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RC] 2번째 시간 : 99%를 위한 페미니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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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서형준

업로드 날짜 : 8/5

 

2020.7.29 저녁 7시부터 9시 반까지.

99%의 페미니즘. 시위 나가서, 시위대 앞에 조끼 입으신 분들이 나눠주는 팜플렛에 적힌 쪼그만 글자들에서 오는 느낌이 있었다. 글에 논증이 명확하거나 예시들이 친절하게 있다거나 하지도 않고, 대부분이 아는 내용으로 차 있지만, 그 아는 내용들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 나가면서 "우린 이것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말하는 느낌. 팜플렛을 직접 만들어내고 뿌려대던 내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책에 이상한 여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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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었던 내용은 고은 튜터가 발제한 < *메니페스토! > 의 내용. 고은 튜터는 막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과 이 [99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이 한 가지 차이점을 제외하면 동일한 구조와 기능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발제 내용 중 [공산주의자 선언]이 과거의 한 시대가 붕괴했다는 선언, 그리고 곧 도래하게 될 어떤 시기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에 미숙하고, 섣부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되게 좋았다). 발제자가 말한 한 가지 차이점은 [공산주의자 선언]이 계급 정치 시대에 쓰여진 글이고, [99%를 위한 페미니즘]은 정체성 정치 시대에 쓰여졌다는 것이었다. 책의 저자 또한 이 차이점을 인지하고, 테제 11에서 이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을 했다고 설명한다(162p).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혁명적인 모습에 비해서, 이 책이 꽤나 현재를 비판하는 와중에 현재에 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문제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문제들의 근원인 '자본주의'를 해결해야 한다는 접근은 페미니즘 뿐만이 아니라 많은 19~21세기 사회운동에서 나타나는 패턴이다. 생태론자던, 기후학자건, 조금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자고 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언급한다.

저자가 직접 언급했듯이 자본주의는 그런 사회운동들조차 흡수하며 체제를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유지시키고 있고, 노조나 사회 운동들은 쇠퇴하고 변질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이 이 거대한 흐름을 꺨 것이라는 선언을 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계급 정치와 정체성 정치의 구조적 차이점과 그 차이점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삶의 변화, 의식의 변화에 집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껏 왜 더불어민주당이 미투 운동, 여성주의 운동, 하다못해 더불어민주당 내부의 여성 의원 비율 증가에 미온적이다 못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박원순과 안희정같은 성범죄자들의 몰락에 엄청난 영웅 서사를 덧붙이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들의 지지자들도). 그러나 계급 정치에 매몰린 당이, 그들의 '연대'와 '단결'을 방해할 뿐인 정체성 정치의 흐름을 반길리는 없는 것이다. '미투'는 민주당을 음해하려는 세력의 공작일 가능성이 높으며(김어준 어록), 안희정/박원순이 이룩한 '위대한 삶'을 그깟 '여자 문제'로 깎아내리는 것 뿐이라는 사람들에게 정체성 정치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무너트려야 하고, 민주당 지지자들이 믿는 거룩한 성을 부숴야 한다.

지금 시대에서 '위기'가 만연하기 때문에 그 '위기' 아래 취약성에서 우리가 단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무 안일하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중산층도 아닌 한국의 20대 남성들이 지금 '위기'로 느끼는 것은 본인들의 통장 잔고가 아니다. 녹고 있는 빙하도 아니고, 극우주의자들이 판치는 정치판도 아니고, 태평양에 생긴 쓰레기 섬도 아니다. 소리치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남성들은 N번방으로 여성들을 다시 남성 판타지 속에 가두려고 한다. 훨씬 폭력적이고 위협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아래 남성들의 '위기'를 만들고 확장해서, 남성성을 부숴나가며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왔다는 것을 선포할 진정한 메니페스토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위의 말투가 너무 딱딱해서 말투를 바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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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뒤에 나눈 이야기 속에선, <반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세워지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제가 지금까지 제일 많이 들었던 대안은 '마을 경제'에요. 문탁이나 동천동 커뮤니티 등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와 조금은 맞닿아 있죠. 경제 구조가 다시 마을 단위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는 발상인 거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에 너무 절어있기 때문에, 조금은 선택의 폭을 좁혀놓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경제 구조가 아닌 사회 구조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질지는 감이 잘 오지 않는 거 같아요. 정체성 정치가 계급 정치를 무너트린다면, 지금처럼 양당제와 연봉1위 직업 국회의원은 없는 이야기가 될 거 같긴 하지만, 그 대신 무엇이 세워질지는 잘 모르겠네요. 혐오 표현들을 남발하며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과거 왕권신수설을 맹렬히 주장했던 사람들처럼 사라질까요? 우리가 그 정도의 큰 파도를 만들 수 있다면, 그 이후에 어떤 세상이 오던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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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이야기가 잘 나오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서 좋은 거 같아요.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말들을 뱉어내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듯해지라고 사람들이 덧붙여주는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질문이 계속 생겨요. 그래야 할텐데.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 저녁이었어요.

그리고 뭔가 우연히 엿듣게 되어서 언급을 할까 고민하긴 했는데, 그냥 하자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보다 중도가 더 빡친다]는 말은 아마 '중도'를 표방하는 척 하면서 어떠한 변화도 바라지 않는-논쟁 자체를 두려워하는-사람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욕하는 거 같아요! 중도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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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8. 11. 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