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민주주의] 프로젝트<우리는 밀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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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민주주의 개인 프로젝트


최현민 작

에세이 <우리는 밀양이다>











밀양에 가져간 두 질문


   2014년 9월, 광화문에서 일베 회원들은 치킨을 뜯었다. 단식투쟁을 하느라 며칠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일베 사람들은 추악하게 치킨을 뜯고 피자를 베어 물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3년 전 4월16일 아침, 현장체험을 가는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많은 국민들은 같이 애통해하고,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응원과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같이 걱정하고 슬퍼했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제 그만해라” “지겹지도 않냐” “돈 때문에 그러냐” 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분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호 피해자 유가족, ‘그들’만의 문제였던 것이다.


   나라고 달랐을까. 그렇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앞서 말한 사람들처럼 싸늘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가 같이 외치며 힘이 되어드리려 했다. 그렇지만 세월호 문제를 정말 ‘우리’의 문제라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라는 감각보다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나를 시위현장으로 이끈 동기였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할 때조차도 나는 세월호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밀양 할머니들의 기록이 담긴 『밀양을 살다』에서 박효숙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일 같지만 그래도 내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꺼. 그렇게 생각했는데 데모안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안하더라고요. 너그, 니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더라고요”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오월의 봄」, 2014, 


  박효숙 씨의 말처럼 사람들은 세월호, 밀양 송전탑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에는 당사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같이 슬퍼했다. 그러나 본인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들’의 문제는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오랫동안 반복해서 접하면서 지겨워진 ‘남’의 문제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밀양 송전탑도 내게 ‘우리’의 일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시 내 일상에 돌아온 후에는 밀양 송전탑을, 밀양 할머니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을 붙잡아둔 채 밀양으로 내려갔다. 밀양에서 지내는 이틀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미 밀양이다


   아파트 한 채만 한 송전탑이 밀양 곳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굴곡진 산등성이 위에, 도로 바로 옆에, 765 송전탑이 있었다. 거대한 송전탑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송전탑은 섰고, 밀양 마을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길 가던 중에 만나면 새삼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던 주민들이 이제는 누구보다 불편해졌다. 주민들 간에는 살가운 웃음보다는 차가운 정적이 흐른다. 밀양 마을은 이렇게 멍들어 있었다. 송전탑을 밀양에 설치한다고 한전이 발표하자 밀양 주민들은 발 벗고 나섰다. 삶 자체였던 농사를 뒤로 한 채 송전탑 설치 반대를 위해 거대한 국가와 맞서 싸웠다. 손자뻘만한 경찰한테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진압과정 중에는 전쟁터 같은 폭력을 몸소 겪었다. 밀양 할머니들의 몸과 마음에는 골병이 났고, 평범한 삶과 따뜻한 주민을 잃었다. 이것이, 원전을 수출하고 상업적 이익을 챙기려는 검은 속내를 감추고 전력 수급을 안정화한다는 명분 하에 정부와 한전이 지난 10여년 간 해온 일이었다. (「명분 사라진 밀양 송전탑 공사…한전 "공사 중단 없다"」, 『프레시안』, 2013.10.18,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560>) 대한민국 헌법은 제 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말한다. 밀양 주민들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에 포함되지 못했다.


   고병권의 저작 『추방과 탈주』에서는 국가로부터 국민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을 ‘주변인’이라고 일렀다. 그들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력과 부의 지대에서 부차적으로 밀려나고,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삶의 한계지대로 밀려나고, 이익을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정치권에서는 고려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21~28쪽) 국가로부터 보호받지도, 고려되지도 못한 밀양 할머니들은 ‘주변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 있는 우리는 어떤가. 밀양주민처럼 직접적으로 공권력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도 ‘주변인’이다. 또래 친구들은 대학 등록금으로, 생활비로 턱 없이 부족한 최저시급을 받으며 알바를 한다. 집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은 최저시급조차도 챙겨주지 않는다. 대학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려 할 때도 여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10년 간 비정규직 일자리 수는 줄지 않고 있다.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받는 임금은 정규직 임금의 절반 위를 간신히 웃돈다. (「비정규직 임금, 정규직의 54%…임금격차 사상 최대」, 『연합뉴스』, 2017.04.30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4/27/0200000000AKR20170427204400002.HTML>)최저시급, 고용환경과 관련된 정책을 정부, 혹은 국가가 추진할 때 우리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변인’이다.


   세월호 참사는 내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내게 닥친 건 아니었지만 우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내 가족에게도 세월호 같은 참사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같은 국가 안에서 살고 있는 나도 언제든지 비슷한 사건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게도 언젠가 닥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월호를 나와 연결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피해 당사자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가로부터 외면당했던 것처럼 우리도 권력을 점유한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국가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밀양, 세월호에서 처럼 눈에 띄는 방식으로, 충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다른 양상 밑에서 밀양주민에게,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추방의 원리는 모두 같다. 모두 똑같이 ‘주변인’으로서 억압받고 있다. “우리도 밀양이 될 수 있다”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밀양이다”




우리의 문제는 잊혀 지지 않는다


   밀양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 3주가 되었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2주 뒤에 다시 밀양에 내려간다.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여력이 닿는 한 밀양을 찾아가서 밀양할머니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다. 밀양을 두 차례 다녀오면서 ‘우리’라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꼈다. 밀양 할머니와 우리는 ‘주변인’으로서 고통받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바라고 있었다. 다수의 권력에게서 차별받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저 멀리 보고 있는 지향은 같았다. 단지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걷고 있는 길이 달랐을 뿐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도우면서 같이 걸어간다. ‘우리’의 문제로 다가온 밀양송전탑은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항상 밀양을 찾아가고, 꼬박꼬박 송전탑에 관한 사회활동에 참가하지 못할 수 있다. 일정이 많아 바쁜 시기에는 지금처럼 자주 밀양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대신, 밀양에 관해 언제나 관심을 갖고, 소식을 찾아보고, 또 몇 달 전의 나처럼 밀양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에게 밀양을 알려줄 수 있다. 핸드폰을 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밀양소식을 찾아보고, 관련기사에 저절로 손이 가는 요즘처럼 말이다. 시간이 된다면, 어떻게든 비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다시 밀양에 찾아가서 농사일도 도와드리고 얘기도 듣고 싶다. 내게 밀양은 ‘우리’의 문제로 남아있다. ‘우리’의 문제는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우리로 살아가는 시작


   밀양송전탑 문제가 시작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공권력을 투입해 송전탑 설치를 감행한지도 삼년이 지났다. 이미 송전탑을 들어섰고, 밀양 마을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이미 상황이 마무리된 뒤에서야 밀양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밀양 아리랑』영화를 보고 뒤늦게 눈물을 흘렸고, 밀양 할머니에게서 지난 일들을 들으면서 뒤늦게 가슴 아파했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상황에 무력했고, 그간 도움이 되지 못했단 사실에 죄송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비관대신 긍정한다. ‘우리’라는 감각을 느꼈을 때 시작이 있다.


   국민 개개인은 무력하다.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설 때, 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설 때, 노동자가 결사반대하는 비정규직법이 제정되었을 때, 국민 소수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함께 할 때 국민은 거대한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기억되는 전국민의 봉기는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고, 1987년 6월 일어난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2017년 지금, 천만 시민의 촛불 시위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뜻을 함께하고 같이 행동하는 ‘우리’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에게는 힘이 생긴다. ‘우리’라는 감각은, 거대한 권력에 저항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나는 ‘우리’를 긍정한다.


   밀양은 ‘우리’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시작이다. 밀양 말고도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여성, 성적 소수자, 소위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장애자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억압받는다.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무시당하고 차별받는다.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며 사람들의 연대를 기다리는 주변인이 주위에 있다. 우리는 주변인의 가족이자, 주변인의 친구이자, 주변인 자신이다. 그들과 함께 ‘우리’가 되는 것, 그들의 요구를 함께 외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꿈꾸는 사회에 한발 짝 더 다가가는 것, 이것이 밀양이 내게 가르쳐준 ‘우리’로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8. 3. 5.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