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책 읽습니다 ⑫]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말한다 - 장성익,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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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1. 도시가 탄생한 뒤 그리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도시의 침묵을 알아차렸다. 도시에서의 삶은 이전보다 외롭고, 각박하고, 파편적이다. 한동안 그것들은 그저 견뎌내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곧 그러한 침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발명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 형식의 이름을 다시 ‘마을’이라 했다. 언제부터인가 도시 곳곳에서 말해지는 ‘마을’의 이름은 도시 한 가운데서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슈퍼 아저씨’, ‘옆집 아줌마’, ‘아래층 할머니’ 등 한동안 익숙함의 루트에서 빗겨난 채 낯설음의 영역에 방치되어 있던 관계들을, 과거 시골 마을들이 그러했듯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망을 다시 이어..

[책 읽습니다 ⑪] 도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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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1. 도시는 난산 끝에 태어났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의 감시와 탐욕스런 투기꾼들의 눈치싸움, 변두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은 끝에 남겨진 땅 – 그 땅 위로 탐식하듯 허겁지겁 올라간 빌딩과 아파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도시의 모습이다. 그런 까닭에 도시에는 항상 ‘메마른’, ‘삭막한’, ‘차가운’, ‘외로운’ 따위의 형용사들이 달라붙는다. 우리는 제각기 흩어져 홀로 부유하는 도시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또한 그 상상을 실제로 살아간다. 그것이야말로 ‘도시다움’이다. 그리고 ‘도시다움’에 익숙한 나와 아이들에게 『원미동 사람들』 이 그리는 도시의 모습, 80년대 부천시 원미동의 풍경은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양귀자는 『원미동 사람들』 작가 후기에서 그녀가 영위했던 원미동..

[책 읽습니다 ⑨]가족이라는 ‘홈 패인 공간’ - 조나던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미스 리틀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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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1. ‘성공으로 향하는 9단계’를 강의하는 아버지는 보잘 것 없는 출판 계약 하나만 바라봐야 하는 실패자다. 어머니는 몇 주에 걸쳐 저녁 식사를 패스트푸드와 종이 식기로 때우는 중이다. 할아버지는 마약 중독자에다 아이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섹드립을 일삼고, 문학교수이자 게이인 외삼촌은 동성 애인에게 차여 자살을 시도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런가 하면 아들은 항공학교에 들어가 파일럿이 되겠다며 아홉 달째 침묵시위 중이며 일곱 살짜리 막내딸은 오매불망 미인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만을 꿈꾼다. 대충 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이 콩가루 집안이 바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가족이 정상이 아니란 건 비단 우리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등장인물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가족이 ..

[책 읽습니다 ⑧]어머니라는 ‘익숙함’ - 김고연주, 『우리 엄마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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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0. 문탁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혼 여성이 상당히 많고 그분들 중 대부분은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문탁네트워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니 가끔은 나와 함께 공부를 하거나 여타 활동을 함께하는 선생님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로 인해 나는 때때로 매우 미묘한 상황에 처한다. 한 번은 세미나 시간에 다른 선생님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가르치는 녀석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녀석은 그 선생님의 자녀이기도 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 아이의 어머니에게도 해도 될까? 무릇 아이들에게는 다른 어른에게는 말할 수 있..

[책 읽습니다 ⑦]아버지라는 ‘두려움’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커, 『오이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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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글에서 사용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볼프강은 수학은 서투르지만 수영 하나는 자신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볼프강의 집에 느닷없이 왕을 자칭하는 자그마한 오이 모양의 괴물 하나가 나타난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오이대왕’으로, 볼프강네 집 지하에 사는 쿠미-오리란 정령들의 왕인데, 발칙하게도 그들이 자신을 쫓아냈으므로 볼프강네 집에 정치적인 망명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흉측한데다, 무엇보다도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 모두가 오이대왕을 내키지 않아 한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누나도 볼프강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막내 닉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 다만 단 한 사람, 오직 볼프강의 아버지만이 별다른 까닭도..

[책 읽습니다 ⑥]독립이라는 ‘자유’ - 라헬 하우스파터,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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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글에서 사용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여름이 왔고, 아이들과의 책읽기도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다.시즌이 바뀐 뒤의 첫 시간에는 으레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자기소개를 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전부터 있던 아이들은 다 아는 사람들에게 굳이 자기를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새로 온 아이들은 낯을 가리느라 제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나는 일종의 타협점으로써 아이들에게 딱 세 가지만 말해볼 것을 제안했다. 이름, 나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 이렇게 말해야 할 것들을 정해주면 아이들은 어렵잖게 대답한다. 그리고 처음 오는 아이들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대개 다들 같다. “엄마가 가보라고 해서요.”“저 몰래 엄마가 ..

[책 읽습니다 ⑤]봄을 마치며 : 무지라는 ‘평등’ -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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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글에서 사용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학교’를 다루었던 봄 시즌을 마칠 즈음 나는 그간 던진 질문들을 되돌아보았다. “선생은 어떻게 아이들과 만나야 하는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아이들은 학교를 왜 가는가.” 새삼 아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싶었다. 분명 밑도 끝도 없는 물음으로 느껴졌으리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근본적인 것을 건드리는 질문들은 대개 그러하다. 당혹스러움과 곤란함,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있다. 그것은 앞선 질문들을 모두 아우르는 질문이며, 그럼으로써 교육에 있어 가장 ‘극단적’인 담론들을 만들어낸 질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 질문으로부터 학교가..

[책 읽습니다 ④]학교가 만들어내는 ‘바보’ 존 테일러 개토 -『바보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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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글에서 사용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이쯤에서 슬슬 학교 제도에 대한 나의 견해를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의 학교』 대신 『수레바퀴 아래서』를 고른 시점에서 이미 들통 났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나는 학교 제도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몇몇 교사들의 인성이나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몇몇 학생들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가 만들어질 때부터 내재되어 있는 태생적인 결점들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그래서 대체 –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질 때에는 매우 조심스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본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질문이고, 까딱하면 질문하는 사..

[책 읽습니다 ③]삶이라는 ‘가르침’ - 김명길,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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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는 봄에 읽은 책들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다. 나이 든 교사가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며 쓴 수기라는 점에서는 『학교의 슬픔』과 같지만, 아이들은 프랑스 선생님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보다는 우리나라 선생님의 우리나라 학교 이야기를 더 즐거워했다. ‘우리 학교에도 이런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읽으며 아이들은 이 말을 참 많이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드는 구절로 골라온 부분도 서로 비슷비슷했다. 몇 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똑같은 부분을 골라왔다. 바로 이 부분이다. 「수진이는 영어 심화반에 편입되었다. 안 한다는 것이 통하지 않는 이 학교에서 수진이 뜻과는 상관없이 수업을 받아야..

[책 읽습니다 ②]선생이라는 ‘일’ -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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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청년길드)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나를 보통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녀석들은 쌤. 딱히 그리 부르라 말한 적은 없지만 어느 사이엔가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마 녀석들이 느끼기에 이 시간은 책을 읽고 덤으로 이것저것 배워가는 시간 정도일 테고, 그것들을 가르쳐주는 나는 자동적으로 선생님이 된 것이리라. 그러니까 녀석들에게 선생이란 곧 가르쳐주는 사람인 셈이다. 헌데 때때로 드는 의문은 과연 선생에 대한 녀석들의 정의가 합당한가 하는 점이다. 수업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아이들과 시시한 잡담과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한 느낌과 인상 깊게 읽은 부분 그리고 그 까닭을 나눈다. 책 속의 질문들을 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