간과 마음을 내어 세미나에, 피드백에 참여해 준 덕이겠지요. 발표 날은 정말이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의 기쁨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날이었습니다.

 

 

저는 장장 8시간의 발표 중 마지막 세션인 현민, 준범, 영, 명식의 에세이와 규혜의 연극에 대한 리뷰를 남깁니다.

 

 

 

먼저, 현민은 자신의 동생과 관련한 에세이를 썼습니다. 동생이 가진 어떤 문제들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현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담한 어투로 풀어냈습니다. 많이 사적인 이야기이고, 현민 자신도 많이 조심하고 있었기에 아쉽지만 그 이야기를 후기에 전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현민이 우리가 함께 읽은 책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에서 나오는 ‘페르세우스 우화’에 자신의 이야기를 비유했다는 것은 언급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우화는 얼굴을 보면 돌이 되어버리는 메두사와 페르세우스의 전투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메두사를 직접 볼 수 없었던 페르세우스는 방패에 비추어 메두사를 바라봅니다. 위베르만은 우화를 통해 끔찍한 어떤 대상, 사건들에 대하여 ‘이미지들’이 바로 그러한 방패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비유합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쇼아)라는 우리 모두를 돌로 굳게 만들어 버리는 그 사건에 대하여, 그곳에서 나온 4장의 사진-이미지가 그것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고 말합니다. 현민이 쓰듯, “이미지는 공포를 직면할 수 있게 해”줍니다. 현민은 이러한 ‘이미지’의 개념을 조금 확장해, 자신이 동생과 겪은 어떤 사건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상)로 기능하며 동생을,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는 어떤 계기가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망각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게 만드는 어떤 사건과 기억. ‘이미지’라는 개념의 적확한 사용과는 어쩌면 별개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계기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지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준범은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에서 위베르만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여러 가지 ‘사이’들에 대한 에세이를 썼습니다. 이미지는 한편으로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여겨지고, 다른 한편으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이 ‘실재 전체’를 보여준다고 누군가는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이 ‘판타지(환영)’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베르만은 이미지가 “전체도, 무無도 아닌 그 사이, ‘갈라진 틈-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상상을 통해 채워 나가야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확정적으로 단정하거나 정의내리는 것을 유보해야 함을 말합니다. “대략 무슨 말인지 느낌은 오지만, 도대체 사이라는 것이 뭐지?”라는, 세미나에서 반복된 어떤 질문에 대해 준범은 답하고자 했습니다.

 

준범은 이를 ‘이미지에 대한 윤리’라고 말합니다. “실재를 재현하지만 그것이 실재의 전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하는 것이 실재를 알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준범은 그동안 자신이 이미지(특히 영화-이미지)에 가졌던 어떤 이분법적 편견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이’라는 수행적 경험-윤리를 요구하는 이 개념을 수용하는 것으로 에세이를 마무리합니다. 아마도 이 능동적 수용은, 앞으로 준범에게 필연적으로 어떤 실천을 요구하게 되지 않을까요?

 

인상적이었던 것을 조금 덧붙이자면 준범이 속한 ‘삼색불광파’에서 아웃풋을 ‘논문’(물론 학계의 논문과는 또 다른 형식입니다만)이라는 형식으로 만드는 데에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준범이 정리를 잘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텍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풀기 위해 서두에서 사용한 영화의 예시(재현물-판타지 논쟁)에 대해서는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아주 명징한 글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영이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에세이를 썼습니다. 영이는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계해온 방식들에 대해 고민합니다. 우리 사회가 오래도록 죽음을 대해온 태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수정할 수 없는 태제”처럼 취급했던 우리의 모습들. 그것은 한편으로 이해할만한 모습들이지만, 다른 한편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물음들에 답변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준범의 에세이에서도 언급되었던 이분법이 다시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답변을 거부하며 침잠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취급하는 것. 그래서 영이는 위베르만의 ‘틈’, ‘사이’, 혹은 ‘상상’을, 달리 ‘질문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알기 위해서는 상상해야 하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물음표를 찍어내야 한다.”

 

상상이라는 것은 때로 참으로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어떨 땐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이가 이 죽음을 둘러싸고 뱉은 질문들, 알고자 던진 질문들의 구체성은 ‘상상’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죽음이라는 추상, 친구 혹은 친구의 부모라는 대상을 거쳐 그것과 관계 맺는 자기 자신, 우리에게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영이 자신을 포함한]이 우리는 그 애를 ‘전체’의 정지된 추상화로만 보지 않을 방법을 서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그 애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조각들의 잔여와 틈새를 어떻게 우리의 맥락으로 끌고 올 것인지 서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아무리 불안정하고, 무능력하게 느껴지고, 금세 상상될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영이의 글은 에세이 발표의 마지막 시간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단순히 죽음, 이별과 같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오는 슬픔 때문이기보다는, 영이의 질문하려는 태도와 그것을 해석하고 안간힘을 써서 붙잡아보려는 시도들에 대한 격한 공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 사실 슬프다기보다는 기뻤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면서 배우는 모든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고, 우리 자신과 주변을,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사건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뻤습니다.

 

 

네 번째로 명식은 베트남 전쟁과 코로나19를 우리가 이번 시즌 공부한 미디어의 차원에서 비교하는 에세이를 썼습니다. 1964년과 2019년의 미디어, 이미지, 진실, 공론장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60년대의 칼라TV는 그 자체로 공론장을 형성했고,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서 진실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길거리로 뛰쳐나와 전쟁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역시 전쟁처럼 보이는 2019년의 코로나19 시대의 미디어는 거짓정보와 가짜뉴스로 가득차고, 더 이상 누구도 객관적 진실을 믿지 않고, 이미지는 각자의 편향된 진실을 확증적으로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사유화된 공론장을 만들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명식은 비관적이어 보이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출구를 만들어야 할지 질문을 던집니다. “명심해야 할 전제가 있다면 우리는 1960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매체, 이미지, 진실, 공론장에 있어 한 번 변화한 인식과 작동방식은 다시는 이전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이미지의 언어와 정동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불안에 젖어 분열된 세계를 마주한다. 바로 그곳이 출발점이다.” 명식은 슈타이얼, 키틀러, 위베르만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하고, 상상하고, 성찰하라’

 

 

마지막으로 장장 8시간 발표의 피날레를 장식한 규혜의 연극과 연극에 대한 GV가 있었습니다. 세 분의 배우와 한 분의 촬영감독, 음악감독(우현), 그래픽(영)…. 등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분들이 함께 만든 연극이었어요. 규혜에 따르면 이 연극은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의 한 파트인 「실 잣는 여인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슈타이얼은 동명의 벨라스케스 작 회화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실재와 연출, 기록과 픽션이 뒤섞이며 새롭게 구성되는 진실이 다큐멘터리즘에도 동일하게 작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규혜는 아마도 이 구성을 차용해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에서 다루고 있는 쇼아를 현재의 시공간과 결합해 다르게 느끼고 해석할 수 있도록 연극을 구성한 듯합니다. 길쌈방을 무대로 뒤편에는 흰 가죽에 쇼아로부터 나온 4장의 사진이 프로젝션으로 돌아가고, 그 앞에는 실제로 길쌈방에서 사용되는 재봉틀이 돌아갑니다. 배우들은 재봉틀에 앉아 일을 하며 질문을 던지고 추측합니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 물건들은 어디로 가는지, 가기는 하는 것인지. 자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유일하지만 모호한 대답은 “살아”, 그리고 “살아남아”입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나 끝내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만들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한 사람씩 사라지는지 답변되지 못한 채 연극은 끝납니다.

 

 

수수께끼들. 전면의 여인들, 후면의 양탄자와 이를 감상하는 또 다른 여인들. 17세기에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은 그가 죽은 뒤 100년 동안이나 여러 다른 풍속화와 마찬가지의 그림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그림의 오묘함에 매료된 도상해석학의 창시자 아비 바르부르크에 의해 작품 후면 양탄자에 인용된 ‘에우로파의 납치’와 작품 전면 물레를 돌리는 여인들 사이의 상관관계(아라크네 우화!)가 밝혀지며 작품 해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이후 20세기 중~후반까지 미술가, 미술사가들의 해석과 논쟁이 지속되며 이 그림은 매우 다양한 해석 속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장면들의 레이어와 몽타주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자극은 그 자체로 상상과 사유를 추동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규혜의 연극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쇼아의 존더코만도, 혹은 이름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묻도록 했습니다. 처음엔 이 병치가 약간의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특별한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내가, 그것을 묻는 것이 적합한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하라던 위베르만을 따라, 규혜가 제시해준 힌트, 연극 제목인 ‘돌리는 시간’에서 부족하지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 해왔던 이 모든 비극과 가능성, 양가성의 장 속에서 우리가 돌릴 수 있는 것을 돌리는 것. 시간이 흐르도록 하는 것. 어떤 결과가 따를지 알 수 없음에도 질문하는 것.

 

 

길드다 강학원은 7월 5일부터 시즌2,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로 다시 질문을 이어갑니다. 너무 좋은 에세이들과 작품들 덕에 짧은 2주간의 휴식시간에도 다음 세미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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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6. 2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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