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소학읽고 인싸되기 ⑵ 우己1 우정 FØЯёⓥΕ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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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길위기금에서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고은의 보릿고개 프로젝트, 소학읽고 인싸되기 

 

 

 

★─1 우정 ØЯёⓥΕг─★

 

 

 

 

 

  2019년 3월 5일 화요일, 서늘한 기운이 뼈 속까지 파고듦

  많이 의지했던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졌다. 함께 보낸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혀에 돌기가 돋은 것처럼 입 안이 불편해진다. 멀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땐 갑작스럽게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에게 남아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되나 생각해본다.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세는데 두 손도 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 멀어지는 친구는 늘어나는데, 나는 매일 문탁 공부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새로운 친구를 만날 일이 없다.

 

  부모님의 품을 벗어난 뒤 내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친구’였다. 그러나 잘 맞는 친구는 찾기 어려웠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성장소설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주인공에게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꼭 한 명씩은 나오던데...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줄 소울메이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지향하는 가치가 비슷해 가려고 하는 길이 비슷한 사람, 함께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사람, 서로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이다. 내게 친구란 오랫동안 소울메이트를 의미했기 때문에 남들이 생각하는 친구보다 친구에 대한 기준이 높았고, 남이 내게 친구가 많다고 말해도 나 스스로는 친구가 없다고 여겼다. 

 

 

 환상 속의 그대 

 

 

  옛날엔 친구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소학』에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부모님과 자식의 관계나 군신 혹은 형제자매의 관계에 비하면 그 분량이 월등히 적다. 그 중엔 친구관계만 따로 모아 놓은 파트도 있는데, 그 파트의 끝부분에는 주인과 손님(主客)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갑자기 주인과 손님이 웬 말인가? 그러나 당시를 상상해보면 그다지 생뚱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만이 집안의 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 집을 지나가던 행인도 집안의 손님이 될 수 있었다. 20대 때부터 죽기 전까지 떠돌았던 시인 이백은 전국의 이씨 집안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이백은 집 주인에게 시를 써줬고, 집 주인은 이백에게 자신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거대한 규모의 손님을 집에 들였던 맹상군도 있다. 맹상군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 뿐 아니라, 죄를 짓고 도망치던 사람들까지도 손님으로 들였다. 어느 누구라도 뜻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친구로 삼았던 것이다. 손님들은 세심하게 잘 대우하던 맹상군을 자신의 친구라고 여겼다. 맹상군이 곤란하거나 위급해지면 맹상군의 손님들은, 그러니까 친구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어느 날 맹상군은 급하게 도망쳐야만 했는데,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지나가는 길에 통행증을 요구받았다. 그때 닭소리를 잘 내던 자가 “꼬끼오”하고 울자 동네 닭들이 그를 따라 울었고, 무사히 빠져나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 맹상군이 반란을 꾀하였다고 누명을 쓰게 된 긴박한 상황에서 그를 위해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 이 세상 소울메이트가 아니다 (광고카피 패러디)

 

 

  꽤 최근까지도 나는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찡얼거렸다. 오래도록 찾아 헤맸지만 내 환상 속의 소울메이트는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주인들과 친구가 되었던 이백, 수많은 손님들과 친구가 되었던 맹상군과 달리 나의 ‘친구’란 꽤 많은 환상으로 덧입혀진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애인과 둘만의 세계에서 사는 건 답답하다고,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한두 명의 친구와는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잘 맞는 소울메이트 한둘을 찾고자 했던 나의 소망은 어쩐지 협소해 보인다. 『소학』에서 이야기하는 ‘친구’의 범주가 꽤 넓다는 것은 다른 문장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아무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학』에서 친구에 대해 가장처음 나오는 이 문장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다. 

 

曾子曰 君子는 以文會友하고 以友輔仁이니라 (≪論語≫〈顔淵〉)

증자가 말했다. “군자는 文으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仁을 돕는다.”

 

  군자에게 친구란, 즉 『소학』에서 보기에 바람직한 친구란 文으로 모이게 되는 존재다. 文은 학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탁에서 사람들이 공부로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함께 읽은 책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때로는 몸에 익히고 따라해 보면서 각자의 삶과 밀착된 흐름을 같이 만들어간다. 함께 공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탕 ‘와다닥’이 떠오른다. 이 사탕은 입에 넣으면 알갱이가 와다닥 터지고, 입 안 곳곳에 통증이 느껴진다. 다른 사탕과는 다르게 이 알갱이가 저 알갱이인지, 저 알갱이가 이 알갱이인지 구분할 수 없다. 기묘한 느낌이 든다. ‘윽 따갑다. 여기서 이렇게 터지고 있군.’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文으로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것이고, 공통감각을 형성한다는 것은 각자의 경계가 오묘해지면서 만나는 일 자체가, 만나면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중요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文을 더 넓은 범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꼭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일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른 이십대의 탄생』 함께 원고를 쓰고 피드백 했던 나와 동은, 지원은 이제 비로소 친구가 된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때론 옛 친구들의 눈총을 받고 고민에 빠진 몇 달 전 술자리의 지원이 되고, 때론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작년 말의 동은이가 된다. 이 생각이 누구의 생각인지 알 길이 없어질뿐더러, 그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런 순간이 도래하는 건 어려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꽤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등학교에서 치고 받으면서 풍물을 쳤을 때도, 물고 할퀴면서 연애를 했을 때도 그랬다. 

 

 

 

 

 

 우정에도 기술이 필요해 

 

 

  그렇다고 물어 할퀴어서 서로 뒤섞이게 되는 모든 관계가 곧 군자의 친구 맺는 방법이라는 건 아니다. 앞 인용문의 두번째 문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친구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다. 『소학』에는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친구로 두라는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이 말은 사람의 인성을 구별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친구를 사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운 없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낼 수도 있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 칭찬해줄 수도 있으며, 실수하는 부분을 짚어내서 이야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소학』에서는 친구에게 책선(責善)하라고 권장한다. 

 

孟子曰 責善은 朋友之道也니라 ≪孟子≫〈離婁下〉

맹자가 말했다. “선을 행하도록 충고하고 격려하는 것이 친구에 대한 도리이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좋은 것을 보고 좋은 말을 하더라도 일상에서 좋은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나이가 어린친구들을 타박하거나 감정적으로 쉽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부끄럽게도 일상에서 이를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갭은 알면서도 행하기 어려워 생기기보다는, 스스로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생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책선이 필요한 것이다. 친구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충고해줘야만 한다. 책선을 하는 것은 기분이 날 때 한 번씩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도리(道)이고 친구의 임무(任)이다. 그러나 쓴 소리만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에게 쓴소리만 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길로 가기 위해 자기 자신과 친구를 고문해야만 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아무래도 책선을 잘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에게 일종의 기술이 필요해보인다.

 

 

▲ 지옥에서 온 옥토끼 曰 "우정에 기술 없어서.. 되겠니?"

 

 

擧世好承奉하여 昻昻增愚氣하나니 不知承奉者 以爾爲玩戲니라 所以古人疾이 籧篨與戚施니라 (≪宋史≫〈范質列傳〉; ≪宋文鑑≫ 中 일부)

온 세상이 떠받들어 주는 것을 좋아해, 으스대면서 의기양양해 하네. 그러나 떠받드는 사람이 자기를 노리개로 여기는 것을 알지 못하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새가슴과 곱사등이를 미워했도다.

 

  책선을 받는 사람은 충분히 친구 관계와 책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칭찬해주고 인정해주고 드높여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마냥 좋다고 느껴지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다. 허파가 빵빵해지고, 어깨는 하늘 위로 솟구치고, 엉덩이가 공중으로 붕붕 뜨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 누구나 자신을 인정해주는 곳과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동에서 한 발자국만 떨어져 본다면, 자신이 그 사람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있는 새가슴과 곱사등이를 미워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변에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이 많다면 그곳을 의심해야하고, 자꾸만 칭찬을 받는다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책선을 하는 사람에겐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우선 책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행하겠다는 강단이 있어야 한다. 친구와 멀어질까 두려워 책선하기를 주저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친구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는 일에, 상대가 원하는 방향을 맞춰주는 일에 매진한다면 그 친구와 계속해서 가깝게 지낼 수 있는걸까? 그러나 친구는 천천히 변해갈 것이고, 자기 자신도 그것을 캐치하지 못할텐데 남이라고 해서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친구와 멀어지는 것은 충분히 두려워할만한 일이지만, 그 두려움에 빠진다면 친구와 지속적인 관계도 생산적인 관계도 맺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친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면 할수록 온갖 감정과 상념에 휩싸이기 쉽다. “쟤는 왜 저렇게 생각하는 거야?”, “저것 밖에 안하다니, 나를 무시하는군” 이런 상태에서 친구에게 어떤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모종의 연민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상대도 또 이 상황도 한계에 부딪혀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안쓰러움과 애정을 동시에 갖으면 차분하게 상황을 바라볼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문제를 대상에 한정시키지 않음으로써 조금 더 멀리까지 시야를 확장시킬 수 있고, 문제를 한정짓지 않음으로써 내 자신에게서도 문제의 단서를 찾아내 움직여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친구에게 책선하라는 것은, 친구와 부딪힌 어려움을 회피하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책선한다는 것은 상대의 잘못을 질책하고 탓하며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책선은 꼭 말로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때때로 쓴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솔선수범하여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호소하는 것일 수도, 달래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친구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책선을 하는 사람에겐 강단 말고도 필요한 게 두 가지 더 있다. 

  첫째로 책선하는 사람은 종용(從容)히 해야 한다. 종용은 조용히 한다는 말과 비슷한데, 태도가 차분하고 침착한 것이다. 질책은 상대를 일면에서 보고 원망의 마음이 생겨나 그 잘못을 나무라는 것이지만, 책선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여러 면을 이해한 상태로 접근하는 것이다. 내 감정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차분하고 침착하게 돕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종용히 접근한다는 것은 내 협소한 시각으로 상대를 멋대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내 경험에 반추해보자면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늘 스스로를 돌이켜볼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종용히 책선한다는 것은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친구에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닐 터이다. 책선의 문제는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는 데 있다. 군자는 친구를 잘 사귀는 면서도 마음이 깊고 넓어 물과 같이 담박한데, 이처럼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여 마음에 풍랑이 일지 않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책선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책선하라는 말은 쉬울지 몰라도 그것을 잘 해내기는 어렵다. 어떻게 매일 같이 자신을 의심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소학』에는 친구를 공경하라는 경구가 많이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경하는 것의 핵심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낮춘다는 건 친구에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가장 실용적인 기술이다. 앞서 언급했던 주인과 손님 사이에 대한 문장도 사실은 주인이 손님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문을 들어 갈 때 손님이 먼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주인이 손님에게 먼저 절하라고 하기도 한다. 그 권세 높고 부유한 맹상군도 손님들과 같은 식사를 하였다. 위계가 중요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소학』에서는 친구를 사귈 때 나이도 불문 귀천도 불문하라고 가르친다. 또 친구가 자신에게 잘 대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대단한 면을 내세우지도 말아야 한단다.

 

朋友之際는 欲其相下不倦이라 故로 於朋友之間에 主其敬者라야 日相親與하여 得效最速하나니라 (≪張子全張≫〈橫渠語錄〉中)

벗을 사귈 때는 서로 몸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가지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벗 사이에 공경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만이 날로 서로 친해져 서로를 발전시켜 주는 효과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다.

 

  친구의 문제가 적당한 친구를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나? 나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친구를 만났나? 자신을 낮추는 방법을 알았던가? 소울메이트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을 때, 운이 좋게도 내게 한동안 그런 친구가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우리는 생활환경이 많이 달라졌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도 차이가 생겼다. 결국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전과 같이 합이 잘 맞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그 친구를 볼 자신이 없어.' 나의 소울메이트-환상에 갇혀서 나를, 그 친구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덧 친구와 애인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친구와 가족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친구와 선생의 구분이 애매해졌다. 어쩌면 친구란, 걷고 있는 길 위에서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문제는 어떤 친구를 사귈까가 아니라,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를 어떻게 사귈까일지도 모르겠다.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4. 1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