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P] 목공 인문학(2), 도면: 리좀과 수목 - 지도와 그래프를 그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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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프로젝트(화요P)란? 길드다의 멤버들이 각자 고민하고 있는 지점,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각자 달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업로드 합니다. 누군가는 텍스트랩 수업을 위한 강의안을 쓰고, 누군가는 길드다 이슈를 발전시키기 위한 글을 쓰고, 또 누군가는 넘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훈련을 위한 글을 씁니다. 이를 위해 멤버들은 매주 모여 글쓰기 피드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지원은 텍스트랩 시즌4 목공 인문학의 강의안을 연재합니다.

 

 

 

목공 인문학(2)
도면(plan): 리좀과 수목-지도와 그래프를 그릴 것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할 때, 우리가 최초로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도면을 그리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 도면을 그릴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업 조합원들이 직접 땅 위에 그린 고딕 건축의 도면은 공사 현장에서 벗어나 건축가가 종이 위에 그리는 계량적 도면과 대립한다.(『천의 고원』, 707)” 어떻게 그려야 할까? 어떤 도면이 좋은 도면일까? 프랑스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의 고원』에 등장하는 개념 ‘리좀’을 통해, 우리가 그릴 도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리좀: 실바노 부소티, 그래픽 노테이션

실바노 부소티를 들어보자

우선 음악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보면 좋겠다. 왜 음악이냐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의 고원』의 첫 장, ‘리좀’은 의미심장한 악보, 실바노 부소티의 악보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딱히 악보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악보가 첫 장의 제목 밑에 실려 있다. 리좀은 일반적 의미에서는 감자나 대나무 같은 구근식물로, 중심도 시작도 끝도 없이 얽히고설킨 뿌리줄기를 의미한다. 아마도 들뢰즈와 가타리가 상상하는 리좀이란 그의 악보와 같다는 뜻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4’33>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부소티. 그의 악보는 흔히 ‘그래픽 스코어’, 혹은 ‘그래픽 노테이션’이라 불린다. 음표를 점으로 표기하는 기존의 악보와 달리 그는 선으로, 꼬불꼬불 끝나지 않는 선으로 음악을 표기한다. 그래픽 노테이션은 이 선이 마치 그래프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표현은 음악이 박자, 선율, 화성(음악의 3요소!)으로 이루어진 음들의 유기적 조합이라는 방식의 사고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부소티는 음악을 무엇이라고 여긴 것일까? 그와 그의 이상한 친구들은 음악을 ‘주파수’로 여겼다. 서양음악의 기초구조를 이루고 있는 12음계는 사실상 낮은 음에서 높은 음으로 이어진 선과 같은 주파수를 임의적으로 끊어서 구분해놓은 것이다. 도와 레 사이에는 도# 혹은 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주파수가 있는 것이다. 기타를 튜닝 할 때만 들을 수 있는 ‘대

앵’하는 무명의 소리들, 그러한 소리들은 배제된 채 우리는 점으로 표기될 수 있는 음들만을 듣는다. 그들은 ‘대

앵’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음표들뿐만 아니라 박자로 표현되는 선형적 시간, 화음과 불협화음으로 구분되는 ‘어울리는’ 배경에 대해서도 그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은 4/4박자나 3/4박자와 같은 방식으로 일정하게 끊어진 시간만을 표현해선 안 된다. 다른 시간, 때로는 빠르게 흐르고 또 느리게 흐르는 혹은 정지하는 시간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미래와 과거는 현재와 부단히 섞여있지 않은가! 또한 단일한 음으로부터 쌓여진 조(장조, 단조…)는 하나의 음에 권위를 부여하며 불협화음을 거부하지만, 소리가 주파수라면 거기엔 불협화음을 배제할 ‘법’이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부소티는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지평을 무한대로 확장한 것이다. 케이지의 <4’33>이 연주한 침묵, 혹은 관객의 기침소리도 정확히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악보와 그 악보를 통해 연주되는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두고 아방가르드 실험음악이라 불렀고, 또 누군가는 음악이라 부르길 거부했다. 그의 작곡은 그로부터 약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듣는 이로 하여금 큰 충격을 준다. 우리가 아는 음악, 기승전결을 가지고 하나의 조를 유지하는, 혹은 복수의 조를 가지더라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가지는 음악과는 큰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단절과 난데없는 공격. 장난스런 멜로디. 결말과 시작이 뒤섞이고, 무엇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는 음악.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의 ‘아름다움’ 따위는 여기서 완전히 해체된다. 도로 위에서 들리는 자동차의 짜증스런 경적소리, 옆집 부동산 아주머니의 격정적인 통화소리, 문이 닫히고 열리는 무의미한 소리들과 음악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다. 연속성이 사라지니, 당연히 시작과 끝도 사라진다. 이제까지 음악이 아니었던 것들이 자신도 음악이라며 소란을 떨고, ‘내가 바로 음악이다’라며 뽐내던 것들이 그 권위를 상실한다. 세계와 음악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리좀, 뿌리줄기에는 중심과 계열이 없다. 모든 곳이 중심이다.

수목적 세계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재즈의 짧은 역사

빅밴드의 스윙재즈, 카운트 베이시를 들어보자

비밥의 창시자, 찰리 파커를 듣자

그래픽 노테이션으로 대변되는 리좀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樹木적 세계와 대결한다. 수목적 세계란 뿌리-몸통-가지로 이어지는 계열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한 세계다. 모든 가지들과 곁가지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귀속되고, 그 중심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화 된다. 앞선 예시에 따르자면 모든 정돈된 악보들이 바로 수목적 세계를 대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수목적 세계’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부소티의 음악은 불편하고 시끄러워서 설거지를 하면서 들을 수 없지 않은가! 맞다. 나도 『천의 고원』을 읽으며 부소티의 음악을 틀어놓아 보았지만, 도저히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다시 묻자. 우리가 아는 음악들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가? 그러나 핵심은, 알고 보면 그것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이왕 음악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고등학교 시절 전공했던 재즈와 관련된 짧은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존 케이지와 실바노 부소티 같은 소위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이 등장한 1950년대로부터 약 반세기 전인 19세기말부터, 재즈는 미국 남부의 브라스 밴드 흑인 연주자들이 소규모 클럽에서 유럽의 악기를 가지고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연주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재즈’라고 부를만한 것의 특징은 음악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선율을 단순화시키고, 흑인 연주자들 특유의 리듬감을 더해, 음악 중간 중간에 즉흥연주를 삽입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선율의 단순화와 즉흥연주의 비중이 더해진 것이 흑인 연주자들의 독보력讀譜力과 관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백인 연주자들과 달리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흑인 연주자들이 악보를 읽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보고 연주하거나 듣고 연주하는 식으로 훈련을 하며, 기존의 음악을 변형시킨 것이다. 이는 마치 구전되며 변형을 거듭하는 ‘소문’처럼 음악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충격을 보여주었으며, 음악에 종속되어있던 개별 악기들과 연주자들을 부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 ‘스윙’이라 불리는, 2박과 4박에 강조점을 둔 그들의 리듬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객석에서 일어나 춤을 추도록 만들었다(‘블루스’ 역시 이 시기에 등장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남부 지역이 군항이 되며 흑인 연주자들은 시카고와 뉴욕 등지로 옮겨왔고, 1920년대 대공황 이후 회복기에 특히 뉴욕에 거주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스윙’이 상업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유행한 스윙 재즈는 20세기 초의 엉성했던 그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편곡을 중심으로 백인들의 기획 하에 정제되었고, 브라스 밴드의 크기가 빅밴드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다시 악보에 종속되었고, 스윙 재즈는 일종의 거대한 형식이 되었으며, 백인들의 춤을 위한 반주로 전락한 것이다. 1940년대 초 이러한 경향에 실증을 느낀 젊은 흑인들―대표적으로는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이 더 작은 트리오, 쿼텟 규모의 밴드로 대항하였는데, 그들은 이것을 ‘비밥bebop’, 혹은 ‘밥’이라 불렀다. 매우 빠른 리듬 위에서 박자를 넘어서고, 정제된 주제 선율을 거부하고, 화성을 복잡화 시키고, 즉흥연주의 비중을 늘리고, 블루노트(화성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3음, 5음과 7음을 반음 낮춰 정직한 코드를 비꼬는 음표를 생성하는 것)를 빈번하게 사용해 장, 단조에 익숙한 사람들의 귀에 신선한 충격을 가했다. 비밥에서 주제 선율은 곡의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즉흥 연주의 출발점, 기초로 완전히 전락했다. 해석의 음악에서, 악보와 상관없이 원곡에 연주자만의 독창적인 개성을 불어넣는 변주의 음악으로 다시금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밥은 스윙재즈만큼 뉴욕에서 유행하지 못했고, 그 특유의 저항적인 측면은 백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밥은 이후 재즈 뿐 아니라 클래식 및 대중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블루노트는 거의 모든 대중음악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소규모 세션-특히 락 밴드와 같은 형태의 음악을 예비했다. 이를 넘어 나는 비밥이 약 10년 뒤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예비했다고도 생각하는데, 백인 엘리트들이 주축이 된 아방가르드 음악가들과의 구체적인 연결지점을 찾기는 어렵지만 여하간 기존의 음악을 해체하고, 새롭게 점유한 시도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수목적 세계는 끊임없이 리좀적 생성들―즉흥연주, 변주, 고유한 리듬, 블루노트―을 자신의 세계에 포획하고, 구획하고, 위치 짓는다. 그것을 악보로 옮기고, 음악을 ‘마땅히 이러저러 해야 할 어떤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선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포함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유지한다. 수목적 세계에서 비밥은 음악의 하위 장르인 재즈, 재즈의 하위 장르인 비밥으로 분류될 뿐이다. 그러나 비밥이 재즈와 음악을 끌고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독보력을 갖지 않는 재즈, 음악 밖으로 튀어 나가는 비밥이 곧 음악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버리는 아방가르드가 곧 음악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수목]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33)”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수목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익숙한 것일 뿐, 만물은 리좀적으로 구성되고, 배치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지도 그리기: 생성의 선을 표현할 것

우리가 그려야 할 도면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동업 조합원들이 직접 땅 위에 그린 고딕 건축의 도면은 공사 현장에서 벗어나 건축가가 종이 위에 그리는 계량적 도면과 대립한다.”는 이야기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전자가 리좀에, 후자가 수목적 세계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제도製圖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면을 그리라고 하면 누구든 손사래를 칠 것이다. 화성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악보를 그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규칙을 모르는데,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자, 독보력이 없는 흑인 연주자들도 메모를 하고, 연주를 하고, 작곡을 했다. 충분히 정제된 도면이 없이도 동업 조합원들에 의해 고딕 건축들은 지어졌다. 물론 여기서 수목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거나, 수목적인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화와 일반화를 위한 형식으로써 리좀과 상호작용하며, 때로 필요한 것이다. 다만 수목적 세계는 살펴본 바와 같이 생성의 차원에 개입하지 않으며, 절대적 가치와 기준이 될 이유가 없다. 제도 같은 것은 우선은 아무래도 좋다. 처음 크레파스를 잡은 아이처럼 시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천의 고원』, 947)” 나 또한 제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리좀적으로’ 도면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혹은 내가 경험했던 ‘리좀적인 도면’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다.


①안도 타다오-미도리: 안도 타다오라는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가 있다. 그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안도 타다오>에서 그는 식물을 ‘미도리(초록색)’라고 부른다. “미도리, 미도리, 미도리…, 미도리가 있으니까 좋잖아?” 나는 이것이 그가 어떻게 건축에 자연을 끌어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재밌고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을 건축에 포함되거나 부가적인 요소로 축소하지 않고, 개별 개체들로 보지도 않으며 일종의 흐름으로 본다. 곧 이어 그의 스케치에 표현되는 ‘미도리’ 또한 교차되는 선들일 뿐 구체적인 개체의 모양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의 그림 같다. 이런 안도 타다오의 언어와 스케치는 ‘식물’ 혹은 ‘초록색’의 정해진 경계를 허물며 생성한다. 동시에 그러한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새로운 건축물이 만들어진다. 물론 그의 건축사무소 직원들은 이런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기는 한다.

②이청호 소장-자투리 나무에 그려진 도면: 이청호 소장은 인테리어 목수인데, 대학을 나오지도, 건축을 공부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자격증도 없다. 그에게 내가 가져다주는 건축 도면은 별 효과가 없다. 다만 전체적인 느낌을 알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부분 부분의 디테일들은 자신이 직접 현장에 떨어진 자투리 나무 위에 그려 나에게 확인 받는다. 나는 확정적이던 나의 도면을 그가 그의 언어로, 그의 그림으로 서툴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자주 새로운 생각을 얻어 방향을 틀었다.


③석운동-원효로 꽃술: 원효로의 한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의 도면을 소개하고 싶다. 내가 도면을 그릴 당시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현장이다. 건축가의 도면은 “공사 현장을 벗어나” 그려진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했다. 반면 이청호 소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업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막 지어지고 있는 건축물 앞에서, 땅위에 그린다. 이 건물의 리모델링의 어려움은 도저히 공사 현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매일매일 건물을 뜯어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었다. 건축주는 새롭게 나타나는 것들을 없애고, 폭력적으로 재개발할 마음이 없었고, 그것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고 싶었다. 건축가의 도면은 백지상태를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면은 수정에 수정을 가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겹쳐지고 떼가 묻으며 겹겹이 된다. 더 이상 제도는 무의미하며, 무작위로 보이는 선들이 건물의 방향을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정제된 도면은 건축물대장이란 필요에 의해 작성되었지만, 원효로의 이 건물을 실재하게 한 것은 내 생각엔 이 지저분한 선들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성하기 위해서, 리좀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도를 만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부소티의 악보는 지도다. 지도에는 시작과 끝이 없으며, 위계가 없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라는 규칙이 없다. 보는 이에 따라서, 그의 방향과 중요도에 의해서, 위치에 따라서 그것은 어떻게든 기능하고 연주될 수 있다. 원효로의 도면도 도면이라기보다 차라리 각기 다른 입구를 가진 ‘지도’처럼 보인다. 이 지도는 시작될 기미도,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요소들마다 새로이 입구가 되는 그런 것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컴퓨터 앞에 앉아 3D 모델링 툴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보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된다. 요즘은 툴이 많이 발달해서, 누구라도 이것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누구나 건축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동업 조합원이 될 수는 없다. 도면이 아닌 지도와 그래프를 그리자.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12. 17.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