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P] 목공 인문학(4,5), 도구와 마감: 자율적 공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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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프로젝트(화요P)란? 길드다의 멤버들이 각자 고민하고 있는 지점,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각자 달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업로드 합니다. 누군가는 텍스트랩 수업을 위한 강의안을 쓰고, 누군가는 길드다 이슈를 발전시키기 위한 글을 쓰고, 또 누군가는 넘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훈련을 위한 글을 씁니다. 이를 위해 멤버들은 매주 모여 글쓰기 피드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지원은 텍스트랩 시즌4 목공 인문학의 강의안을 연재합니다.

 

 

 

목공 인문학(4,5)

도구, 마감: 자율적 공생을 위하여

 

 

 

‘도구Tool’는 분명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혹자는 인간을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목공수업에서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도구의 사용법을 알아야 한다. 목공이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나무를 변형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개별 도구의 용도나 그것의 구체적인 사용법은 아니다. 나는 오늘 도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던 사상가, 이반 일리치를 통해 인간의 역사에 필연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이 다양한 도구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유의 할 점은, 도구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때, 그것이 망치와 끌, 대패나 톱과 같은 ‘공구’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도구는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이동 수단이나 의료 수단, 교육 수단…병원이나 학교와 같은 제도를 포함한 더 넓은 의미의 도구라 말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일리치의 이야기를 가져와 도구를 보다 확장적인 개념으로, 또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까닭은 그것의 사용이 애초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오늘 날 인간의 삶이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던 도구로부터 소외되고, 환경이나 인권…등의 문제들을 발생시키고…―그리고 우리가 보다 확정적 개념으로써 도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 손에 잡히는 공구를 더 잘 사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두 개의 분수령

 

일리치에 따르면 도구 발전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분수령을 거쳤다(『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첫 번째 분수령은 근대적이고 간단한 도구가 인류 복지에 널리 기여할 수 있게 되는 시대로 진입한 시점, 두 번째는 1955년을 전후로 한 도구 과잉의 시점이다. 그는 두 시점을 비교, 분석하면서 과잉발전한 도구가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고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한다.

 

첫 번째 분수령, 그것은 단연 산업화와 관련된다. 석탄, 석유의 사용과 증기기술의 발명은 간단한 도구들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편리하고 빠른 이동, 값싼 물건들의 공급, 위생적 삶,…. 인간들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자유를 가진 것처럼 여겨졌다―이동 수단의 발전을 통해 누구나 내가 살던 동네를 벗어나 멀리 여행하게 될 자유를 가진 것―. 그러나 그러한 변화와 동시에 인간의 인식도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공존과 공생의 파트너였던 자연은 지배와 이용의 대상이 되었고,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욕망의 대상이 된 어머니-자연. 그것은 프로이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그러한 욕망의 발견은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만들었고,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욕망은 ‘가능성’으로써, 여전히 인간 삶의 복지에 기여하고 있었고, 실제의 삶에서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곧 목적과 수단이 전환되는 두 번째 분수령이 나타난다. 인간 삶의 속도와 공간적 범위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은 이동수단(기차)의 발명은 ‘속도’에 대한 욕망을 무한대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동수단(자동차)을 가지게 되자마자, 속도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월요일 출근길의 경부고속도로는 그야말로 ‘반反속도’가 아닌가.

 

 

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이동수단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병원은 어떤가. 일리치는 불과 100년 전인 20세기 초를 특정하며,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지역 공동체들에서 주술사가 의사로 활동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긴 역사 속에서 경험적으로 획득한 지혜를 가지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때론 오래된 치료의 방식이 자격을 획득한 의사들과 비교해 같거나 때론 더 높은 비율로 치료에 성공한다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의사의 자격과 국가제도가 맞물리며 통계학적 지식이 생산되는 시점과 궤를 같이한다. 사람들은 가시적인 결과―숫자를 통해 유아 사망률과 인간의 평균 기대 수명, 병의 이름과 치료제의 가격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새로운 치료법이, 도구와 기술이, 의심 속에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의 효과를 전 인구의 차원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디어를 통한 활발한 캠페인은 그러한 ‘믿음’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현대인들에게 건강은 위기가 되었고, 그것의 유일한 해결책은 병원이 되었다. 그러나 병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설적으로 병을 만들고 있었다. 제약회사의 음모, 의료사고나 병원병과 같은 흔히 이벤트성 사건이라 여겨지는 것들―사실 이 또한 매우 일상적이다―을 제외하더라도, 면역력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볼 수 있다. 일리치에 따르면 20세기 초 유럽의 의료계, 의료협회에서는 태어나는 모든 영아를 환자로 간주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면역과 관련한 다양한 약물이 투여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부모세대보다 평균적으로 1.5배에서 많게는 2배가량을 더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무너진 면역체계를 병원을 통해 보충 받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인위적 면역은 내성이 강한 인위적 병을 만들고, 병에 대한 약을 만들고, 병을 만들고…반복. 여기에 투여되는 막대한 연구, 개발비용과 환자가 치러야 할 병원비는 애초의 목적을 잃고 병원과 의료계 그 자신의 반복을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한 것이었던 의사의 도구와 기술, 병원, 의료제도는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대로 인간을 수단 삼는다. 이런 방식의 도구-인간의 사이클의 결말은 필연적으로 도구에 의한 인간의 공멸共滅을 상상하게 한다.

 

제도화와 동시에 도구의 사용은 자격을 가진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모두가 사용할 수 있던 단순한 도구는 이제 특정한 언어, 특정한 지식, 특정한 기술을 전문화된 교육과정을 거친 소수의 사람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교환, 즉 도구와 기술의 사용이 서비스화 되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돈을 내면 그것에 대한 지식과 경험 없이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를 ‘현대화된 가난’이라 부른다. 전문가들에 의한 도구와 기술의 독점, 그리고 이어지는 발전은 분명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물건을 더 싼 값에 공급하는 환경을 만들었지만, 그것과 동시에 돈을 벌지 않으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고립된 신체로 만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체가 되었다.

 

공생의 도구, 자유의 도구

 

목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모 세대가 목공 수업을 하러 와서 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 재미있는 것은 “우리 아버지” 혹은 “우리 큰아버지”, “삼촌”이 “목수였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 당시에는 목수가 많았다.”는 것. 추측컨대, 그것은 실제로 목수가 많았던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누구든 뭔가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 날 내가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목수라고 소개하면, 그것은 매우 드물고 신기한 일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는 물론 제조업이 과거에 비해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우리가 사용하는 가구가 전문 목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지게 된 것과 큰 관련을 가지겠지만, 다른 한편 그 기술이 자격으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 되기 시작한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동네에나 한명 쯤 있던 주술사가 의사로 대체되는 과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이다.

 

일리치는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지적을 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실상 도구는 더 단순화되고, 누구나 다룰 수 있는 것이 되어 가는데 그 지식과 자격의 획득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매우 어렵고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 관문을 통과한 자만이 전문가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나서 그가 주로 하는 일은 매뉴얼에 따라 약을 처방하거나, 기계의 전원 버튼을 누르거나, 매뉴얼대로 되고 있는지를 감수하는 일이다. 이때 그를 여전히 전문가로 만드는 것은 도구를 사용할 자격 그 자체, 그리고 전문화된 지식이다. 그러나 전문화된 지식은 공유될 수 없는가? 의료 전문가는 환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더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는가? 교육 전문가는 아이들의 심리에 대하여 아이들의 부모와 토론할 수 없는가?

 

우리는 분리되어 전문화된 각자의 분야에서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인지, 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목공의 경우에 한정하여 생각해본다면, 나는 감히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목공 도구의 발전은 무언가를 나무로 만드는 일을 누구나 가능할 정도로 쉽게 변화시켰다. 나무 뿐 아니라 최근 거의 모든 제조 분야에서 사용되는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커팅기계는 컴퓨터 수치제어를 통해 그려진 그림대로 드릴 날이 움직이며 그 재료를 잘라주고, 구멍을 내고, 파준다. 이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그림, 그 그림을 그리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한 일반인들이 몇 번의 시도만 한다면 누구나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아주 친절하고 직관적으로 만들어져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CNC로 재단한 뒤에, 전동드릴과 전동드라이버를 이용하여 결합하면 되는 것이다. 기계는 얼마냐고? 3D 프린터와 마찬가지로 기계 값이 점점 떨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각 지자체마다 만든 ‘창조경제혁신센터’에는 이 기계를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러나 실정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왜? 이 간단하고 직관적인 지식조차도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먼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일이 이미 너무 많이 세분화된 다양한 각 분야에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 큰 변화가 요구된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산업, 국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단하게 고정되어버린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함께 지난한 과정을,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일리치 또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CNC의 예시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도구의 발전이 이미 그러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도구 발전의 첫 번째 분수령과 두 번째 분수령의 ‘사이’, 도구가 애초의 목적을 상실하기 전의 그 지점으로 우리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혹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 제도적인 변화, 시도를 촉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자율적 공생을 위한 역량

 

그러나 제도 변화의 촉구라는 멀고 지난해 보이는 그 과정과 동시에, 이미 우리가 실행하고 있거나 실행할 수 있는, 우리의 실제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가 때로 특별한 기술적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집안일을 하거나, 요리를 할 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전수된 지혜를 동원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기로 한 날 조림을 하기로 했는데 간장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를 몰라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면 부모님은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자작자작하게 넣어~” “그럼 파는 어느 정도 크기로 썰어야 해?” “숭숭 썰어 넣어야지” 그러나 ‘자작하게’나 ‘숭숭’이라는 것은 ‘양’이라기보다는 ‘질’적인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경험적인 것. 주관적인 기억. 때로 우리는 그러한 말에 화를 내고 차라리 유튜브를 켜지만, 어떤 때에는 그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왜냐하면 똑같이 생긴 재료도, 똑같은 냄비도, 똑같은 불의 세기도, 무엇보다 똑같은 조림도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지식은 일관되고 수치화된 지식으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할 때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앞선 예시에서 자격을 가진 의사와 병원의 등장은 그러한 수치화, 통계적 지식을 기반으로 가시적인 결과, 누구에게나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숫자를 제공함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수치화되어지지 않는 수많은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지식, 혹은 지혜들로 구성되어있다. 전문가적 사회는 이 모든 것을 수치화해야 할 대상으로 삼겠지만, 이는 곧 개인적 삶의 완전한 무능으로 이어진다. 구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일리치가 말하는 풍요, 그리고 인간의 역량이란, 바로 이 수치화 되지 않는, ‘감’을 익히는, 실제적 삶을 확대하는 것이다.

 

제도와 역량은 동시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나는 목공에 있어서 이러한 ‘감’을 가지는 요소가 바로 마감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대패질, 사포질과 칠이다. 도구가 발전해도 여전히 원목을 마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손이 닿을 수밖에 없는데, 이때 도저히 수치화 될 수 없는 몸의 사용이라는―사포를 어떤 힘으로, 어떤 방향을 가지고, 어떻게 밀것인가, 붓을 어떻게 잡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과정이 존재한다. ‘1분에 40회의 속도’로, ‘10kg의 무게로 누르며’ 따위의 이야기(실제로 이런 식으로 교육하는 곳도 있다)는 그 말에 숫자가 들어갔을 뿐 ‘자작하게’나 ‘숭숭’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이다. 모두의 키가 다르고, 팔의 길이가 다르고, 힘이 다르고, 그가 마감해야 할 나무의 질과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서로 달라서,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늘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도구는 애초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나무를 마구 베어서는 안 되겠다는 당연한 사실을, 당장 면역력을 보충하여 수명을 늘리면 건강이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똑같은 교육을 받으면 모두 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리하여 ‘감’을 찾을 때 제도 또한 바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일리치의 책 『Tools for conviviality』 는 직역하면 ‘기쁨을 위한 도구’다. 그러나 국내에는 두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하나는 ‘성장을 멈춰라―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그리고 또 하나는 ‘절제의 사회’다. 실제로 일리치는 현대 사회의 두 번째 분수령은 인간 사회를 절제불능의 사회로 만들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이때 ‘절제’라는 말은 자칫 금욕적인 느낌을, 부자유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앞선 이야기의 맥락과 같이 자유가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고 할 때 절제, 혹은 달리 말해 멈추는 일, ‘감’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역량에 따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절제란 더 큰 자유를 위한 단계적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역량이며, 자유다.

 

우리는 수업에서 한편으로는 CNC를 통해서 발전한 도구가 얼마나 만드는 일을 쉽게 할 수 있는지 경험할 것이며, 동시에 마감을 통해 ‘감’과 ‘역량’을 경험해볼 것이다. 이것이 자유, 혹은 공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는 차차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20. 1. 10. 1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