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 강학원 시즌2 두번째 시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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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로드 날짜 : 7/15

글쓴이 : 규혜

 

 로지의 책에는 휴머니즘으로 발생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학적 측면을 다루면서도, 실제 유럽중심주의의 휴머니즘으로 발생한 실제 역사에 대한 언급은 삭제되어있다. 사적 유물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들을 구성해왔던 모든 존재들에 대한, 그 존재들의 사라짐에 대한 언급이 없다. 휴머니즘이 어떤 존재들을 실제로 죽여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죽음을 외면해왔는지, 어떻게 지금까지도 외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선 이야기되어야 나는 유럽에서 주장하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중심주의의 휴머니즘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선의 사과이다. 그리고 그 사과가 이론과의 정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사과냐고,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이론으로 설명되기 이전에 평평한 존재이다. 하루에 얼마나, 혹은 1년에 얼마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까. 우리는 호명되기 이전에는 평평한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호명이 인간 종의 위계를 만들어내며, 그 호명은 이름 불려진다는 관계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생성된다. ‘인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호명’의 관계 속에서 인간 종의 위계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로지가 짚은 것처럼 ‘인간’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 한정된 인간들이 현재까지 호명되어지고 타인을 호명해온 것에서 고전적 휴머니즘의 문제가 고스란히 선진자본주의의 탈-인간중심주의로 이행된 것은 아닐까. 인간 사이의 호명 속에서도 위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호명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위계를 나는 문화자본적으로 받아들인다. 유럽문화는 분명하게 문화자본에 있어서 우위를 지니고있다. 그리고 그 문화자본의 우위 속에서 로지는 포스트휴먼을 논의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 나고 자라서 프랑스 소르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네덜란드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학제시스템의 물질 속에서 단단해지며, 자신들 또한 유럽중심주의의 학제시스템 속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가게 만드는 물질적 연결망이다. 그리고 그 유럽중심주의는 비유럽 또한 유럽을 중심으로 재편하게 만든다는 것에서 그 위험성이 반드시 유럽중심에서 폭로되고 해결되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사과는 성찰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한길이가 책 서문을 하나 보내주었다. 서문을 쓴 저자도 신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그는 신유물론을 중심으로 여러 학문분과의 교수와 박사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모집하여 세미나를 진행해가고 있다. 대학원 시절에 나도 이 세미나에 참여했던 적이 있어서 여전히 그 세미나를 운영하는 카톡방에 남아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학을 다녀왔고 유럽 및 미국에 있는 대학과 연구소에 있으며, 그들의 자녀들도 유럽과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한국 대학과 연구소들에서 학문분과들을 이루고 있는 행위자들이다. 이 방에서는 포스트 이론이 목적하는 유럽중심주의의 해체와 신유물론적 접근과 이들의 삶의 실제가 너무나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나의 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가 이 책을 통해 느끼는 기만이 비단 이 책에서만 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제 시스템 밖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본 세미나가, 왜 학제 시스템 속에서 첨예한 이야기들을 그대로 따라가야하는지부터가 불만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유럽에서 나온 모든 학문적 성과들을 비판하고 몰살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모든 것을 불태웠던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적어도 유럽중심주의를 반대하고, 고전적 휴머니즘에 기반하여 포스트휴먼을 받아들이는 탈-인간중심주의를 비한파고자 한다면, 자신과 유럽중심주의를 분리시키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성찰에 기반한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성찰과 비판은 낭만적인 것이아니라, 유럽중심주의를 구축하고 있는 학제시스템 속에서의 이론과 그 이론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연결망으로 들어가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의미한다. 한국 학자들을 이야기한 것은, 내가 경험한 한국 학과 시스템은 이미 신자유주의적 학제 시스템 속에서 기업으로부터 스폰을 받는 까닭에 기업친화적이며 인문학은 나라의 사업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대학안에 있는 학자들의 신유물론의 이론은 자신들의 이론들이 이러한 대학환경에서 어떠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반드시 성찰하고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중심주의가 만들어낸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치경제의 위계와 종적 위계를 비교한다면, 전자는 고전적 휴머니즘에 속하는 것 같고, 후자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의제에 속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두개가 융화되어 그 위계가 해체되지 않는다면 결국 포스트휴머니즘의 의제도 유목적 경계선이 아닌 이원론 세계관의 이분법적 세계 중 한쪽 안에 자신들을 위치시키고 일원론적 세계관이 가능하리라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될 것이다.
  세미나가 끝나고, 문제제기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나의 발제 이야기를 세미나 멤버와 더 나누었다. 내게 로지를 ‘우쭈쭈’하며 읽어가면 안되겠냐고 물어봤다. 논의의 어려움과 반성가능성 속에서도 자신의 논의를 지속해가는 로지를 ‘우쭈쭈’하면 안되겠냐고 했다. 마치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는 남성들을 ‘우쭈쭈’해주어야 한다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나는 또 화를 내버렸다. 아시아인인 내가 왜 유럽인을,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을 듣지도 못한 채 내가 왜 ‘우쭈쭈’해줘야하냐고 했다. ‘우쭈쭈’는 피해와 가해의 역학 속에서 피해의 영역에서 무엇을 문제화하며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아왔는지를 외면한 채 가해의 입장에서만 행해지는 선의를 피해의 영역에게 일방적으로 이해하기를 요청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로지가 직접적으로 가해를 했다는 건 아니다. 나또한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 정치경제와 순환적 지구에서 ‘직접적 인과관계’라는 것은 환상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개념을 둘러싸고 모든 종이 피해와 가해의 역학으로 묶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예전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오늘날 어떠한 지평을 만들어냈는가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윤리학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휴먼의 논의에서 책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배려나 역지사지가 책임에서 발하는 행동이 아닌 사과가 책임으로 발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종적 위계에서는 어떠한 존재든지 그 차이의 역학 속에서 한 순간은 상위의 위계에 존재하게된다면, 나는 모든 종에게 사과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 번은 ‘종’으로 인식되었던 모든 약자의 존재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이 사과는 발제문에서도 밝혔듯이 나 또한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존재의 사과와 성찰은 피해와 가해가 각자 단일한 존재로서 머무르지 않고, 복합적인 경계에서 유목하는 서로의 조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피해와 가해의 사실이 분명한 ‘폭력’은 유목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조에 간에 확실한 종적 경계를 짓는 행위로 어떠한 예외 없이 다뤄져야할 것이다.

 

묻고 싶다.
-되기가 하고 싶은 건지, 하고 싶다면 왜 하고 싶은 건지, -되기라는 이론은 어떠한 해석의 정치에 위치해서 우리 각자의 연결망에 위치하게 되었는지, 소비를 필수적인 생존 요소로 작동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에서 소비없는 ‘-되기’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는 소비라는 이름 밖에서 다른 종과의 관계맺기가 어떻게 가능할지... 등등

 

  최근에 가장 충격적인 뉴스는 코코넛을 따는 원숭이에 관한 뉴스였다. 태국의 어느 농장이 원숭이를 훈련시켜 코코넛을 따도록 원숭이 노예를 만들었다고 했다. 원숭이들은 목에 줄이 매인 채, 코코넛을 기계적으로 따야만 했고, 코코넛을 따지 않을 때엔 지하철의 한 좌석의 크기만한 정육면체에 들어가 있어야했다. 원숭이들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보였고, 너무나 불안정해보였고, 계속 무언가 말(은유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짐승의 ‘울음’이 아니라 그들의 입에서 성대의 울림을 통해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는 잔인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제국주의적 폭력에 의해 흑인들이 당했던 일들이었고, “세 번째 천년의 시작”에서는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제3세계에 속했던 태국이 이제는 인간이 아닌 동물을 노예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더 저렴한 것들을 찾아가는 자본주의(‘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참고)의 생존 방식인 것 같다. 선진자본주의의 탈-인간중심적 현상들은 문화적 위계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간을 모사한 SF의 영화들에서 비단 인간과 다른 종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만을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수많은 SF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의 계급적 문제, 계층적 문제들이 인간 종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깊게 연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재현 논의로 흐를 수 있을 것이며, 여러 방향으로 재현의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 선택이 어떠한 연결망 속에 위치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야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태국의 원숭이는 태국의 코코넛 내수시장만으로부터 구축된 구조가 아닐 것이다. 전세계적 시장으로 여러 주체들이 연결된 복합적 연결망 속에서 드러난 현상일 것이다. 동물이 수확하는 식물을 먹게 되는 경제 순환 속에서, 채식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히 어떤 종을 소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비의 구조와 연결망이 어떻게 조직되어있는지를 알아가야하는 환경에 우리가 처해있음을 드러내야한다는 정치적 행동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원숭이 뉴스는 ‘하나’라는 양에서 충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뉴스 매체가 다루는 전쟁 현장과 난민 현장의 ‘클립’들을 보고 있으면, 수많은 전쟁의 기계들과 카메라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집, 거리, 나무, 동물들에게 포스트휴먼 이론이 어떤 의미를 생성시키고 실천하게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왜 모든 존재-되기가 아니라 동물/지구/기계여야하는 걸까. 여전히 포스트휴먼 인간도 종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로지의 선택이 부르주아적이라 느껴진다.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가 그녀의 연결망 속에서 행해진 선택일 것이다.

 

 

시간 부족으로 더 논의하지 못한 나의 발제 이야기를 시간적으로 세미나-이후로서 작성한 후기(post-stories)였다.
  1장과 2장을 관통해서 가장 흥미로웠던 선진자본주의의 탈-인간중심주의와 포스트휴먼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사실 나는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이론은 언제나 무결한 것이 아니며 중립적인 것이 아니어왔다.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이 되었고, 이러한 휴머니즘적 해석을 비판하는 포스트휴먼 또한 중립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언제나 해석의 정치 속에 있어왔던 이론이었다. 가장 프론티어에 있는 이론들은 실제로 그 이론이 프론티어인 것이 아니라, 가장 프론티어라 해석하게 만드는 정치가 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포스트휴먼이론이 지난 유럽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을 비판하는지와 동시에 포스트휴먼이 다시 ‘인간’을 유럽중심주의적으로 재편하고 있는지는 아닌지 비판적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두번째 시간에 우리는 로지가 써둔 문장들의 맥락이 우리 멤버들이 각자 이루고 있는 지식의 연결망과 얼마나 다른지 확인했다. 앞서 말한 이론의 해석 정치에 있어서, 현재 우리 각자의 연결망 속에서 반드시 그녀의 논의를 적확하게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지식을 읽기 위한 그녀의 연결망으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도킹할 필요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인위적으로 도킹한다는 것은 그 모든 유럽지식의 흐름과 그 흐름을 만들어낸 역사를 이해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져야할 것으로 인식해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발제의 형식 또한 달라도 되지 않을까 싶다. 글이라는 형식으로 우리가 편입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그 지적 연결망을 드러내기 위해서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필요하고 그 레퍼런스들은 이미 학제가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만들어져있는 특징으로 인해 유럽중심주의로 편입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세미나 마지막 시간에 영이 얘기해준 영상을 예로 들어본다면, 글이 아닌 영상을 보며 우리가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이고, 음악을 들으며, 글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서 -되기를 감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혀 다른 맥락속에 있는 글을 써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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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7. 30.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