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원효로 대수선 작업 일지 ③ 스타일, 조바심과 걱정들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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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지원의 보릿고개 프로젝트: 원효로 대수선 작업 일지 ②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우리 공부의 연장에서, 작업의 현장(원효로)과 공부의 현장(들뢰즈)을 연결해 세 편의 글을 씁니다. 

 

 

스타일, 조바심과 걱정들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든다는 것은

일반 개인으로서는 사회적 법칙들에 전적으로 복종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배적 언어는 때로는 넓은 전선 위로 나아가며

때로는 한꺼번에 중심들로 달려든다.”

 

따라서 두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천의 고원, 4언어의 기본 전제들

 

 

원효로는 하나씩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실내 구획이 얼추 마무리 되었고, 마감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옆에서 지켜보기에 실장님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공사를 시작할 당시에 기대했던 기한을 훌쩍 넘기면서(물론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 커졌다. 일이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건물과 관계를 맺는 방식 때문이다.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 속에서, 나도 소장님도 계획한대로 일을 풀어가기보다 튀어나오는 상황들을 잘 대처하는 쪽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는 다르다. 보다 더 고민하고 잘 선택하기 위함이다. 실장님도 이러한 방식에 어느 정도 동의를 했고 그 과정에 함께했지만, 또 건축주로서는 마냥 여유로울 수도 없었다.

 

▲계단 틀이 들어서고 바닥 미장이 진행된 원효로의 실내 모습

 

실장님의 걱정은 실장님만의 것도 아니었다. 현장이 길어지며 나와서 일을 하는 소장님의 팀원들에게 주어지는 부담은 온전히 소장님의 몫이었다. 나도 예상과 달리 공기가 길어지면서 예정되었던 다른 현장들과 일정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지치는 측면도 있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또 그런 순간들이 순조롭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의견이 달라지면 서로 약간씩 눈치를 보며 힘을 겨뤄야했다. 힘을 겨루다 마지못해 누군가 “OK”를 해도, 찜찜함을 가지고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눈치를 보고, 레퍼런스를 찾고, 설득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면 또 공기가 조금씩 늘어났다.

 

 

웬 이상한 복싱 아저씨 등장

 

외장 마감의 디테일을 가지고 옥신각신 하며 며칠을 보내던 와중에 영화 안도 타다오를 보게 되었다. 영화가 좋다는 평을 보고 한편으론 영화를 통해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헛된?) 기대도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고통의 순간에 책 한 페이지, 일상 속 하나의 장면, 풍경의 한 지점이 마법처럼 답을 주는 순간. 물론 그런 순간은 대개 갑작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다.그래서 더욱 설마 영감을 주겠어?’라는 식으로 스스로의 기대를 모른척했다. 이정도면 미신에 가깝다.

 

그러나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의 꼴사나운 기대와의 밀당은 모두 잊혀져버렸다. 안도 타다오. 엄청난 건축물들을 남기고 여전히 나와 같은 세상에 살아있는 건축가! 는 사라지고 웬 백색 츄리닝을 위아래 세트로 입은 아저씨가 나와 공원에서 ---’거리며 복싱연습을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로 중년의 코미디언을 섭외했나?’라고 잠시 생각했다가, ‘, 안도는 복싱 선수였지?! 깨달았다. 그가 그라는 걸. 왜 나는 그가 점잖고 잘생긴 중년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우라의 붕괴. 더하여 그가 영상 속에서 말하기 시작한 순간, 일본인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는 그의 사투리와 투정을 부리는 듯 하는 말투는 아우라의 2차 붕괴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건축물이 주는 인상과 그의 겉모습은 내가 느끼기에 아주 달랐다.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안도의 모습. 복싱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에서 직접 보시라!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 그런 그의 모습이 놀라웠고, 즐거웠다. 안도 타다오, 웬 이상한 복싱 아저씨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시작된 영화에 나는 완전히 몰입했다. 그의 말, 행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의 건축물을 연결 짓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러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의 어떤 면이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거침없는 선과 유려한 선의 섬세한 조화,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어울림, 물과 빛, 바람을 깊게 고민한 흔적들과 지인-한 그의 사투리는 대체

 

▲그가 초창기에 설계한 빛의 교회 실내 전경, 십자가를 자연의 빛으로 만들었다.

 

▲그가 말년에 설계한  폴리 그랜드 씨어터, 건물의 중앙을 관이 관통하듯 설계했다.

 

웃음을 금치 못할 건축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않은 안도 타다오는 졸업할 즈음 무작정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쌍둥이 형제가 다니던 복싱장에 찾아간다. 잘 버티기만 하면 일반적인 직장인이 매일 출근해서 월급을 받는 것보다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복싱은 버티는 일이었던 반면, 누군가는 버티기를 넘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건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이 든 순간, 그는 그 길로 복싱장을 나서 백수가 된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했던 그는 한 친구의 소개로 노가다(공사장 잡부)’를 시작한다.이후 5년간의 노가다 과정에서 건축에 흥미를 느낀 그는, 바로 건축을 통해 날아다니고 싶다고 느꼈던 듯하다.

 

이때부터 그의 독학즉 독서, 여행, 필사가 시작된다. 그는 건축학과를 가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 전통 건축물을 보러 전국 각지를 다니고, 르코르뷔지에 전집을 사서 책이 닳도록 필사하고, 그걸로 부족해 직접 서양의 건축가와 건축물들을 보러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 시간이 4년이다. 한국으로 치면 남들이 입시 공부할 때 돈 번다고 복싱을 하고, 건축학부 5년을 다닐 때 노가다를 하고, 건축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사무소를 다녀야하는 기간 3년과 건축사 시험 준비를 할 1, 도합 4년에 그는 책 읽고, 필사하고, 여행을 다닌 것이다. 이 시간들을 지나 스물아홉에 그는 건축사무소를 차린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도 많은 좌절을 겪는다. 대학도 안 나온 풋내기 건축가에게 누가 일을 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오사카 시가 주관하는 건축 사업에 무작정 찾아가 시키지도 않은 제안서를 넣고, 각종 공모전에 참여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어필한다. 당시 그의 설계들을 보면 설계를 모르는 사람도 웃음을 금치 못한다. 철거되는 역사적 건축물을 과거-현재-미래를 반영한 건축물로 리모델링하자며 반쯤 부서진 건축물에 웬 거대한 콘크리트 알을 집어넣는가하면(당연히 실현되지 못했다), 지인을 통해 사무소 개소 후 꽤 시간이 지나 얻게 된 조그만 주택 건축에선 도시 게릴라 건축이라며 안 그래도 작은 콘크리트 건물 중앙에 하늘을 열어 떡하니 중정을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금치 못했던 웃음의 의미가아마도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 생각되는데실소보다는, 그가 그린 꿈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즐거움으로부터, 난 그의 지인-한 사투리가 어쩌면 그의 건축과 어울리지 않는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웃음을 금치 못했던, 가운데가 뻥 뚫린 협소주택

 

 

 

다수어 혹은 표준어를 경계하라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우선 직관적으로 그의 건축이 기존 건축계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상-식을 끊임없이 부숴나가는 것으로 작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새로 짓는 것을 멈추고 기존의 것 안에 짓기, 자연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를 넘어 집 안팎의 경계를 허물기,건축의 용도와 필요에 갇히지 않고 상상을 확장하기. 표준어는 기준이 되는 언어, 상식의 언어다. 그러나 사투리는 이것에 대항하고, 다시 표준어가 겨냥하는 목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건축가의 행보와는 다른 그의 행보가 그의 말씨와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공부한 것이, 필사와 여행을 통해 건축을 학습한 것이 사투리적인(?) 건축을 만든 것이 아닐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 4,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에서 표준어와 방언, 다수어와 소수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 역시 이곳에서 소수어로서의 방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수적인 의미의 소수성이 아니며, 단순히 표준어의 반대 항으로서의 방언도 아니다. 소수어는 변주, 변이의 언어이며 다수어는 상수다. 그러나 변주하는 소수어를 집어 삼키고서 외연을 넓혀가는 확장적인 상수이러한 모순적 표현이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표준어의 모순과 동일하다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다수어는 결코 소수어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오히려 소수어에 의해 존재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영토화 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이때 소수어는 탈-영토화의 언어, 즉 기존의 언어에 틈을 내는 언어, 식별 불가능한 언어, 상수로 파악  언어이다.

 

확실히 방언 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 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천의 고원)”

 

영화에서 안도 타다오가 식물을 미도리(초록색)’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다. “미도리, 미도리, 미도리, 미도리가 있으니까 좋잖아?” 나는 이것이 그가 식물을 식물이라 부르지 않으며 어떻게 건축에 자연을 끌어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재밌고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을 개별 개체들이 아닌 어떤 조화 속에서 보는 것이다. 곧 이어 그의 스케치에 표현되는 미도리 또한 교차되는 선들일 뿐 구체적인 개체의 모양이 아니다. 이런 안도 타다오의 언어는 다수어,  식물 혹은 초록색의 정해진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생성을 하는 소수어의 역할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러한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새로운 건축이 만들어진다. 방언은 표준어가 아닌 말(국어사전)’이기를 그치고, 다수어를 변이시키는 생성이 된다. 언제나 언어 자체의 요소가 되고 상호 관계맺음으로서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소수어들.

 

▲안도 타다오의 스케치

 

들뢰즈와 가타리는 방언에 더 큰 가능성, 혹은 위계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용, 즉 용법, 스타일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사실 표준어는 없다.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특정한 어떤 용법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표준어에 부합하느냐는 기준에 의해 재단될 때, 그런 질서 속에 배치되는 경험의 빈번함 때문에 용법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안도 타다오는 스스로도 이게 될까?’ 싶은 것을 만들면서 그 특유의 사투리로 이렇게 말한다. “죽는 것도 아닌데, 해보고 안 되면 사과하지 뭐 그러나 이것은 무책임함과는 다르다. 다수어의 전제와 주류 건축계의 시선이 무거운 논리들을 가지고 합리성을 점하고 있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특유의 가벼움, 소수어, 스타일이다.

 

 

그것을 스타일로 만들 것

 

그러나 스타일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한다. 그것이 다수어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개별적인 목적들을 추구함에도, 다수어는 독특한 스타일들을 점유해야한다. 포함하고 분류하고 재단하는 운동이 바로 다수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사건건 저항한다. 현실에서 이것은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혹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어라는, 걱정과 조바심으로 나타난다. 원효로 공사에서 우리가 지치는 측면은 분명 선택의 연속에서 끊임없이 직면하는 힘겨루기라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이상으로 각자가 부딪히는 다수어의 저항이 큰 몫을 한다. 다수어와의 힘겨루기들. 원효로는 여전히, 하나씩 천천히 진행 되는 중이다. 결정된 사항들을 진행하면서도, 여전히 외장 마감의 디테일을 놓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다. 거기에 또 다른 몇 가지 문제들이 추가되었다. 옥상 방수가 끝났고 정원을 만들 차례인데, 조경에 미도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들어와야 할 것인지, 이게 맞는 건지에 대해 토론하는 중이다.

 

 

▲논란의 외장 마감재 테스트 사진

 

결론적으로 영화가 마법 같은 답을 주진 못했다. 그러나 마법 같은 영감도 결국 그것이 부딪히는 무거운 저항들을 극복하고, 끝까지 밀어붙일 힘이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조금씩 이 건물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고, 나만의 스타일이 다듬어지는 와중이란 생각을 해본다. 저항이 많은 것은 어쩌면 잘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스타일은 조바심과 걱정들 속에서만, 조금씩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5. 27. 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