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야금야금 미학 알아가기 1편 - 캘리그램의 파괴자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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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길위기금에서 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동은의 프로젝트: 야금야금 미학 알아가기 - 1편

 

   캘리그램calligram의 파괴자, 마그리트

 

 

 

   처음 파지스쿨을 시작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N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노라쌤에게 캘리그라피1)를 하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왜 그랬느냐? 내 글씨체로 말할 것 같으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왜 하필 1학년 2반 담임의 날려쓰던 글씨가 멋있어 보였던 걸까! 그 선생님의 글씨체를 쏙 빼닮은 덕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글씨 못 쓰는 아이로 칠판 앞에서 꽤나 야단을 맞았다. 심지어 그때 다니던 학원에서 제대로 숙제를 했음에도 글씨가 이상하단 이유로 맞기도 했다 ㅡㅡ;; 그러나 글씨체를 고치려고 하진 않았다. 글씨라는 건 나만 알아볼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고등학교 즈음부터 만년필이나 펜촉으로 잉크를 찍어 멋진 글씨를 쓰는 캘리그라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영화 포스터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는 글씨들이 많아졌고좋아하는 시구들을 직접 손글씨로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그런 사람들이 찍어 올린 사진들을 보면서 그런 멋진 글씨들을 동경하게 되었다그러나 암호문이라는 얘길 듣던 내 글씨로는 그런 예술적인 글씨의 장벽은 높고도 높았다.

 

 

캘리그램

   그리고 그 열망은 3년이 지나고 나서야 해소될 수 있었다. 바로 <천자 중에 한자>를 작업하면서였다. <천자 중에 한자>를 작업하기 전에 읽었던 <미학 오딧세이> 2권에는 여러 화가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책 속에 소개된 화가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려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과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다니...! 그들에게 예술은 자신의 고민을 담아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매개였다. 마치 글처럼, 그림도 누군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면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네의 <연꽃> 연작들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예를 들면 세잔과 모네가 있다. 우리가 색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사물마다 반사하는 빛에 따라 눈으로 다른 색을 인지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색이, 사물이 가진 절대적인 모습일까? 해가 뜨고 지면서, 우리의 풍경은 매일 다른 색으로 바뀐다. 새벽녘과 해질녘의 풍경이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물의 절대적인 모습인걸까? 모네의 시선에는 어떤 한 순간의 그 빛이었다. 그 선명한 형체보다 빛을 머금어 서로 다른 빛을 발하는 그 순간. 그렇기에 모네의 그림은 경계가 선명하지 않고 순간마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의 인상이 담겨있다. 모네가 그렸던 같은 풍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네가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 했다면, 세잔은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의 인상을 포착하려 했다. 세잔은 3차원의 시각을 의심했다.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언제나 투시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세잔은 정확한 구도와 투시보다 단편적이고 조각난 시점이 어떻게 우리의 시선에서 조화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모네의 그림처럼 세잔의 그림 또한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데, 그 또한 조각난 시선들의 인상을 담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모네와 세잔 모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을 똑같이 그리기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가 담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알게 된 새로운 예술이었다

   세잔과 모네는 그들과 가까운 것을 그렸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과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도 그들이 주변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내가 공부하고 있던 한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한자는 조금 특별한 문자였다. 한자는 의미가 담겨있는 문자다. 한자는 한글이나 영어처럼 소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마다 의미와 음이 모두 다른 문자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문자가 있으며 때론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한자의 음을 읽는다고 해서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곧바로 가리키는 것일까? 그 문자를 읽는 것 만으로도 의미를 얼마나 인식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사물을 가리키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소개된다. 첫 번째는 바로 그림을 그려 그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캘리그램에서는 이 두 방법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그 사물의 이름과 모습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더 선명하게 사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방법이라면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내가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운 글씨를 만들어낼 수 있으면서도, 한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더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17년에 작업했던 <천자 중에 한자> 작업들. 왼쪽부터 <무無> <청聽> <연緣>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천자 중에 한자>였다.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를 가진 은 소리의 기호인 음표를 이용해서 글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은 얼기설기 엮여있는 실로 이리저리 복잡한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얼굴을 뜻하는 한자 '용'은 실제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는 등, 그 한자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했다. 그렇게 작업한 것에 나의 시선과 감각이 담긴 것 같아 만족했다

 

캘리그램의 전복

   이미 몇 번인가 천자문 작업에 대한 글을 썼기에 이런 작업 비하인드가 지겨운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구태여 이렇게 다시금 내 작업을 소개하는 것은 얼마 전 미학세미나를 시작하며 2년 만에 다시 <미학 오딧세이>를 읽고 내 작업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현대예술에 대한 내용을 다룬 2권 뿐 아니라 탈근대의 미학을 소개하는 3권까지 함께 읽었다. 사실 2권에서 저자가 주구장창 얘기하는 화가는 따로 있다. 바로 마그리트다. 마그리트는 꿈이나 무의식을 탐구했던 초현실주의 사조 속에서도 철저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모네나 세잔의 그림처럼 형태가 불분명한 그림이 아니다. 그리고 달리처럼 형태를 일그러뜨리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가 보는 사물을 그대로 그려내면서도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그 현실을 비튼다. 그의 그림이 모순적이지만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전에 2권을 읽었을 때엔, 이것이 그저 느낌정도 뿐이었는데 다음으로 읽은 3권에서는 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모두들 핸드폰에 있는 이모티콘을 사용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핸드폰에서 문자와 이모티몬은 서로를 보완하는 좋은 도구다. 그러나 마그리트 시대엔 지금처럼 이모티콘과 문자가 함께 있는 것이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었나 보다. 마그리트와 같은 현대예술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대부분 물체를 그대로 그리는 재현회화가 주를 이뤘다. 르네상스의 화가들 사이에서는 그 시대 그림의 몇 가지 철칙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도상圖象icon 문자가 함께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그림을 그린 땐, 되도록 실물을 닮게 그려야 한다는 유사의 원리다. 그림은 실물과 닮아야 그 실물의 기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이런 재현회화의 원칙을 모두 깨트린 사람이었다. 그건 그의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그림 속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프랑스어와 함께 그려진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왜 이런 문장이 있는 걸까? 그려진 파이프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담배를 피울 수 없는 파이프는 파이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려진 파이프는 파이프라고 할 수 없다.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현실을 인지하고, 사물을 가리키는 두 방법으로 다시 현실을 가리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파이프를 설명하는 문구는 결국 진짜 파이프를 가리키지 않는다. 마그리트는 이렇게 도상과 문자를 함께 사용해, 그 기능을 무너뜨리려 했다.

   내가 작업했던 <천자 중에 한자>는 전통적인 캘리그램이다. 나는 문자와 도상을 섞어 그 문자가 지칭하는 의미를 더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캘리그램은 낱말로 한 번 대상을 가리키고, 그림으로 지시를 또 한 번 반복한다. 도상과 문자라는 두 개의 수단으로 대상과 기호 사이를 단단히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캘리그라피는 현실을 닮지 않은 문자와 텍스트가 현실을 나타내도록 만든다.그러나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이런 캘리그램의 기능을 완전히 파괴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문자와 도상이 서로를 보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절대 실물을 지칭하지 않는다.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 그림은 무슨 소용일까? 그의 그림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마그리트의 그림들.  왼쪽부터 <기백>, <중절모를 쓴 남자>, <데칼코마니>, <겨울비>

 

   마그리트의 그림에선 중절모를 쓴 남자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보통 그림에 어떤 인물이 있다면 우리는 이 인물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한 추리를 한다. 그러나 마그리트가 그리는 이 남자는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떻게 마그리트의 그림에 등장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남자의 얼굴 앞에 사과가 있다가, 새가 있기도 한다. 때로는 그의 뒤에 봄의 여신이 있기도 하고 두명의 분신이 나란히 걷기도 하고 잘려나간 커튼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이리저리 같은 형상으로 그려지다 심지어는 비가 되기도 한다. 이런 같은 모습의 반복은 그 남자가 실제로 누구인지보다 그림을 넘나드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바라보게 된다.

   더 이상 그림 속의 이미지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아니, 더 이상 반영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것이 그가 파괴한 유사의 원리이다.그의 그림 속에는 나무의 형상이 현실의 나무를 반영하지 못하고 나뭇잎은 현실의 나뭇잎을 가리키지 못한다. 현실을 반영해야하는 재현에서 벗어난 이미지는 원본-사본이라는 유사성의 위계에서 벗어나 어떤 형상을 대체해도 상관없는 수평적인 상사2)의 자유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마그리트의 그림같은 모티프의 서로 다른 모습들은 우리가 항상 봐오던 원본의 재현을 해방시키고 일상의 사물들 속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마그리트는 문자가 주는 단서와 이미지가 주는 단서를 이용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보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전복, 그 다음

   나와 마그리트의 작업은 그림과 문자를 함께 활용한다는 점에서 같은 방법을 활용하고 있지만 같은 방법으로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새로운 마그리트의 표현에 놀라움과 대단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작업에 대한 후회가 일기도 한다. 나는 다르게 표현할 순 없었을까? 그 때 조금 더 생각해볼 순 없었을까? 그리곤 조금 두려워진다. 내가 이 이상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에게 이런 생각을 느끼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구체화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것은 문탁쌤이 나에게 말해왔던 과 비슷하다. 손재주가 좋아 손으로 하는 것이면 십자수, 실뜨기. 피아노, 베이킹, 그림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능숙한 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가 한계일 뿐이다. 당연하지만 그에 따른 감각과 소질은 엄청난 노력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17년 예술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문탁쌤이 나에게 동네 예술가라고 명명해주었을 때의 거북함은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저 그림을 보고 즐기기 외에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찔하게 표현이 되어있어도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왜 이렇게 아리송하게 그렸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보고싶은 것만 볼 뿐, 그것 외에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더 보고 알기를 포기한 것과 같았다.예술에 대해 더 알아도 소용이 없다는, 어차피 알 수도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만큼 예술은 나에게 막연할 뿐이었다

   예술의 가치를 높게 평했던 들뢰즈는 예술가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모든 위대한 화가는 자신만의 미술사를 갖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의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것이 마음의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당장 마그리트처럼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는 없다고 해도 나만의 문제의식과 맥락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나의 맥락은 뒤집히고, 부정당하면서 만들어질 것이다. 이미 나는 막연하게나마 예술을 알아가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야금야금

 

 

 


1) 손으로 아름답게 글씨를 쓰는 기술

2) 유사類似와 상사相似는 똑같이 비슷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원본의 동일성에 종속되는 유사와 달리 상사는 원본과의 위계질서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다르다. 유사의 원칙을 깨트린 마그리트는 그저 상사의 반복을 통해서 맥락의 차이만을 만들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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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4. 2. 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