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김고은의 GSRC 프리뷰 - 중고장터에서 만난 그놈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길드다> 청년들이 <길위기금>으로부터 고료를 받으며 글을 연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김고은의 GSRC 프리뷰'에서는 '길드다소셜리딩클럽'에서 함께 읽게 될 책을 세번에 걸쳐 책을 리뷰합니다.

 

 

 

 

 

 

 

중고장터에서 만난 그놈

 

 

 

 

나처럼 정기적으로 옷장을 살피고 정리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기적인 옷장 정리는 내가 특별히 깔끔하고 부지런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다. 옷을 너무 좋아하는 나 자신을 제재하기 위해 마련한 일일 뿐이다. 얼마 전에는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중고장터에 안 입는 옷들을 팔기 위해 ‘착용샷’을 찍었다. 나는 인터넷 쇼핑을 하는 사람들이 천 쪼가리인 ‘옷’이 아니라 착용샷에 담긴 분위기를 산다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사이즈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옷이나 디테일 컷이 없는 옷들이 잘 팔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택배박스에 담겨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판매자의 러블리한·세련된·섹시한 분위기이다. 그동안 중고장터에서 내 옷이 잘 팔리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히는데 익숙한 편이 아니라, 옷을 입은 모습이 예뻐 보이는 (옷이 예뻐 보이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진을 찍느라 애를 먹었다. 반나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낸 뒤에야 10벌의 착용샷을 찍을 수 있었다.
   확실히 옷만 올려두었을 때보다 연락이 더 많이 왔다. 그중에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연락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 그놈은 나에게 ‘피팅알바’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요즘엔 중국에서 싸게 들여온 옷을 착용샷과 함께 파는 경우가 있기에, 그 비스무리한 일을 맡기려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대화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사진의 용도를 묻는 나에게 “취미생활이죠^^ 꽃 감상이요.”라고 회신했다. “꽃?! 꽃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한 나는 그놈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오히려 그놈은 나에게 선심을 베풀기라도 하는 양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밥 먹을래요? 참, 여기 이런 사진은 안올리시는 게 좋아요~ 다 도용되거든요.” 문자를 받자마자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공포,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갑자기 불순한(?) 세계를 발견한 것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중고장터에서 길을 잃었다.

 

 

 

『길 잃기 안내서』, 에세이-역사서
『길 잃기 안내서』를 쓴 레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 한국에서 유명해졌다. 최근 그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처럼 나는 그에게 ‘에세이스트’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닛에게는 페미니스트와 에세이스트 외에도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역사학자, 예술 비평가, 환경운동가 레베카 솔닛. 그에게 붙는 다양한 수식어처럼 그의 글에서도 다양한 결을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책보다 가장 에세이집인 것 같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역사책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점도 그러하다.

 

 

   『길 잃기 안내서』는 한 학생에게서 들었던 질문에서부터 책이 시작된다. 독자는 책 곳곳에 사실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옛이야기와 누군가의 착각이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 다른 책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들은 이야기, 가짜 이야기, 남의 이야기로 묶여 있는 이 책을 우리는 과연 역사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역사책은 특정한 사건이 나열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사람들은 그 내용을 반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나의 사실’은 많은 것들을 누락시킨다. 사실 사람의 삶은 결코 정리정돈이 잘 된 “깔끔한 밭”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구불구불 난 길이나 물길”에 더 가깝다. 다양한 맥락이 단 하나의 사실이 되는 순간 풍부한 맥락과 경험은 일순간 소거되어버릴 뿐이다. 솔닛은 흔히 ‘역사적’이라 부를 법한 유명한 사건 하나 없이도, 그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사(인간 삶)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것도 솔닛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금방 잊혀졌을, 작지만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모아 조합함으로써 말이다.

진실을 말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어떤 사실들과 권위 있고 객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털어놓는 것이다. 진실은 사건에 있지 않고 희망과 욕구에 있는 것이므로, 내가 그동안 써온 역사들은 숨겨진 것, 잃은 것, 간과된 것, 너무 폭넓거나 형체가 불분명하여 사람들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못했던 것일 때가 많았다.

   솔닛이 가지고 오는 수많은 이야기와 인용문들은 하나의 역사나 하나의 사실이 아니지만, 애초에 그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의 사실일 필요가 없다. 솔닛은 역사가라면 응당 가질법한 이 같은 객관적 사실의 권위(“내가 말하는 것이 단 하나의 사실이야!”)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글을 통해 어떤 사실이 옳다고 주장하는 대신,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어떤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지 설명한다. 역사가의 권위를 통해 질문을 억제하기보단, 독자가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즉 솔닛이 나열한 것은 또 하나의 역사이자, 그가 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진실이 된다. 이것이 그의 글 스타일이 흔히 말하는 ‘역사책’과는 거리가 멀게, 소소한 예시와 시적인 묘사로 점철 되어 있음에도 그가 쓴 책이 역사책으로 볼 수 있는 이유이다.

 

 

 

네이버지도 속 “테라 인코그니타”
단 하나의 사실은 없지만 또 하나의 진실은 있다는 솔닛의 생각은 그가 길에 대해 고민할 때에도 중요한 생각의 뿌리가 된다. 많은 이들이 정해진 올바른 길이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때 문제는 그 길을 얼마나 잘 아느냐,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잘 알고 잘 찾기만 한다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에 지치기 시작했다. 대신 꼭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하나이냐고 묻거나, 어느 길을 가든 신경 쓰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을 찾지 않겠다는 선포는 앞선 세대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양극단은 서로를 꼭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길을 찾지 않겠다는 선포는 반드시 길을 찾으라는 압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솔닛의 이 책은 길을 찾자는 의견도 길을 찾지 말자는 의견도 아닌, 제 3의 의견을 내보이고 있다. “길을 잃자.”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문을 수용할 줄 아는 능력”(텍스트 25쪽)이다. 즉 길 잃기란 길을 잘 잃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거나, 길 잃기에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길 잃기가 모르는 것을 잘 아는 문제가 되어버리면, 길 잃기와 길을 잘 찾기는 단지 글자 수 정도의 차이밖에 없게 될 것이다. 오히려 길 잃기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나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바로 그때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길 잃기란 길을 찾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성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이같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에게 국한되어있던 시야에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이 있는 곳을 깨우치고, 자신과 세상이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렸을 적 차를 몰고 장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면 엄마는 항상 집에 있는 지도책을 찾았다. 지역을 넘기 위해 지도책의 몇 페이지를 넘나들던 엄마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작게 접을 수 있는 한 페이지짜리 전국 지도를 꼭 챙겨서 차에 탔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엄마는 종종 길을 헤맸다. 최근 운전면허를 딴 나는 몇 번이나 차를 몰고 지방에 다녀왔지만, 아직 단 한 번도 길을 헤매지 않았다. 내 운전 실력이 엄마의 운전 실력보다 뛰어나기 때문인 걸까? 그보단 네이버지도의 네비게이션 덕분이라고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사실 운전하는 동안 내가 변수를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네이버지도의 네비게이션은 실시간 도로현황, 바뀐 도로, 심지어 딱지 끊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하는 구간까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길을 잃어도 금세 새로운 길을 찾아주니 사실상 네이버지도의 네비게이션을 두고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의 오른쪽 어깨 부분은 깨알 같은 이름들과 강 하구들이 그려진 해안선이 있을 뿐이고, 현재의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훨씬 더 큰 글씨로 “테라 인코그니타”, 즉 ‘미지의 땅’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구는 옛 지도에서는 흔했지만(심지어 내가 갖고 있는 1900년 지도에도 아마존 일부 영역에 “탐사되지 않았음”이라고 적혀 있다.) 요즘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네이버지도엔 미지의 땅이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그 덕분에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번쯤 질문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다 알고 있는 것일까? 네이버지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명확한 것처럼 보이는 것, 단 하나의 사실인 것처럼 포장되는 것이다. 몇 번 국도를 타고, 어떤 톨게이트를 지나, 어느 출구로 나가면 된다는 명확해 보이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명료해 보이는 것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네이버지도는 그 도로가 어떤 땅 위에 들어선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아스팔트 아래 땅의 질감을 알지 못하고, 그 땅에 살던 동식물의 생태계를 알지 못하고,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네이버지도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맥락을 배제시키고 단순하게 만든 일부만을 전달할 뿐이다. 그러니 네이버지도에도 분명 “테라 인코그니타”, 즉 미지의 땅이 있는 셈이다.

 

 

 

'미지'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지 않는다
책의 각 장 사이에는 「먼 곳의 푸름」이라는 장이 배열되어 있다. 이 장은 하나같이 ‘미지의 땅’이 ‘미지’의 땅이기 때문에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실 ‘미지의 땅’은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헤매게 하고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부딪히게 한다. 우리가 흔히 ‘길을 잃는다’는 표현을 공포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솔닛이 인용하고 있는 고전영화 「현기증」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녀 간의 사랑은 교감을 통해 이뤄진다기보단, 외로운 열정과 쾌락으로 가득 차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두 남자주인공은 쾌락을 위해 한 여자를 바꾸려 들고, 결론적으로 여자주인공은 자신의 삶에서 추방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어두운 것 속에서도 그것의 생동하는 힘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솔닛은 그러한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는 사람이고, 이 책은 솔닛이 그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기존 주인공들 대신 조연인 ‘미지’에 주목한다. ‘미지’는 ‘미지의 땅’에서 쾌락을 좇아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물이 아니라, ‘미지의 땅’에서 그 가능성을 흠뻑 음미하는 인물이다. 솔닛은 머릿속으로 ‘미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극 대본을 써낸다.

 

 

마거레타[미지]는 세상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듯 했다.
「현기증」은 중력과 상승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영화다. 그러나 나는 마거레타[미지]에게 중력과 상승이 둘 다 즐거움이 되도록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추락하지만, 마거레타[미지]는 늘 상승세로 산다.

   「현기증」의 주인공들이 ‘미지의 땅’에서 추락했고, 그 추락은 개인에게 공포로 축소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솔닛이 만든 극 대본 「슬립」에서 주인공이 된 미지는 ‘미지의 땅’에서 추락할지언정, 그 추락을 세상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로 확장시킨다. 때문에 ‘미지’는 ‘미지의 땅’에서 자기 자신이 혹은 이 세상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에게 갇혀있기보단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알고 있는 것에 매몰되기보단 모르는 것을 마주함으로써 말이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미지의 땅’을 전부 개척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다가오는 불확실성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다만 우리는 「현기증」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 것이냐 혹은 「슬립」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 것이냐 하는 고민을 해볼 수 있다. 알 수 없는 것을 공포로 여길 것인가? 혹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음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여길 것인가? ‘미지의 땅’을 정복하지 못해 불안해할 것인가? 혹은 ‘미지의 땅’을 만나 자신만의 협소한 세계로부터 벗어나며 해방감을 느낄 것인가?

사람들은 늘 등정을 정복으로 묘사하지만, 실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세상이 점점 더 커져서 우리는 그에 비례하여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우리가 헤맬 공간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압도되지만 해방감도 든다.

 

 

 

중고장터의 그놈은 성추행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도리어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요지는, 어차피 사람들이 다 사진을 도용하는데에 반해 자신은 오히려 정당하게 돈을 주고 사려고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 주변에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돈이면 다 되는 게 아니냐 말하는 이런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심지어 자신이 선의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걸까? 대화 끝에 그 사람은 무례하고 일방적인, 그래서 폭력적이었던 본인의 모습에 대해 인정했다. 그리곤 이런 대화 자체를 처음 해본다며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했다. 이 사람은 외롭고 순진했고, 그래서 멍청했다. 어쩌면 사회 연결망이 별로 없는 이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온라인에서 성추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급격히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애진즉 더러워졌었던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는데 거기에 그 사람에 대한 연민까지 덤으로 엎어졌다.
   나는 인스타그램에 그 사람과의 대화를 캡쳐해 “세상 참 잘 돌아가네~”라는 캡션을 붙여 업로드했다. 내 게시물을 친구들이 봤다면 나를 위로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 분노와 정당한 피해의식으로 기분을 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 안 가 그 게시물을 삭제했다. 게시물을 올렸을 땐 분명 ‘그놈’이었는데, 잠시 뒤 그놈이 ‘그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분명 한동안 나는 그놈을 매도하고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계속 그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마도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은 탓이기도 할 터이지만, 그보단 모르는 세상이 갑자기 내 눈앞에 닥쳐왔을 때, 발 딛고 서 있었던 지반이 주저앉았을 때 무작정 외면하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배움은 머리의 영역이라기보단 몸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속에서 한 발 더 내딛은 끝에 맛보았던 해방감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루가 지나자 그 사람에게 받았던 더러운 기분과 우울함은 꽤 옅어졌다. 대신 새로운 ‘질문’이 하나 남게 되었다. “음… 이미 인터넷에 배포된 나의 착샷, 이 빈곤한 이미지는 풍화를 거쳤을 때도 여전히 내 사진이라고 볼 수 있을까?”

 

Writings/김고은의 [당사자 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3. 16. 15:01
  1. 글 넘 좋아여....!

    키리뿡 2020.03.2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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