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이동은의 한문은 예술: 한자,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길드다> 청년들이 <길위기금>으로부터 고료를 받으며 글을 연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동은의 한문은 예술'에서는 초등이문서당 <한문이 예술>의 과정을 세 번에 걸쳐 보여드립니다.

 

 

 

 

 

한자,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0.  한자에 뭐가 있길래?

   또래들이 조기교육으로 영어를 배울 때, 나는 한자를 외웠다. 한자를 수없이 쓰고 외우는 시간은 정말 괴로웠다. 하기 싫다고 연필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엉엉 울기도 했다. 내가 이런 생떼를 부려도 엄마는 묵묵히 마주 앉아 한자 시험을 봐주셨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는 한자가 너무 힘들었다. 백 개를 외워도, 천 개를 외워도 내가 외운 한자는 모래사장의 모래 한 줌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천 개의 모래알이 모두 다른 모양과 뜻과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영어는 알파벳만 알면 소리 나는 대로 쓸 수라도 있지, 한자는 하나의 발음에도 열 개가 넘는 문자가 있고 하나의 문자에 열 개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했다. 그 막막함 때문에 한자만 보면 짜증부터 치솟았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이제 시간이 지나 이런 앙금은 많이 사라졌다. 원망 가득한 마음에서 조금 떨어져 한자를 바라보면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오히려 신기하게 다가왔다. 한자는 셀 수 없이 많다는 사실 만으로 다른 문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어릴 적부터 수없이 보아온 한자들에 대한 단상만 있을 뿐. 막상 설명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못 잡았다. <한자의 탄생>에서 탕누어는 내가 답답하다고 느꼈던 한자의 특징과 알지 못했던 한자의 한계들, 그리고 오랜 세월 한자를 써온 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와 상상을 넘나들며 상세히 소개한다. 그가 한자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1. 한자, 독특이라는 단열

   <한자의 탄생>의 주인공은 ‘갑골문’이다. 갑골문은 3,000년 전에 사용된 중국의 고대문자였지만 발견되자마자 어렵지 않게 해석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대단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자의 시스템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탕누어는 문자의 두 가지 곤경을 극복해낸 갑골문을 통해 ‘한자’라는 독특한 문자 시스템의 특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 번째 곤경은 바로 달라진 문자의 용법이다. 맨 처음 문자는 어떤 사물의 특징을 담은 그림에 가까웠다. 이집트의 새 모양을 본뜬 문자(

)를 떠올려보자. 이 문자는 누가 보더라도 날아다니는 새를 본뜬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새 문자의 직관적이고 단순한 형태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형태로서 의미를 나타내는 표의문자였다. 시간이 지나자 새 문자는 알파벳 ‘A’의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로 변형된다. 문자가 어떤 실체를 지칭하는 역할이 아니라 입의 소리를 옮기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문자의 용법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 고대문자는 이 곤경을 만난 후 표음문자가 된다. 이 곤경을 겪기 전까지 갑골문은 해와 달, 산의 형상을 본뜬 ‘상형자’나 사물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사자’ 같은 문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갑골문은 병음문자가 되지 않고 계속해서 ‘회의자’의 방식으로 문자를 만들었다.

   ‘회의자’는 두 개의 형상을 합쳐 의미를 나타내는 조자 방법이다. 이 방법은 더 폭넓게 사물과 개념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대량으로 문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여기서 또 다른 곤경이 나타난다. 바로 창조의 한계다. 두 번째 곤경은 한자가 독자적인 시스템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다. 세계의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없다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이후 한자는 새로운 창조 대신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의미의 부분(부수)과 소리의 부분으로 나눠 한자를 만들어내는 ‘형성자’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한자는 이렇게 문자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문자 생산 라인의 강력한 엔진’을 갖게 되었다.

   한자가 이렇게 두 번씩이나 곤경을 해결해낸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문자에 비해서 그 방법이 획기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완전한 변혁을 통해서 곤경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자들을 도구로 삼아 ‘공존하면서도 투쟁’하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후 조금 더 다양하게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가차자’와 ‘전주자’도 만들어졌다. 한자를 창조 하지 않고도 새로운 의미를 표현하는 기능은 계속 요구됐기 때문이다. ‘가차자’와 ‘전주자’는 쓰이지 않거나 비슷한 다른 글자들을 차용하거나 대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레비스트로스의 ‘수선공’에 비유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수선공은 한 수레에 잡동사니들을 싣고 다니며 각종 기물을 수선해주는 장인이다. 수리공은 기물을 완벽히 새것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기물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가차자’와 ‘전주자’는 한자 시스템에서 문자의 수선공이 되어 지속적으로 한자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표의문자라는 유일무이한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이런 한자의 독특함이 다른 문자들과 단열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여기서 단열은 단절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단절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고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48)라고 평한다. 현대가 되어 다른 문자 시스템과 접촉해야 했을 때, 한자는 이런 단절 때문에 100년 정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례로 문자가 너무 많아서 컴퓨터 키보드에 적용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2. 갑골문,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자

   갑골문은 조자 과정으로 보았을 때 거의 완성이 다 된 후기에 해당한다. 갑골문 이전에 쓰이던 그림 같은 부호와 갑골문을 비교해 보면 1,000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백만 년의 역사를 보았을 때 1,000년은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다. 이 기간에는 문자의 변화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의 생활상도 얼마나 빠른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변화가 가능했던 것일까.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신석기 시대의 모순'이라고 말한다. 그 시기에 문명은 엄청난 도약을 이루었으나, 도약의 결정적인 장소와 증거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자 학자들은 갑골문을 그저 문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료로 여긴다. 그러나 탕누어에게 갑골문은 단순한 사료가 아닌 문명의 발전을 이룬 ‘기적’에 가깝다.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이 ‘기적’이라는 말이 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모순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문명이 발전될 수 있던 배경에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소리가 있는 언어와 소리가 없는 사유가 수백만 년 동안 대지 위를 떠돌다 문자가 되었다. 고대인들은 문자를 통해서 말과 생각을 몸 밖에 두고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의 탄생을 통해 인류의 사유가 시간의 흐름에 흩어지지 않고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갑골문을 ‘최초의 문자’로 여기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갑골문에서 찾는 가치는 바로 고대인들의 축적된 사유다. 갑골문은 오랜 세월 감춰져 있다가 거북이 배딱지와 소뼈에 새겨져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갑골문은 수백만 년의 사유를 담은 모습으로 찬란한 문명을 가졌던 고대인들의 역사를 증명한다.

   저자는 갑골문의 형태 그 자체를 아름답다고도 말한다. 한자의 조형을 보면,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번개를 비와 함께 나타내는 반짝임으로 표현했다. 무지개는 비가 그치고 물을 마시러 내려온 용으로 바라보았다. ‘밝음’을 어두운 밤에 달빛이 내리는 꽃무늬 창가에서 찾아냈다. 이런 우화적인 갑골문 특유의 색채는 마치 갑골문의 풍경과 질감까지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 중에서도 저자가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성자로 언급한 한자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星(별 성)자다. 星은 반짝이는 별을 의미하는 日(날 일)자와 소리의 부분인 生(날 생)자가 합쳐진 문자다. 日은 형태적으로 그 이전부터 반짝임을 나타내는 기호에 해당한다. 그가 星을 탁월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生 때문이다. 生은 본래 초목의 새싹이 싹트는 생명력을 나타낸 글자다. 生은 그저 소리의 기호이지만 한자의 형상에 있어 그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동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星의 갑골문은 하늘에 떠 있는 반짝임을 나타내는 日과 그 아래 풀잎을 표현하는 生의 조합으로, 우리에게 마치 풀잎 위 이슬에 비친 별들의 반짝임이 담긴 아름다운 문자로 다가온다.

星의 갑골문

 

    3. 세계를 바라본 중국 고대인들의 지혜

   저자가 말하는 고대인들의 사유란 무엇일까? 책머리에서 탕누어는 望(바랄 망)자와 聖(성인 성)자의 갑골문을 비교하며 갑골문에 담겨있는 고대인들의 ‘지혜’를 소개한다. 望의 갑골문은 눈과 사람의 조합으로 가만히 멈추어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본뜬 글자다. 이에 비해 聖의 갑골문은 귀와 입이 강조되어 있다. 고대인들은 짐승의 발소리를 들어서 사냥에 이롭거나 숨어있는 소리를 듣고 이를 통역하는 사람을 성인, 즉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겼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그들에게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상상의 눈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상상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중국에서는 글자를 만드는 사람을 貞(곧을 정)자를 써서 정인貞人이라고 불렀다. 갑골문을 다루는 정인은 뛰어난 예술가이며 시각, 청각, 상상력, 외부와 내부의 세계를 일상처럼 직관으로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정인은 갑골문뿐만 아니라 점치는 용도인 갑골을 관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현대의 직업을 예시로 들자면 무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눈에 세상은 아마 온갖 사물들과 영혼이 뒤섞여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복잡한 세계 속에서 그들은 사물이나 개념을 문자로 만들어 낼 때 누구보다도 빠르게 속성을 파악해 분류해냈다. 그렇기에 갑골문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통해서 고대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 예시로 고대의 경제 제도를 하나 소개한다.

   갑골문에는 영아를 죽이거나 노인을 죽이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가 있다. 그러니까 ‘노약자 살인’이라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행동이 고대에는 문자로 만들어질 정도로 빈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마냥 끔찍하고 인간의 잔혹함이 드러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물자나 식량이 한정적이었던 고대사회에서 인구를 억제하는 하나의 경제 제도에 가까웠다. 이후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경제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노약자 살인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새로운 경제 제도가 바로 노예 제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예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다. 정인들은 세계의 만물이 왕에게 예속된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 증거는 바로 조각도 형상이 들어있는 갑골문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조각도는 고대인에게 노예의 신분을 낙인찍기 위한 도구였다. 이 형상을 따라가다 보면 “온 세상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고 천하에 왕의 백성이 아닌 자가 없다.”(228) 묵형을 당해 부역 중인 妾(첩 첩), 발목이 잘린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을 본뜬 僕(종 복), 부역 중인 어린아이를 본뜬 童(아이 동), 천민을 나타내는 奚(어찌 해). 臣(신하 신)자도 고개 숙인 포로의 눈을 본뜬 글자다. 심지어 용과 봉황의 갑골문에도 조각도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정인들은 사람을 누군가에게 예속되어있는 존재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인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조금 받아들여지기 힘들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연하게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자유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국가, 인종, 성별, 제도뿐만 아니라 미디어 매체나 전자기기에 예속되어 살아가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왕’이라고 불리는 절대 군주가 아닐 뿐이다. 어쩌면 고대인들은 일찌감치 이것을 깨닫고 자신을 주체라고 명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4. 연약한 우리의 지혜

   <한자의 탄생>을 쓴 탕누어는 대만의 문학비평가다. 어떻게 문자 학자가 아닌 사람이 문자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는 이런 생각을 예상이라도 한 듯 책 속에서 “적절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더 이상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저자가 갑골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갑골문의 가치? 갑골문이 보여주는 고대 세계? 나는 글쓴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대인의 해석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우리는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어려움을 미제사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난제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탕누어는 고대인들이 신체의 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도 꾹꾹 눌러 담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문자로 남겼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눈앞에 현실과 함께 보이지 않는 실제들도 해당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갑골문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현대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현실과 비현실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묘사되는 문학적 특징을 뜻한다. 갑골문 속에서 고대인들은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나거나,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번쩍이는 것에 시선을 뺏긴다거나, 보이지 않는 것에 성격을 부여해 세계를 묘사했다.

 

이것은 '진실'과 '실재'라는 골치 아픈 인식론의 문제와도 부딪친다. (...) 그들은 사물의 모습 밖에 있는 형태도 없고 상태도 없는, 눈의 시각적 기능만으로는 보기 힘들고 잠깐 반짝이며 지나 가버리는 사물들까지 포착했다. 세상 만물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하늘 가득히 날아다니긴 하지만 눈으로는 '거의' 볼 수 없는 사물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많고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로 여겨졌을 것이다. (92)

 

    나는 여기서 갑골문 하나를 더 소개하고 싶다. 바로 夢(꿈 몽)자다. 고대인들은 ‘꿈’을 침대에 누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꿈이라는 일상적이지만 무엇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비한 현상을 부릅뜬 눈으로 해석해냈다. 이것은 마치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꿈을 꾸는 눈과 비슷하다. 그들이 바라본 세상에서 그 대상들이 실재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갑골문에는 분명 “한 줄 한 줄 사실에 기초”(67)해 남아있다.

   저자는 현대에 TV, 유튜브 같은 영상매체처럼 더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늘어나면서, 문자에 담긴 고대인들의 지혜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말한다. 문자를 모르는 문맹이 아니라 독해가 되지 않는 새로운 문맹의 등장이 그 증거다. 우리는 사진이나 영상이 ‘실재’를 담아냈다고 여기고,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을 미신이나 사실이 아니라며 불안해한다. 글쓴이가 이렇게 갑골문을 통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상기시키는 것은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 알 수 없는 사실 앞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위축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리라. 탕누어는 갑골문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한다. 부디 세상을 듣고 느끼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夢의 갑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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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4. 26.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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