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김고은의 GSRC 프리뷰 - 개연성 없는 연애,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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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길드다> 청년들이 <길위기금>으로부터 고료를 받으며 글을 연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김고은의 GSRC 프리뷰'에서는 '길드다소셜리딩클럽'에서 함께 읽게 될 책을 세번에 걸쳐 책을 리뷰합니다.

 

 

 

개연성 없는 연애, 소설

 

 

 

 

 

 

어딜 가도 연애 얘기다. 기사에서는 연예인들의 연애담이, 노래에선 가수들이 겪은 연애의 기쁨과 슬픔이, 영화에는 누군가의 드라마틱한 연애 서사가 쏟아져나온다. 그래서 연애소설을 <길드다소셜리딩클럽>의 주제로 선택했을 때 책 선정에 난항을 겪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 근간 중 연애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목록 중에 두 사람의 연애가 중심소재인 소설이 손에 꼽았다. 대부분 ‘연애’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최은영의 단편 소설집『쇼코의 미소』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와 관련 없어 보이는 소설들이 잔뜩 들어있는 연애소설추천목록을 보면서 연애가 정말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더이상 연애는 고전적인 정의인 남자와 여자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섹슈얼한 사건에 한정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일상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아무런 맥락 없이도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같이 강렬한 연애의 흔적을 삶의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연인’이라고 부르는 관계에서도, 때로는 ‘친구’·‘선후배’·‘직장 선후임’이라고 부르는 관계에도 말이다.

"어떤 연애는 우정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같다." (「쇼코의 미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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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써는 알 수 없는 것들

「한지와 영주」의 주인공들은 『쇼코의 미소』에서 그나마 고전적인 연애의 정의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두 주인공은 프랑스 리옹에 있는 수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만났다. 영주는 처음부터 키가 190cm가 훌쩍 넘는 케냐인 한지를 눈여겨 보았다. 영주가 수도원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에는 그가 공부하던 대학원도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영주는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도원 장기체류를 선택하며 결국 그 자리에서 떠나왔지만, 여전히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경직되어 있었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때조차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주변을 많이 의식하는 영주에 반해 한지는 편안해 보였다. 둘이 함께 야간 보초를 서지 않았다면, 영주는 모두와 함께 웃고 떠드는 한지를 멀찍이서 쳐다만 보다가 결국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영주가 한지를 만나며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한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들었는지 알게 된다.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질학시대를 외우던 영주, 한지와 함께 하는 미래를 상상하던 영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다른 친구에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영주는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한지로부터 차단당한다. 영주에게 곁을 내어주고 남들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던 한지는 갑자기 영주를 못 본 척하고, 눈길을 피하고, 마지막에 영주가 주는 편지-노트까지 거절한다. 도대체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소설이 끝나도록 독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점의 영주는 끝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가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일들은, 특히 그것이 예외적인 상황일수록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

그날도 한지는 “내일 보자”라고 말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다정한 눈으로 나에게 너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혹은 그것을 단서로 해석해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가끔씩 한지는 내가 ‘단순하다’고 말했었다. 항상 웃으면서 말했지만, 어쩐지 말에 뼈가 있다고 느껴졌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한번은 한지가 “넌 참 단순하구나”라고 말하고는 “단순함은 좋은 거니까”라고 변명하듯 덧붙였었다. 나는 한지가 말한 나의 그 단순함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

   소설은 개연성을 갖는다. 전개되는 서사를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소설의 주된 사건을 과거의 사건, 등장인물의 성격, 사회적 상황 등과 맞물리게 만든다. 그래야만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쩌다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인지 이해하며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는 「한지와 영주」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납득하도록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의 서사가 아니라, 연애란 것에 얼마나 개연성 부족한가 하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연애라는 사건에는 큰 개연성이 없다. 어쩌다 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왜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 관계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런 개연성 없이 하늘로 붕 솟거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아무런 개연성 없이 꽁꽁 숨게 되거나 적나라하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연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삶 도처에 등장하는 연애가 얼마나 개연성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연애’에서 개연성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단정 짓고 마는 일에 제동을 건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떠난 사람이고 누가 남겨진 사람인가? 우리는 과연 「한지와 영주」에서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구분할 수 있을까? 한지가 먼저 차단했기 때문에 떠난 사람이고, 느닷없이 차단당한 영주를 남겨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더 이전에 한지가 영주로부터 차단당한 것처럼 느꼈다면, 혹시 한지가 남겨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떠남과 남겨짐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중 어디에 점을 찍고 이어서 개연성을 만들면 좋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떠난 것 같던 그 사람도, 홀로 남겨진 것 같던 그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로 마음에 짐을 안고 살아가게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어짐이 곧 모든 것이 끝남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누가 먼저 손을 놓았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헤어짐을 통감하는 사람은 헤어진 뒤부터 또다른 국면을 감당해야만 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짐으로 남아있다. 언뜻 보기에 이 짐을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상대와 거리가 생긴 순간부터 우리는 함께 겪었던 어떤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짐은 혼자만의 짐이 아닌데, 내가 내려놓아도 되는 것일까? 그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인 게 아닐까? 헤어진 상황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상대와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와 같은 문제는 난관에 봉착한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의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애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이 함께 해온 시간과 맺어온 관계로부터 연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옥이 자신의 사촌뻘인 순애언니의 손을 놓은 것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해옥의 그 커다란 짐은 자신이 떠나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오랜 세월 서로에게 삶을 의지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해옥은 평범하게 살아왔다. 순애를 식솔로 부릴 수 있을 만큼은 넉넉한 집안에서 큰 아픔 없이 자랐다.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고 회사를 다니던 해옥은 나이가 든 뒤에도 병원에서 입원치료도 부담 없이 받을 정도는 되었다. 반면 순애는 일생을 불운하게 살아왔다. 변변찮은 피붙이도, 의지가 되어줄 사람도 없이 자란 순애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던 건 어렸을 적 자신을 따랐던 강아지 한 마리와 해옥뿐이었다. 순애가 성인이 된 뒤에도 세상은 순애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순애가 결혼하고 임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애의 남편이 빨치산으로 잡혀가고,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다.

엄마[해옥]가 이모[순애]를 부담스러워했다는 사실은 이모를 아프게 했지만 그만큼이나 엄마 역시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순애 이모를 저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조금 멀리에서, 함께 살기

순애는 남루한 차림새로 아기를 포대기에 들쳐 엎고 해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옥이 매번 순애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옛날 그 시절의 강아지 이야기뿐이었다. 그렇게 연이 끊기기 전까지 순애는 그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해옥은 그 이상 어떤 이야기도 묻지 않았다. 해옥은 먼저 순애의 연락을 피해 떠났지만, 어쩌면 해옥이 먼저 옛날 그 시절로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순애는 해옥의 전화기 너머로 남겨졌지만, 어쩌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해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해옥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바램대로 엄마는 이모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가끔 엄마는 이모를 떠올렸다. 저녁을 준비하다 부엌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때나 한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작은 아기를 등에 업고 걸어가는 아기 엄마들을 볼 때 그랬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때로 인연이 정리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해옥은 결국에 순애를 떠났지만, 그러나 끝끝내 떠나지 못했다. 해옥은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다. 상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해옥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계속 질문했을 것이다. 자신은 번듯한 생활을 하며 순애가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외면한 것, 자신이 유일한 친구였을 순애를 살피지 못한 것을 말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 하나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곱씹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해옥은 순애를 떠나온 일을 더욱 마음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옥이 과거의 일에 머무르며 그곳에 숨었던 건 아니었다. 해옥은 여전히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살면서도 순애와의 일을 잊지 않았다. 짐을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당장이라도 해결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내려놓기 위해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지 않고 상황을 곱씹고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순애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순애는 죽던 날 영혼이 되어 해옥을 만나러 왔다.

죽음 직후에 사람의 영혼이 멀리 떨어져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엄마는 들어 알고 있었다. 이모가 열여섯 살짜리 아이의 얼굴로 엄마의 병실을 찾아왔을 때, 엄마는 엄마가 이미 오래전에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를 바라보는 이모의 얼굴은, 언젠가 형부의 연애편지를 읽을 때처럼 쓸쓸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이모는 물에 닿은 비누처럼 점점 작아졌다. “언니는 가벼워지고 있구나.”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짐을 덜어내는 것 혹은 용서받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종종 그런 경험을 한다.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고도 누군가를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물론 상황의 개연성을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론 상황의 개연성을 만들어줄 말·행동·만남과 같은 합리적인 고리가 하나도 없는데도, 오히려 애써 개연성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상대를, 상황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멀리서 각자 같은 짐을 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저만치 떨어져서 잊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짐과 함께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분명 그들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함께 살아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혼자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냐 혹은 용서를 구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해야겠지만, 짐을 내려놓거나 용서를 구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가능할 수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상대에게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혼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고, 대담하게 대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4. 22.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