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1968년, 어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질문 <3>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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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 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명식의 보릿고개 프로젝트 : 1968어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질문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반드시 던져지는 질문이다미지의 한걸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에 의해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이미 몇 번의 실패를 지켜봐온 사람들에 의해.

그는 곧 다시 새로운 질문들을 낳는다만약 가능하다면세계는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무엇이 필요한가세계를 바꾸려는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글과 이어질 두 개의 글은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다이것은 1968년의 이야기이자 2019년의 이야기이며그보다 더 많은 해의 이야기이다그 흐름에 닿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문답이자 나 자신의 문답이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가지고 가야 할 질문의지금 이 순간 스쳐가는 대답이다 

 

 

 

 

 

  < 3 > “-되기

 

 

 

 

 

  1968 4 4.

  

  테네시 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에서 한 발의 천둥 같은 총성이 울렸다. 백인 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가 모텔 발코니에 서 있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저격한 것이다. 총탄은 킹 목사의 머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고, 그는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20세기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어왔던 남자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39세였다.

 

  그로부터 3년 전, 1965 2 21, 미국의 흑인들은 이미 또 한 명의 지도자를 잃은 바 있었다. 맬컴 X는 뉴욕 할렘의 오두본볼룸에서 연설을 시작하려는 찰나 세 명의 괴한에게 열여섯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들은 한때 맬컴 X가 몸담았다가 등진 흑인 조직 네이션스 오브 이슬람NOI의 조직원들이었다. 그 역시 향년 39세였다.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이 그들 두 사람을 일종의 맞수로 묘사한다. 그들이 남긴 투쟁의 두 갈래의 길은 이후 수많은 현실의 운동과 가상의 작품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어 왔다. 그 두 갈래 길 중 어느 쪽이 옳은가에 대하여 숱한 사람들의 고뇌와 논쟁이 거듭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암살당하기 전 마지막 1년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그 1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968년 그 해 혁명의 대열에 섰던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또한 그럼으로써 오늘 여기, 우리에 대한 이야기 또한 매조지할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이여, 미국인이어라 - 아프리카인이어라

 

 

 

  킹과 맬컴은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오랜 기간 대척점에 서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은 모두 미국에서 흑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체감했고 사람들을 이끌고 그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외에는 거의 모든 점에서 달랐다. 우선 킹은 비교적 유복하고 화목한 흑인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밟은 엘리트였다. 그의 사상적/인적 기반은 미국 남부의 흑인 기독교회에 있었다. 한편 맬컴은 북부의 빈민가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어린 시절은 백인들이 그들 가족에 가한 폭력과 더불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가한 가정폭력으로 얼룩져있었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을 거의 밟지 못했고 어린 시절부터 감옥을 전전하던 중 일라이저 무함마드라는 인물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됨으로써 '네이션스 오브 이슬람'이란 조직에 가입했다. 당연히 맬컴의 기반은 분노로 가득한 북부의 흑인 빈민들이었다.

  

  이러한 성장환경과 기반의 차이는 곧 방법론의 차이로 이어졌다. 킹은, 흑인들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하여  - 저 유명한 아메리칸 드림을 부르짖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의 벗들이여, - 어제와 오늘 우리가 고난과 마주할 지라도,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내린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솟아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 위의 연설 중인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알려진 이 연설은 1963년 8월 28일, 노예해방 100주년을  기념한 워싱턴 대행진에서 행해졌다. 이날 20만 명의 흑인들과 백인들이 킹의 비폭력 행동에 동참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이 연설은 흑인 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킹의 신조와 방법론과 더불어 그의 탁월한 연설 능력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한글자막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IWjgnhockB4)

 

 

  킹의 무기는 사랑과 정의, 보다 정확히는 기독교적 사랑과 신이 약속한 평등의 권리였다. 그는 미국 헌법이 기독교도’ ‘남성’ ‘백인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장하며, 다름 아닌 신께서 그 권리를 약속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킹은 미국의 백인들이 끝내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으며 지금 백인들의 말과 행동이 헌법의 이상과 기독교적 윤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일깨워주기만 한다면 장차 미국의 흑인과 백인들은 형제자매처럼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수단은 비폭력적인 직접 행동이었다. 그는 폭력에 굴하지 않고 견디며 행진하고 시위함으로써 흑인들의 존엄을 드러내고자 했다. 백인들의 양심에 호소하고자 했다.

 

  한편 맬컴은 그런 킹을 비난하고 경멸했다. 그가 보기에 흑인에게 있어 백인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었다. 백인은 흑인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악덕의 - ‘악몽의 근원이었다.

 

 

 

  당신이 가난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백인이 꾸민 일입니다. 당신은 우연히 마약 중독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백인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우연히 창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백인에 의해 창녀가 되도록 조작된 것입니다. 여기 미국에서의 당신의 삶에는 우연히 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맬컴 엑스, 뉴욕 할렘, 1963년 8월 10일)

 

 

  “백인이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여기던 것이 흑인에게는 긴 세월 걸쳐온 ‘미국의 악몽’이었다.” 

(맬컴 엑스, 뉴욕, 1962년 5월 1일)

 

 

  맬컴은 흑인들이 완전히 백인과 단절하여 오직 흑인들만의 민족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애초에 그가 기독교를 등지고 이슬람에 귀의한 것도 백인의 기독교에 대항하는 흑인의 이슬람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있어 백인이 만든 모든 것은 흑인에게 있어 고통을 안기는 것이었다. 맬컴은 모든 백인 종족은 악마의 종족이며 지구상 모든 흑인 인류의 공공의 적이라고 공언하면서 흑인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백인들과 통합하여 공동체를 이룰 것이 아니라 오직 흑인들끼리 단결하여 백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무하마드 알리와 맬컴 X. 맬컴은 킹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탁월한 연설가였다.  그는 노골적이고 거칠면서도 언제나 핵심을 찌르는 연설을 즐겨했으며 빈틈없는 논리로 상대의 반론을 허락지 않았다.  맬컴은 마치 복싱을 하듯 백인 토론자들을 공개토론에서 짓눌러 논파했고, 그때마다 북부의 흑인들은 열광했다.  맬컴과 알리가 오랜 시간 친구였던 것은 이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예리한 언어와 능란한 언변으로 빈민가 흑인들의 고통을 폭로하는 한편 공공연히 백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고 그런 백인들과 협력하고자 하는 흑인 운동가들을 꼭두각시, 얼간이, 프락치로 여겼다.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의 저자 제임스. H. 콘에 따르면, 킹과 맬컴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킹은 미국의 흑인들이 무엇보다도 미국인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피부색이 아니라 미국이, 기독교 정신과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책무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해야 했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백인과 흑인 모두가 신의 백성이자 미국 국민으로서 함께 할 때 그들은 자유로워질 것이었다. 반면 맬컴은 미국의 흑인들이 무엇보다도 아프리카인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검은 피부색이, 그 피부색 속에 함축된 흑인들의 뿌리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해야 했다. 미국의 흑인들은 아프리카 왕국들의 영광스런 과거를 기억하고 백인 정복자들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기억해야 했다. 모든 미국 흑인들이 피부색에 대한 긍지와 백인들에 대한 증오로 단결하여 백인들에게서 벗어날 때 그들은 자유로워질 터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킹과 맬컴 X에 대한 이야기이다. 때문에 소수자 운동에 있어 기존 사회와의 소통과 통합을 주장하는 온건파들은 킹을 즐겨 인용하고, 분리와 독립행동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은 맬컴의 말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는다. 심지어는 히어로 영화들까지도 이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차별받는 돌연변이들을 다룬 영화 <엑스맨>,   아프리카 정글 속에 숨겨진 흑인들의 이상국가를 그리는 <블랙팬서>는 킹과 맬컴의 이미지를 차용한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암살당하기 전 마지막 1년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맬컴 X 최후의 일 년 : 우리는 그저 아프리카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1965, 맬컴이 암살당하던 해. 그 마지막 일 년 동안 맬컴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당시 맬컴을 둘러싼 환경에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일평생 그가 영적 스승으로 모셔온 일라이저 무함마드와 결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메카를 비롯하여 해외를 순방하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일라이저 무함마드는 맬컴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나 도덕적으로는 부패한 성직자였고, 점점 커져가는 수제자 맬컴의 영향력을 경계하고 있었다. 맬컴은 그럼에도 가능한 한 그에게 존경을 표하려 했으나 결국 그와 관계를 끊고 네이션스 오브 이슬람에서도 탈퇴하였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맬컴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를 처음으로 순례하였는데, 그 때 그는 그에게 있어 대단히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메카에서 그는 이슬람에 관한 일라이저 무함마드의 가르침, 특히 백인은 천성적으로 악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유가 정통 이슬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맬컴은 메카에서 백인 무슬림들이 자신을 포함한 타 인종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간주하며 어떤 편견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인류애가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그늘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전 세계에 인종적 화합의 장이 있음을 깨닫게 된 맬컴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 “이 성스러운 조상들의 땅에서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형제애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목격했다. 그들의 피부색은 다양했다. 푸른 눈의 금발에서부터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들까지.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함께 제의에 참석했고 단결과 형제애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었다. 미국에 있을 때 나는 백인과 비백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일들은 절대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 제임스.H.콘,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340p)

 

 

 

▲ 1963년 메카를 순례 중인 맬컴X

 

 

 

  그 뒤 맬컴은 주변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하여 그곳의 혁명가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인종적으로 백인인 아프리카인, 그럼에도 자국의 혁신을 꾀하는 이들을 마주했다. 맬컴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흑인 민족주의가 진정한 혁명론자들을 소외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점점 더 인종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인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에서의 흑인들의 투쟁과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고심했고, 여전히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를 강경하게 비판하면서도 모든 백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과거의 발언들을 후회했다.

 

 

 그는 파리 외곽에서 비행기가 충돌해 백인 130여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방금 좋은 소식을 들었다!”라고 했다. 맬컴은 알렉스 헤일리에게 “내가 결코 하지 않았어야 할 말 중의 하나였다”라고 고백했다. 또 다른 예로 한 백인 소녀가 할렘을 찾아와 맬컴에게 흑인이 벌이는 투쟁에 기여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맬컴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고 소녀는 울면서 돌아갔다. 맬컴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그 소녀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을 후회한다. 지금 그녀의 이름을 알거나, 연락처를 알거나, 편지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지하게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녀가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백인에게 지금 내가 대답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백인은 백인의 사회에서, 흑인은 흑인의 사회에서,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일함으로써 실제로 진실한 백인과 진실한 흑인은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제임스.H.콘, 위의 책, 496p) 

 

 

  그의 사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는 미국의 흑인이 순수한 흑인으로서의 아프리카인이어야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피부색으로 이미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고, 따라서 그의 투쟁에 백인들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미국의 흑인들이 - 아니, 인류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정해진 뿌리, 정해진 운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꿈틀거리는 운동들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미국의 흑인들, 유색인들, 백인들, 아프리카인들의 행보를 고민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가운데 맬컴은 오랫동안 경멸하고 비난해온 킹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맬컴은 킹에게 만남을 계속해서 제안했지만, 그것은 그를 공적인 자리에서 논파하고 욕보이기 위함이었다. 킹은 그것을 알았기에 철저하게 맬컴의 제안을 무시하고 그를 피해왔었다. 하지만 1965년에는 킹 역시 맬컴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킹 역시도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미국을 꿈꾸지 않았다.

 

 

 

 

 

  마틴 루터 킹 최후의 일 년 : 우리는 흑인이 되어야 합니다

 

 

 

  킹에게 통합주의, 흑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일하고 기도하며 투쟁하는 그러한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은 그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는 그 아메리칸 드림이 진정한 민주주의이자 미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354) 그리고 실제로 그의 비폭력 운동에 많은 백인들이 지지를 보내고 또 참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또한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 민권 법안에 서명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킹의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허나 그런 킹의 아메리칸 드림을 뒤흔든 것은 지금 당장 흑인들이 처해있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미국 북부 와츠 지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 현장을 방문한 킹은 흑인 빈민들이 처한 극도의 가난을 목격했고, 그곳의 흑인 젊은이들이 비폭력으로는 결코 자신들이 자유로워질 수 없다 생각하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마틴(킹)은 그 아이들의 대답과 비폭력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을 곱씹어보며, 민권과 민권 법안은 인종차별주의와 가난을 전혀 상쇄시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특히 북부에서는 말이다. “와츠는 인종차별이나 민권 결여 때문에 고통 받은 게 아닙니다. 식수대가 단 한 개라는 것, 그게 뭔지 당신(킹)은 모를 겁니다 (...) 존슨이 1964년 민권법에 서명을 했을 때 와츠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와츠에서 마틴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베이러드 러스틴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그날 밤 킹과 만나서 벌였던 토론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있잖소, 베이어드. 나는 이곳 사람들이 햄버거를 먹을 권리를 얻게 하려고 일했소. 하지만 이제는 (...) 햄버거를 사먹을 돈을 벌 수 있게 해야 하오.’”」 

(제임스.H.콘, 위의 책, 366-367p)

 

 

 

 

▲ 1965년 8월의 와츠 폭동. 음주 운전으로 체포된 흑인 운전자 마켓 프라이어는 무고함을 호소하며 경찰에게 항의했고,  경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 때 일대의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폭동은 6일 동안 이어졌으며 34명이 사망했고 부상자가 1천 30명, 체포된 자가 4천명이었다.  이후 66년부터는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 뉴어크, 디트로이트에서 폭동이 발발했으며 68년 킹이 암살당했을 때에는  전국 160여 개 도시에서 흑인들이 봉기했다.

 

 

 

  헌법과 법안이 그들의 평등을 보장해도 그들의 실제 삶에 찾아오는 변화는 미약했다. 북부의 흑인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그들 구역의 인프라는 빈약했으며, 행정기관은 그들을 무시했다. 그런 그들의 고통을 대변해줄 흑인 의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맬컴이 부르짖던 흑인들의 현실이었다.

 

  킹은 이제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상향으로서의 미국, ‘제대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들 모두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미국을 의심하고 그에 맞서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막대한 풍요를 누리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흑인 극빈자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미국. 말뿐인 헌법과 질서의 수호를 강조하면서 진정 죽어가는 사람들 내버려두는 미국. 무엇보다도, 베트남을 불사르는 미국.

 

  1968. 맬컴의 죽음 이후 3년이 지났고, 킹의 인생에 있어서도 최후의 해. 그는 베트남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을 벌이는 미국을 비판한다면 지금껏 그에게 호의를 보였던 백인 사회 대부분이 그에게 등을 돌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더 이상 그를 두렵게 만들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영혼이, 베트남의 어린이들 수천 명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 마틴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이 자기 본연의 민주적 가치와 세계의 도덕률을 범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도저히 침묵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침묵은 곧 배반”인 시대였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적군 병사 한 명을 죽이는데 50만 달러를 쓰면서 자국 내의 가난한 시민에게는 단돈 50 달러만 쓰는 나라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모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미국 정부와 시민들이 그를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그는 더욱 더 강력한 목소리로 자신의 메시지를 외쳤다.」 

(제임스.H.콘, 위의 책, 397p)

 

 

  많은 백인들이, 심지어 킹의 흑인 동료 일부조차 그런 킹을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인이기에 애국자라면 자국의 전쟁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킹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그가 평생토록 추구해온 그의 미국 -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화로이 형제자매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킹은 더 이상 모든 백인들이 사랑하는 모범적인 미국인으로 남으려 하지 않았다. 그 순간 킹의 목소리는 와츠 빈민가의 흑인들의 목소리였고, 베트남의 아이들의 목소리였고, 맬컴의 목소리였으며, 그 무엇보다도 그들 모두의 삶을 목도하고 자신의 신념과 고뇌로 녹여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목소리였다.

 

 

 

 

▲ 1964년 워싱턴 의회 앞에서 마주친 킹과 맬컴. 이들은 서로 볼 일이 있어 의회에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고,  웃으며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곧 헤어졌다. 이것이 생전에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만남이었다.

 

 

 

  맬컴의 암살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맬컴은 마지막 일 년 동안 더 이상 미국 흑인들이 아프리카인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골몰했다. 킹은 마지막 일 년 동안 더 이상 미국 흑인들이 미국인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가 추구하는 미국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투쟁했다.

 

  맬컴과 킹은 분명 오랜 시간 대극점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성장한 현실 속에서, 그들 자신의 현실에 기반하여 아프리카인 혹은 미국인이고자 했다. 허나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메카의 순례와 와츠의 폭동을 통해 미국인 혹은 아프리카인인 것만으로는 미국의 흑인들은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맬컴과 킹이 서로 알지 못했던 현실이 서로의 발밑에 존재해왔고,  60년대 중후반의 격동 속에서 그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의 흑인들은 옛 아프리카 왕국이나 미국 헌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세계의 투쟁 속에서 새로이 자신을 구성할 때 흑인은 정녕 자유로울 수 있을 터였다.

 

  맬컴과 킹은 서로가 있음으로써, 그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무언가로 돌아가는 대신 아직 정해지지 않은 무언가가 되고자 나아갈 수 있었다. 미국인으로, 아프리카인으로 돌아가는 대신 킹-되기를, 맬컴-되기를. 물론 그럼에도 맬컴이 킹이 될 수는 없었고 킹이 맬컴이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도를 통해 분명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한 것은 결국 현실에 똑바로 발을 디딘 채 이미 존재하는 흑인의 정체성과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새로운 흑인의 길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흑인의 흑인-되기였다.

 

 

 

 

  - 되기의 혁명

 

 

 

  68혁명은 -이기의 시대에 일어난 -되기의 혁명이었다. 끊임없이 너는 -이어야 한다는 명령에 맞서, 그 명령에 반해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한 사람들의 운동이었다. 68이 일궈낸 변화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1970, 서독의 수상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추도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느닷없이, 말없이 그 추도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현장은 당황스러운 적막에 휩싸였고 이내 그 침묵을 형언할 수 없는 미세한 진동이 뒤흔들었다. 훗날 브란트는 술회했다.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바르샤바에서 브란트가 무릎을 꿇다.

 

 

 

  브란트가 유태인들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그가 유태인이 된 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사회주의자로서 반평생을 나치에 저항하며 해외를 전전한 경력을 가졌다 해도 그는 여전히 독일인, 다만 유태인들의 고통을 나누고자 한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랬기에, 독일인 수상인 그가 독일인으로서 유태인-되기를 시도했기에 그의 행동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감응시켰다. 수용소의 생존자 출신인 폴란드 총리 유제프는 다음 행선지로 가는 차 안에서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그 장면을 중계하던 헝가리 뉴스 캐스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

 

  68 이전까지, 오늘날과 같이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똑바로 응시하고 참회하는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은 오늘날 일본이 그러하듯 전쟁을 언급하기 꺼려했으며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침묵의 목소리로 내버려두었다. 브란트의 유태인-되기와, 68이 그것을 바꾸었다. 유태인도 유럽도 독일도 변함없이 나치의 만행을 기억했지만, 더 이상 그 기억은 그들을 증오 속에 사로잡아놓지 못했다.

 

 

 

  1968 9, ‘독일사회주의학생연합SDS의 대의원 회의에서 한 여성이 연단에 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헬케 잔더였고, 두 아이의 어머니, 베를린 영화아카데미 학생이자 여성해방 행동위원회의 대표였다. 그녀는 여성의 억압과 해방에 대하여 연설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헬케의 연설이 끝난 뒤, 주최측은 그 어떤 논평도 없이, 마치 헬케가 연설을 한 적도 없는 것처럼 그대로 다음 순서로 넘어간 것이다. 다음으로 연단에 올라온 건 유명세를 얻은 학생 활동가이자 SDS의 핵심 이론가였던 한스-위르겐 크랄이었다. 그렇게 그대로 크랄의 연설이 시작될 찰나, 회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 가운데 한 여성 청중 하나가 벌떡 일어서서 토마토를 던져 크랄의 어깨를 맞췄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반혁명주의자들, 적대 계급의 끄나풀!”

 

 

 

▲ 헬케 잔더Helke SANDER. 이후 그녀는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독일 페미니스트 영화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독일 최초의 여성영화제를 조직하였고, 페미니스트 영화잡지 <여성과 영화>를 창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68에는 수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있었고, 그녀들은 심지어 모든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여 해방을 꾀하는 그 혁명 내부에서조차 여성들이 침묵 속에 놓여있음을 발견했다. 또한 여성들 자신조차도 그 침묵의 역할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68년 자라 하프너는 베를린에서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그럼에도 ‘국제베트남회의’ 시위에 그녀가 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이 행사에 맞춰 처음으로 아이 돌보기가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그 일을 조직하지 않았다면 하프너가 시위에서 아버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및 에리히 프리트와 팔에 팔을 걸고 거리에 나선 사진은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 하프너는 말했다. “저는 남자가 깃발을 매달려고 바느질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깃발이 나부끼지 않는 시위는 없었던 것이다.」

(잉그리드 길혀홀타이,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188p)

 

 

  그러나 그 사실을 발견했다 해도 그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차이를 보였고, 여전히 많은 젊은 여성 활동가들이 혁명의 유명인사들과 잠자리를 갖는 걸 일종의 정치적 성찬식으로 여겼으며, 남성 활동가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뒤로 미루었다.

 

  그런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SDS에서는 자매애는 강하다라는 표어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킹과 맬컴을 잃은 미국의 흑인들이 부르짖은 검은 것은 아름답다” - 블랙파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미국의 흑인들이 흑인-되기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듯, 그녀들 역시 미지의 자신을 구성해 나가야 했다. 여성-되기의 장정. 침묵하는 존재로 자신을 재현하지 않으면서, 침묵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비명을 지르는 존재로 남아있지도 않으며, 미지의 다른 삶 속으로 나아가며 스스로를 변용시키는 길.

 

 

 

  68은 수많은 -되기의 시도를 낳았고,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위험이 뒤따랐다. 킹과 맬컴처럼 위험을 감지한 이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이 있었다. 히피들과 우드스탁의 주역들처럼 약물을 매개로 -되기를 시도하다가 자멸한 이들도 있었다. 문화대혁명, 미시마 유키오, 바더-마인호프 그룹처럼 죽음의 탈주선을 탄 이들도 있었다. 68 때 아프리카 비아프라의 전쟁을 겪고 국경 없는 의사회를 창립하였으나 결국 프랑스 행정부에 들어가 인도주의적 전쟁을 지지하게 된 베르나르 꾸슈네르,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토와 그 전쟁을 지지하게 된 빨갱이 대니 다니엘 콘벤디트(1편 참조)처럼 다시 국가와 시스템에 포획된 이들이 가장 많았다.

 

 

  -되기의 길은 고행의 길이다. 현재의 상태에 살면서도 그것을 벗어난 무엇을 추구하는 길. 미래를 통해 현재의 변화를 추동하고, 현재의 삶을 통해 미래의 변화를 추동하는 길. 그것은 그 자체로 힘겨울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 길을 잃어버릴지 모르는 위험과 함께 한다. 드라마틱한 새벽과 황혼은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영위해야 할 낮과 밤은 길다. 극적인 순간의 기억에 매달릴 때, 이미 지나온 길 위에 멈춰 서서 망부석처럼 과거와 미래를 규정할 때, ‘신념이란 이름으로 -되기를 멈출 때, 혁명의 힘은 사라진다.

 

  앞선 두 글에서 나는 늘 문재인 정권의 언술들로 글을 시작했다. 왜 그 말들을 넣었는지 일말의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충분히 공허한 울림으로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질문만이 메아리처럼 떠돈다. ‘촛불 혁명이 끝나고 이미 2, 그 거리의 힘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수 있는가.

 

 

 

  바로 그 대답을 위하여, 나는 지금 다시 68을 읽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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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5. 16. 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