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P] 목공 인문학(3), 재료: 적합함adequate - 오늘날 나의 감각을 발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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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프로젝트(화요P)란? 길드다의 멤버들이 각자 고민하고 있는 지점,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각자 달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업로드 합니다. 누군가는 텍스트랩 수업을 위한 강의안을 쓰고, 누군가는 길드다 이슈를 발전시키기 위한 글을 쓰고, 또 누군가는 넘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훈련을 위한 글을 씁니다. 이를 위해 멤버들은 매주 모여 글쓰기 피드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지원은 텍스트랩 시즌4 목공 인문학의 강의안을 연재합니다.

 

 

 

목공 인문학(3)

재료: 적합함adequate, 오늘날 나의 감각을 발견할 것

 

 

나무는 몇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수축, 팽창 ②휨, 틀어짐 ③갈라짐 ④곰팡이, 벌레를 들 수 있다. 나무가 겪는 변형은 모두 나무 고유의 성질이 물과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동서양을 막론, 전통 가구는 모두 이러한 나무의 성질을 최대한 고려하면서―나무라는 재료가 가진 한계 안에서―나름의 멋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가구들은 대부분 합판으로 만들어져있다. 합판은 결을 교차시켜 접착해 나무의 변형을 막는 대량생산에 적합한 자재로, 산업화와 함께 등장했다. 오랜 시간동안 인간들이 나무와 관계 맺으며 쌓아온 지혜는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합판에 대한 생각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으나, 합판과 유사한 형태의 집성판재는 사실 기원전 3,500년 전-고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당시에는 좋은 목재를 구하고 나르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합판 형태의 집성은 변형을 막을 뿐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가구를 만드는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자원과 기술을 생각하자면,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난 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는 왕, 황제의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합판은 19세기 갑자기 신소재로 등장한다. 이는 18-19세기 유럽의 산업화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19세기 무렵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또 기계식 목공도구들이 개발 및 도입되면서 목수들도 큰 변화를 맞는다. 철물의 대량생산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못과 원형톱날!

 

  못의 대량생산은 더 이상 나무를 깎고 파고 잘라내 장부를 만드는 등의 고급 노동을 하지 않고도 나무를 연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나무의 변형과 못의 이용이 충돌할 것이었다. 나무는 여전히 변형되고, 못은 나무에 비하자면 변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한 것이 원형톱날의 대량생산이었다. 인력이 아닌 기계동력으로 두꺼운 목재도 쉽게 자를 수 있게 됨으로써 지난 5,000년 간 어떻게 해도 수지가 맞지 않았던 합판의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후 가구는 소수의 장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숙련 노동자에 의해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값싸고 변형이 적은 가구가 집집마다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른바 ‘발전’이 꼭 좋은 것인가? 어쩌면 중요한 것은 경제성의 문제 너머에 있다. 비용의 감소를 합리적 결정 혹은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산업화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바꾸었다. 삶의 방식, 태도, 윤리, …즉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효율성의 증대와 질 좋은 가구의 보급화, 이 외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합판 등장 이전의 인간들이 어떤 관념을 가지고 나무를 다루었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감각, 경험의 문제

 

  3,000년간 쌓여온 집짓는 지혜를 간직하고 구전으로 가르치는, 일본 호류지 가문의 대목장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증언을 기록한 책, 『나무에게 배운다』 로부터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쓰네카즈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그런 옛날 기술 따위는 케케묵은 것이라며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콘크리트는 반영구적이라고 믿었습니다. 연구자나 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콘크리트 건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콘크리트라면, 재료가 석회와 모래와 물입니다. 그 결합체가 그렇게 오래 지탱할 수는 없다고 저는 봅니다. 최소한 삼백 년 정도 버텨 주면, 그것으로서도 좋은 건축 재료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정도가 되기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철근을 넣더라도 반영구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옛 건축물의 재건에 철근을 사용하여 수명을 반영구적으로 하자는 얘기를 해 왔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것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것이라도 좋은 것은 좋은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입니다, 경험을 믿지 않고 학문에 치우치게 된 것은.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문명 _ 진보의 잣대는 새로움이 아니다)”

 

  쓰네카즈의 말처럼, 오늘날 콘크리트 건물들은 위기에 처해있다. 모든 콘크리트 건물의 바닥은 가운데가 꺼져있고, 10년이 넘은 아파트는 1년에 한 번씩 크랙crack을 보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틈으로 물이 들어가고, 틈들이 벌어지고 커져 구조에 치명적인 문제를 만든다. 개보수를 할 인간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무너질 건축물은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호류지 가문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들은 1,000년을 그 자리에 서있다. 그런 점에서 쓰네카즈는 진보의 잣대가 새로움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쌓여온 경험과 지혜에는 학문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문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나무도 심었습니다. 이 집은 이백 년은 갈 테지, 지금 나무를 심어 두면 이백 년 뒤에 집을 지을 때는 안성맞춤일 테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삼백 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심은 나무가 자라기까지 기다렸고, 또 마구 쓰고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나무의 성질을 살려서 알뜰하게 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생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무를 살립니다. 낭비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성깔도 좋은 쪽으로 쓰기만 하면, 오래 버틸 수 있는 건물, 튼튼한 건물이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걸 위해 기술을 전하고, 구전을 가르쳐 온 것입니다. 조금 더 긴 눈으로 세상사를 보고 생각하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좌우간 한 번 쓰고 버리는 생활이 기본이 되어 버렸습니다. ( _ 긴 눈으로 보고 생각하라)”

 

  학문적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때로는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라 여겨지는 이러한 측면들을 쓰네카즈는 ‘감각’, 그리고 ‘당연한 생각’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 감각이란 과거에는 질문할 이유가 없었던 것. 오늘날엔 학문적 연구의 관심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라져버린 이러한 감각과 당연한 생각들에 의해 오늘날 초래된 문제들을 살펴보면 이는 한 인간의 감각과 경험, 생각을 넘어서는 일들이다. 비단 재생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벌목량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자원부족 문제와 대기오염, 원자력 발전과 방사능 문제…등. 이것은 분명 경제적 가치가 다른 모든 것들의 우위에 서며 발생하는 문제다. 경제적 가치들은 당장 눈앞의 문제들만을 중심에 놓는다. 문제는 이삼백년, 천년에 걸쳐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순히 건물이 천년을 서있는지 이삼백년을 서있는지의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관계 맺는 모든 것에 우리가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가와 관련된 문제다. 이러한 감각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구전에, “나무의 성깔 맞추기는 장인들의 마음 맞추기.”, “장인들의 마음 맞추기는 장인들을 대하는 대목장의 따뜻한 마음.”, “백 명의 장인이 있으면, 백 가지 마음이 있다. 그것을 하나로 모으는 것, 이것이 대목장의 기량이자, 가야 할 바른 길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장인이란 각기 기질이 있는데, 그것을 다뤄야 하는 대목장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쓰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만으로 건물을 짓고자 하는 건 나무의 성깔을 파악하고, 그 성깔을 살려서 쓰라는 구전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성깔이 있는 것은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성깔이란 사용하기 어렵습니다만, 살릴 수만 있으면 오히려 뛰어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을 자른다거나, 혹은 없애 버리면, 좋은 건축은 불가능해집니다. (인사人事 _ 굽어진 것은 굽어진 대로 비뚤어진 것은 비뚤어진 대로)”

 

  인간들 역시 경제적 기준에선 숫자가 된다. 노동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이러한 사실이 아주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스스로 ‘성깔’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경제 뿐 아니라 국가정치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반복된다. 오늘날 평등은 양적 평등, 자유란 소비의 자유로 일축된다. 숫자 1이 되거나, 0이 되거나.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원목의 성질이 그렇듯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그렇담 우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적합한 인식에 대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는 어떤 점에서 호류지 가문의 쓰네카즈와 마찬가지로 감각과 경험을 중시했다―재미있게도 그는 낮에는 렌즈를 깎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렌즈 세공의 장인이었다. 전통적인 서양철학이 이성과 이성이 찾아야 할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중시했다면, 그리고 그러한 진리 추구의 역사로서 거대한 발전론적 역사관을 세워왔다면 스피노자는 감정적 인간의 차원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고, 바로 그러한 한계로부터 세상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그는 서양철학이 이성의 반대편에 놓았던, 그리고 오로지 통제와 조절의 대상이었던 감정과 욕망을 인간 인식의 기초로 보았다.

 

  스피노자에게 감정은 인간이 그 자신의 신체를 통해 외부의 사건, 사물과 마주칠 때 발생하는 당연한 반응이다. 모든 자연의 사물과 생명체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마주치는 외부 사건과 사물이 자신에게 해로울 경우 슬픔을 느끼고, 반대로 코나투스를 증대시킬 경우 기쁨을 느낀다. 이에 따라 모든 존재는 기쁨을 추구하고 슬픔을 멀리한다. 예컨대 맛있는 음식은 우릴 즐겁게 하고,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은 우릴 슬프게 한다. 원리는 꽤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현실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자주 혼동한다. 몸에 좋지 않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우린 기쁨을 느끼며, 엄마가 특별히 지어준 건강한 한약을 먹으면서 슬픔을 느낀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우연에 큰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그 자신에게 무엇이 기쁜 마주침이고 슬픈 마주침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보편적인 옳고 그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물이 서로 다른 인간에게 코나투스를 증대하는 것일 수도, 감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수영을 못하는 누군가에게 물은 위험한 것이지만, 수영을 잘하는 누군가에게 물은 즐거움의 대상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와 역량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와 마주치는 사물과 사건의 적합한adequate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적합함이란 시비, 선악, 즉 옳고 그름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그른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을 통해서 인간은 생존에 도움을 받고, 그에 따른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그르지만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적합한 것일 수는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지니고 있는 관념들의 대부분은 원인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결과들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이 받아들인 부분적인 결과를 거꾸로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으로부터 부적합한 관념이 생겨난다. 예컨대 남자다움이나 여성스러움이라는 어떤 기준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 삶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었겠지만(?), 인간 삶의 상황과 조건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부적합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음에도 우리 아빠가 여전히 여성스러움에 대한 농담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상황과 조건의 변화들을 적합하게 인식하기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선악과 같은 법적-도덕적 기준, 양적 평등이나 소비의 자유와 같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기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주치는 것들로부터 좋음(기쁨)과 나쁨(슬픔)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관계의 능력이며, 모든 사물이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이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늘 우리의 소비와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분리시키지만, 그것은 언제나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부적합하다. 호류지 장인들과 쓰네카즈의 감각은 행위와 그 행위가 원인이 되는 결과를 일치시킨다는 점에서 적합한 것이지만, 여전히 질문해볼 수 있다. 변해버린 세상에서도 동일한 행위가 가능한 것일까?

 

 

 

끝나지 않는 과제: 오늘 날, 나의 감각을 발견할 것

 

  스피노자가 렌즈를 깎던 당시와 호류지 가문이 1,000년 동안 유지될 건축물을 짓던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은 분명히 아주 많이 다르다. 아마도 행위의 연결망들이 훨씬 더 복잡해졌을 것이며, 보다 고차원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결과와 원인을 연결시킬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 중에 어느 하나 자연 혹은 인간을 착취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더러 순결한 인간이 되라는 것도, 근본주의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자신이 살던 세계가 가지는 한계 속에서, 결말을 맺지 못한 텍스트 『정치론』의 후반부에 여성의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를 밝히던 와중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나는 만약 그가 이 세계에 온다면, 언제든 그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 새롭게 사유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경험과 감각의 차원에서, 우리가 언제나 변화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보다 적합한 인식과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는 “작은 땅뙈기를 손에 넣”으라고 말했고, 사사키 아타루는 그의 책에서 “하나의 장소를” 만들라고 말했다.

 

  나 또한 불과 작년에 글쓰기를 마치고 올해 출간된 『다른 이십대의 탄생』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원목 또한 대량 벌목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MDF보다는 합판을, 합판보다는 원목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최근 만든 물건들은 원목보다는 합판을 사용한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거기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합판의 결이 딱히 유행을 타지 않거나 현재 사람들의 취향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짧은 기간 활용되는 가구에 한해 수거한 목재의 재활용이 훨씬 용이하다는 점(전시 등 짧은 기간 사용되는 가구를 폐기하지 않기 위해), 원목의 성질을 고려하듯 합판의 성질을 고려하여 만들 경우 때론 원목보다 더 오래 사용될 수 있다는 점, 사용해보고 싶었던 여타 다양한 소재들과의 어울림이 더 용이하다는 점, 물론 가구를 꼭 필요로 하는 이에게 더 저렴한 값에 가구를 실제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내가 3년 동안 만들어준 조그만 가구들을 열심히 관리하고 전시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굿즈를 만드는 작은 기업 소시민워크의 경우가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원목 가구가 관리 소홀에 의해 더 짧은 기간 안에 버려지는 경우들. 그 와중에 일부러라도 원목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합판의 재료가 되는 라왕Lauan이라는 목재에 흥미를 가지고 살펴보던 중, 이 나무가 6-70년대부터 동양의 창틀 혹은 문틀, 각종 가구에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가공이 좋고, 값이 싸고, 변형이 적기 때문. 그러나 단순히 값이 싼 원목이라는 이유에서 사용 했다기보다는 여성 1인이 사용하는 사무실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가벼움을 이유로 사용했다.―여기엔 항상 내가 놓인 상황에서 무엇이 더 적합한 일일까라는 고민이 함께했다. 또한 여기엔 언제나 단순히 원목이냐 합판이냐를 넘어서는 더 복잡한 상황과 조건들이 개입한다.

 

  나의 경우, 지난 1년간 중요한 것은 쓰네카즈의 걱정처럼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버려지는 세계에서 ‘버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때 나무를 다루는 나로서는 합판은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거나, 때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내 나름대로 주문자의 ‘성깔’을 파악하고, 그가 사용할 물건이 나아갈 길을 파악해보는 과정, 그 과정에서 합판이라는 재료의 ‘성깔’ 역시 중요했다. 이때 합판은 여전히 대량생산의 구조 속에 있지만, 때로 기쁜 마주침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지는 당연히 모르는 일이다. 더 적합한 일을 행하는 오늘날, 나의 감각을 발견할 것.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과제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12. 17.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