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가을 세 번째 시간 <그랜토리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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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년 10월 1일

작성자: 차명식



 




  이번 시간에는 지난 번 시청한 <그란 토리노>를 보고 영화에 관한 몇 가지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크게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 중 첫 번째 질문은 월트가 살고 있는 ‘동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1. 주인공인 월트가 살고 있는 동네는 어떤 동네인가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떤 분위기인가요? 어떤 장면들을 통해 그걸 알 수 있나요?

  

   황량한 정원, 어수선한 분위기, 낡아가는 집들. 누군가 대번에 ‘시골’이라고 불렀듯이, 월트가 사는 동네는 미국이긴 해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높은 빌딩들이 가득한 대도시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그런 대도시에 살 능력이 없어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노인들과 이민자들이 가득하고 어렵지 않게 총성을 들을 수 있는 동네 ? 이른바 슬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영화에서 부유한 백인들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인공 월트와, 잠깐 스쳐지나가는 월트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유색인종이고 이민자들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흑인들은 오바마처럼 스마트한 이미지가 아니라 껄렁대며 시비를 걸어오는 패들이고, 히스패닉과 베트남 갱단은 총을 빼들고 서로를 위협하죠. 그 외에도 아일랜드, 이태리, 동유럽 이민자 출신인 월트의 친구들은 그런 출신을 가지고 서로를 비하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이 영화는, 인종주의자들이 흔히 가진 편견, 특정한 스테레오 타입으로서의 유색인들의 모습을, 하지만 동시에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는 그들의 일면을 여과 없이 그려냅니다. 등장인물들의 모습 뿐 아니라 주인공 월트의 시선을 빌려서도 말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바로 그런 월트에 관한 것입니다.




  2. 월트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좋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는 막 부인과 사별한 노인으로서 과거 한국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무신론자이고, 인종주의자이며, 남녀차별주의자이고, 보수적인 ‘꼰대’입니다. 우리는 월트가 온갖 종류의 차별적인 말들을 입에 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쪽발이’, ‘짱깨’, ‘조센징’, ‘검둥이’ 같은 말들, ‘남자가 계집애처럼’, ‘계집애는 계집애답게’, ‘동성애자처럼 굴지마라’, ‘요새 젊은 놈들이란’ 등등. 온갖 종류의 편견이 가득한, 그야말로 혐오발언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사람이죠. 가족들, 특히 자식들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아 영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는 예전 한국전쟁에서 항복하려 했던 소년병을 죽이고 훈장을 탄 과거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월트 코왈스키는 정말 악독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만일 월트 같은 이웃이 있다면 어떨까 물었던 질문에서도 여러 친구들이 그리 반갑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었구요. 그런데도, 월트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월트의 다른 모습들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서로를 ‘폴란드 얼간이’, ‘이탈리아 도둑놈’, ‘아일랜드 가난뱅이’ 따위로 부르는 건 사실 그만큼 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의 이웃인 수와 타오 가족들을 ‘야만인, 국스(동양인에 대한 멸칭)’ 따위로 불렀지만 그들 가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을 구하려 나온 사람도 월트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수와 타오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자신의 죽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예전 소년병을 죽인 일로 일평생을 후회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타오 가족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그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월트 코왈스키라는 사람을 평가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한 사람이 내뱉는 말들과, 그 사람의 과거와, 어떤 문제에 대해 그 사람이 보이는 태도들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 우리가 지금까지 흔히 해온 그런 일들이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이 월트 코왈스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결국 이러한 월트 같은 이웃과 - 월트 같은 사람과 ‘함께 사는 것’, ‘공존하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월트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러한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로 인해 평생 고통받고, 고뇌해온 사람입니다.


  그런 월트가 내린 마지막 선택을, 우리는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3. 몽족 갱단을 찾아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월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감독은 그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그랜 토리노>의 클라이막스에 대해 여러 친구들이 꽤나 놀랐다는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도 많았고요. 지금껏 수와 타오를 괴롭힌 다른 모든 이들을 멋지게 혼내주었던 월트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들을 혼내주는 대신 그들의 총에 맞아 죽는 선택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대한 건 월트가 몽족 갱단들을 모조리 해치우는 그런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원빈이 나온 영화 <아저씨>가 그랬듯 약자를 위해 악당들을 멋지게 해치우는 그런 모습. 그런데 월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정의의 카우보이처럼 총을 뽑는가 했더니 실은 라이터를 꺼내는 것이었고 악당들의 총탄이 월트에게 쏟아졌습니다. 월트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악당들은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고요.


  왜였을까요. 월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월트 역할은 한 배우이자,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었을 적 서부영화로 이름을 날린 배우였습니다. 서부의 카우보이,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권총을 쏴 악당들을 해치우면서 마을의 정의를 수호하는 그런 역할들을 많이 맡았지요. 그리고 그런 카우보이의 모습을 사실 근현대 미국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근현대 미국은 전 세계로 군대를 보내어 수많은 곳에서 ‘정의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파시스트들, 테러리스트들, 그 외에도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수많은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해왔지요. 정의의 카우보이처럼요.


  하지만 그런 미국의 ‘정의의 전쟁’은, 결국 또 다시 수많은 복수자들을 낳았습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새로운 테러리스트가 되었고, 그 테러리스트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다시 복수심에 불타는 인종주의자, 파시스트가 되어갑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폭력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가 처한 위험입니다.


  그런 면에서, 카우보이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의 분신인 월트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의의 카우보이처럼 총을 뽑다가, 최후의 폭력이 아닌 방법으로 타오와 수를 보호하고자 한 그의 모습.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세계가,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공존’의 방식이 아닐까요. 그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함께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영화 <그란 토리노>를 통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의 함께 사는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와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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