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강학원> 5회차 - '축음기, 영화, 타자기' 후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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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지원

 

 

 길드다 5회차 세미나가 끝났습니다.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 타자기 파트를 마지막으로 끝을 냈습니다. 발제문을 읽고 각자 궁금했던 점과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을 나누며 질문에 살을 붙이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함께 나눴던 얘기들 중에서 재밌었던 부리분켄적 글쓰기와 sns 대한 내용을 중점으로 후기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책에서 인용된 슈미트의 부리분켄 자신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유의미화 시키고 기념비로 세우는 사람들의 제국을 말합니다. 키틀러가 부리분켄을 책에서 인용한 이유는 자의식을 덜어낼  있는 도구인 타자기가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당시의 지식인들과 작가를 풍자하는 맥락으로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우리는 부리분켄의 상황을 sns 운용하는 자신의 모습과 연관지어 생각해   있습니다. 대상이 지식인 계층에서 일반인으로 옮겨왔고, sns 하는 자신이 정도가 다를 뿐이지 무언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sns 운용하고 있다고 확신할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얘기의 맥락 속에서 나는 부리분켄이 아닌가? 라고 질문할  있습니다. 저부터 이런 질문에 대답해보자면, 저는 책에서 부리분켄의 내용을  때부터 , 나는 진짜 부리분켄이다.”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세미나 시간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저는  해의 작은 목표를 일기 쓰기로 정하고 하루를 기록하는 일을 실행하고 있는데요. 흔히 일기는 그렇게 쓰면 안된다는 방식, 예를 들자면 오늘은 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안된다, 랄지 나는 들어가는 문장은 적어야한다,  형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매일 쓰다보면 스스로  둔감해지는 면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아야  지점은 부리분켄은 나쁜 것이고 타자기 발명 이후의 시대가 발전된 것이자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상황이 바뀌었고, 더불어 물적 조건이 바뀌었다는 사실과  조건의 변화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효과를 창출하는지 재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맹목적인 행위의 나열 속에서 무엇을 내가 목적하고자 했었는지, 그것과 관련하여 이런 시도들이 괜찮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할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sns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생각해   있을 것입니다. 여러 분이 자신은 인스타그램, 혹은 페이스북을   완전히 부리분켄적이고, 본인의 그런 모습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라고 의견을 말해주었습니다. sns  하며,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는데요. 공감되는 이야기가 많이 오고갔습니다. sns 현대에 와서 의지적 선택의 영역인가에 대해 고민해보고 타자기에 대한 하이데거의 글을 인용해서 생각해봤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강요한다는 , 누군가는 타자기를 사용하기를 포기하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강요당한다는 것입니다. sns 사용이 누군가에게는 갈등의 지점으로 오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손쉽게 신체로 흡수되고, 누군가는 아등바등 따라가보려고 노력하는 등등의 상황으로 나눠지지만, 이러한 모든  조건이라면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질문은 모두에게 닿아야 마땅한 질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질문이 특정한 집단에게 한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세미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현서씨의 어쩌라고 질문을 시작으로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어렵고 헤매고 있지만, 파생되는 질문에 나름 답을 가지고 길을 더듬어   있는 시간이 앞으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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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5. 1. 2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