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야금야금 미학 알아가기 3편 - 앞으로의 입장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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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길위기금에서 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동은의 프로젝트: 야금야금 미학 알아가기 - 3편

 

        앞으로의 입장발표문

 

 

 

 

   올해부터 나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길드에 나와 공간을 지키고 있다. 물론 내가 길드다 공간을 지키게 된 경위는 (대부분 예상할 수 있는)여러 층위가 있지만 나의 신뢰 회복과 생계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일이다. 이전엔 함께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길쌈방의 작업일이 아니면 별로 사람을 볼 수 없었던 공간에서 자주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관리자 말고도 얼마 전 길드다 공간에도 변화가 있었다. 며칠 동안 길드원들이 주차장을 가로막고 복작복작 모여 작업을 했다. 길드다 친구들 뿐 아니라 길쌈방 사람들과 파지사유 메니저도 함께 했다. 그 나무들은 틈서가의 진열대가 되었고 흰 나무벽이 만들어 졌으며, 길드다에는 좀 더 많은 수납공간과 가구가 생겼다. 길드다 공간은 이제부터 <길드다 스토어>가 되어서 제품제작 프로젝트였던 공산품팀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주변과 결합해 물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려고 한다.

   공간이 변한 것, 출근 도장을 찍게 된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곤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공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를 느끼고 있다. 어쨌든 길드다 공간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이 공간을 자주 이용하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을 사용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과 공간을 관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엄연히 다른 일이다. 평소에도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 내게 공간을 관리한다는 말은 낯설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은 내게 공간을 구성해가는 능력이 없다는 말과 같다.

 

 

 

복작복작 칠하는 중. 이 때의 경험은 고은이의 글에도 나왔다.  고은이는 이 경험으로 무엇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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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해야 하는 것은 공간 관리에 대한 내 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보릿고개 글을 쓰면서 나는 문자와 도상의 연결 과정에서 시도한 재현적인 표현과 취향을 누리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을 했다. 그 글들은 내가 해온 작업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보릿고개가 끝나고 다시 개인프로젝트를 준비해야하는 시점에서 많은 고민이 인다. <길드다 스토어>는 팔 수 있는 상품은 얼마 없으면서 진열대부터 만든 이상한 곳이다. 상품에 맞춰 진열대를 맞춘 것도 아니기에 어쩌면 진열대에 맞춰 상품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오픈을 위해서는 물품을 제작해야하는데 예술의 상품화를 비판했으면서 다시 예술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 글에 무조건 따를 이유도 없지만 이미 상품만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똑같이 막막하다. 이렇게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이 오면 일단 가지치기처럼 주어진 여건들을 하나씩 부정해가며 판단하게 된다. 나는 상품을 목적으로 두고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고, 신박한 표현방식을 찾아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다. 이대로라면 아마도 또 다시 최소한의 의무감에 이끌려서 무언가라도 시작하게 될 것이다.차라리 뭐라도 하는 게 나은 걸까? 얼마간은, 최소한 이제까지는 괜찮았지만 더 이상 등 떠밀리고 있단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 누구도 내 등을 떠밀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것 역시 나에게 능력이 없다는 말과 같다. 무엇을 할 것인지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 알아서 등 떠밀고 있는 내게 가장 취약한 부분. 그동안 이런 문제로 여러 번 여러 사람의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기에 잘 알고 있다. 심지어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다. 가지치기가 아닌 방식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거다. 그러나 이런 것도 어디까지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고민인 것 같다. 나는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그게 내게 쉬웠다면 당연하게도 입장을 밝히기 위한 글을 쓰지도 않았다.

 

 

 

정말 능력이 없는 걸까?

   그런데 이번에 내가 공간 관리에 있어 느끼는 의무감은 그동안 가져왔던 것과는 좀 다르게 다가왔다. 여전히 하면 좋은 거니까, 나한테 필요하니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간을 구성한다라고 할 때 아무런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무언가를 구성하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무언가를 만들 때, 그것을 구성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공간관리에 있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이 다른 영역, 예를 들면 길드다 공간을 관리하는 것으로 확장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확장되지 않는 걸까? 최소한 내가 이 공간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그렇다면 이제 그동안 해오던 방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공간에 대해서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공간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이전과 다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별다른 묘수가 딱히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사실 공간을 안다는 것도 뭘 뜻하는 건지 잘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이 내 다음 작업에도 적용될까? 그동안 내가 해온 공부를 바탕으로 나는 어떤 예술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 어떤 지점을 바꾸어 시도해볼 수 있을까? 혹은 반드시 파는 물품들이 제품이어야 하는 걸까? 나는 작년부터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 소통이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예술을 하는 것이 내가 이해한 것을 상대방과 나누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잘 보여주기 위한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 기술적인 수련을 했고 소통에 용이할 것이라 생각했던 감정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그런데 올해에도 여전히 나는 표현력을 기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선을 자유롭게 쓰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잘 드러내고 싶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엔 작년과 같은 기술적인 방법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왼쪽부터 고흐, 베이컨, 피카소의 그림. 한 쪽 눈으로만 봐도 이들의 관찰 능력이 다르단 걸 알 수 있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표현할 때, (물론 의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쉽게 대상과 똑같이 그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사실 대상에 있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반드시 닮아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기술적으로 정교하고 똑같이 그리는 것, 비슷한 형상을 옮기는 것에는 그리는 이의 표현이 담기지 않는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포착해낼 수 있어야 그리는 사람을 통해 대상의 무엇인가가 표현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얼마나 똑같은지 보다 내가 어떻게 대상을 읽어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내가 원하는 소통하는 예술에도 더 유리하다. 물론 기술적인 면이 바탕이 될수록 수월하겠지만,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포착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그런 특성을 포착하기란 그만큼 대상을 깊이 바라보고 생각하고, 만나지 않는 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어떻게 대상을 바라보는가. 그런 관찰의 능력이 예술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런 관찰의 기술이 아닌, 능력을 갖고 싶다.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언젠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좋아하는 것을 잘 한다.”라고 했던 적이 있다. 장난스럽게 했던 말이긴 하지만 정말로 나는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것 같다. 잘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쉽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모습은 나에게 맥시멀리즘적으로 나타난다. 미니멀 라이프와는 반대되는 맥시멀 라이프는 물건을 버려서 일상을 다시 구성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모은 물건으로 일상을 구성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계속해서 모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을 이끄는 어떤 매력을 가진 물건들이 주변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런 모습이 그저 취향에 맞는 물건을 사 모으고 소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스스로를 맥시멀리즘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이 다르다.

 

   (...) 하지만 이제 나는 나를 안다. 나는 선물받은 꽃다발 포장지 끝에 적힌 친구의 보고싶었어라는 필체가 아쉬워 포장지를 잘라두는 사람이다. 입사할 때 썼던 수첩 속 구구절절한 메모들을 고이 간직해두는 사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괜히 명함을 집어올 것이다. 그 도시에 다시 가리란 보장도 없으면서.

-<삶이 좀 미니멀하지 않으면 어때서>, 전아론(브런치)

 

 

   맥시멀리스트를 움직이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발견한 사물의 매력이다. 어딘가에서 주워온 돌맹이에도 맥시멀리스트에겐 서로 다른 매력이 있다. 이것이 단지 취향 수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맥시멀리즘는 수집강박이 아니다. 결국 미니멀리즘도, 맥시멀리즘도 주변에 무엇을 놓을지 고민한다는 점에서 사물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가에 대한 태도의 차이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맥시멀리스트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매력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물을 살피고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나는 관찰하는 능력이 타고난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동력이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아끼는 것에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방식이 없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것을 잘하더라도 어떻게하면 잘 좋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좋아하는 것은 그저 소비의 방식으로 치부되고 전락하고 만다. 나의 이런 맥시멀리즘적인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내가 찾은 방법은 내가 발견한 매력을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관찰한 것을 표현하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는 표현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과연 이걸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을 볼 수 있을까?

 

 

   아주 오랜 옛날... 무려 18살 즈음 입사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쓸 때 자주 써먹던 문장이 있다. “만일 제가 귀사에 입사하게 된다면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근거가 되는 인재가 되겠습니다.” 이런 뉘앙스의 어쩌구. 아마 주로 입사 후 포부란에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깔깔... 지금 떠올리면 도대체가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말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래서 더 웃긴다. 혹시 업보인가?) 그 때의 나나, 길드다의 나나 해야 하는 것에 이끌리고 하고 싶은 것에 방황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길드다의 나는 그 때의 내가 생각도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자발성과 수동성을 오가는 건 평생의 굴레이지 않을까? 만일 그 굴레의 중심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조금씩 중심을 넓히기 위한 실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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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6. 4.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