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습니다 ⑭] 1940년, 폴란드 남쪽의 기억 - 아트 슈피겔만,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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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명식 (길드;다)






1.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었고 수업도 그 해의 마지막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상.

봄에는 ‘학교’였다. 여름에는 ‘집’이었다. 가을에는 ‘마을’을 하고, 겨울에는 ‘세상’. 처음부터 그렇게 네 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 해의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 익숙한 관계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깨어있는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학교’라고 생각했기에 집보다도 학교를 먼저 놓았다. 익숙하다 여길 테지만 실은 턱없이 낯설 ‘집’이 두 번째였다. 늘 거닐면서도 지각 밖에 있을 ‘마을’은 그 다음이었다. ‘세상’은 마지막이었다.

앞의 주제들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즌을 시작할 때에도 나는 어떤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에게서 가장 멀게 느낄 이야기일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우리조차도 자신의 이야기로 느끼기 힘들 테마들 - 역사와 정치. 이것들은 매일 같이 드나드는 학교나 집 이야기와도 다르고 단지 지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리 멀지는 않은 마을과도 다르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한 번 낯설게 느끼기 시작하면 끝없이 낯설어질 수 있다. 타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쪽 사정이죠.”라는 의미로. 혹은 “그렇군요. 뭐 당신이 그렇다면야…….”란 의미로, 그리고 어쩌면 또 달라질 수도 있는 의미로.

나의 두려움은 아이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녀석들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래서요?’하고 되묻는다면 어쩌지. 혹은 ‘뭐 그렇다면야’ 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면 어쩌지. 나름대로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올 수 있게 했다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여전히 녀석들에게 낯설기만 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겨울의 첫 번째 책으로 만화책인 『쥐』를 고른 데에는, 그러한 까닭도 조금은 더해져 있었다.



 




2.  



내가 중학생일 때에는 학교 도서실이나 공공 도서관이 지금보다도 훨씬 만화책에 관대하지 못했다. 『원피스』나 『드래곤볼』 같은 만화책은 물론이고 학습만화조차도 흔치 않았다. 사실 학습만화 붐이 아직 일지 않았을 때이기도 하고, 만화책을 보려면 대여점엘 가지 도서관으로 가진 않는 때이기도 했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이 무언가 하면, 그런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꼭 두 종류 정도의 만화책은 도서실이든 도서관이든 꼭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이었고 다른 하나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였다. 앞의 것은 패전 후의 일본을, 뒤의 것은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를 다룬다. 공교롭게도 양쪽 다 2차 대전의 상흔을 되새기고 있다. 정확히는 후벼 파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은 『맨발의 겐』 영문판에 추천사를 썼다)

나는 아버지가 직장 서점에서 『쥐』를 처음 사다주었을 때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아이들을 둘러봤다. 우선 늘 하던 질문부터 시작했다.



“물론 책은 다 읽어왔지?”

과연, 녀석들의 눈빛에 평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역시 책을 읽는 수업에서 만화책의 힘이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나는 좀 더 기대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땠니?”

“잔인했어요.”

“끔찍했어요.”



다양한 장면들이 차례차례 나왔다. 하루아침에 폴란드에 들이닥친 독일인들, 그들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은신처를 만들고 숨어드는 유태인들, 그럼에도 피할 수 없었던 아우슈비츠행, 처참한 수용소의 나날들과 마지막까지도 방심할 수 없었던 최후의 도주……. 나는 열띠게 장면들을 짚어내는 녀석들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었다. 『쥐』는 유태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등 등장인물을 의인화된 동물로 그려내지만 그럼에도 극도로 세밀한 디테일들이 그 모든 이야기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만든다. 이 책은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을 인터뷰하여 만든 것인데 그에 힘입어 보통은 그냥 넘어가는 작은 부분들까지 놓치지 않고 치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들을 많지만 자기가 만든 은신처의 구조나 수용소 음식들의 구성, 아우슈비츠에서 살기 위해 만들었던 연줄들까지 묘사하는 책은 흔치 않다.

바로 그 디테일 덕분에 아이들은 쉽게 책에 몰입할 수 있었던 듯 했다. 다들 주인공 블라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가 맞닥뜨렸던 참상에 대해 한껏 빠져들어 이야기를 했다.

한참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문득 누군가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 차 태워주는 장면이요.”

“차 태워주는 장면?”

“흑인이 차 태워달라고 하는 장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음 『쥐』를 읽었을 때도 깊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아버지 블라덱을 인터뷰할 때 있었던 일을 그린 장면인데, 작가가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히치하이킹을 하던 흑인 한 사람을 태우게 된다. 헌데 아버지는 흑인들은 모두 도둑놈이라며 내내 폴란드어로(흑인이 알아들을 수 없게)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를 목적지에 내려준 후 동승하고 있던 작가의 아내는 분노를 터뜨린다. “아니, 어떻게 홀로코스트를 겪은 아버님이 인종차별을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받아친다. “검둥이는 유태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질문을 한 아이는 작가의 아내와 똑같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도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왜 그랬을까.

열띠게 이야기를 하던 다른 아이들도 말문이 막힌 듯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몇 가지 대답들을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잠자코 기다렸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손꼽히게 참혹한 인종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어떻게 인종차별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대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다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대답을 찾는 게 쉽지 않은 듯 했다.

그 때, 또 다른 녀석이 침묵을 깼다.


“저는 ‘카포’의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카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중간관리자들 - 『쥐』에서는 주로 폴란드인들로 등장한다 – 이다. 수용소의 죄수이기는 하나 유태인은 아니기에 간수 노릇을 하는 자들.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나치는 그렇다 치고 카포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렇게 엄청나게 사람들이 죽는데, 중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유태인들을 감시하고 때리고……아무 것도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또 그 때 독일 사람들은 뭘 했어요……? 독일 사람들 중 아무도 이런 일을 문제라도 느끼지 않은 거예요? 그냥 자기네 정부가 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한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이번에도 몇 가지 대답들을 떠올렸지만 잠자코 있었다. 아이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자기 생각에 잠긴 녀석도 있고 눈치를 보는 녀석도 있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 또한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바로, 『쥐』와 같은 텍스트를 읽고 녀석들이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그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3.  


『쥐』는 분명한 역사 텍스트다. 다만 전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이다.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한 사람 개인의 기억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텍스트이다.

이러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역사책을 볼 때보다 훨씬 더 가깝게 한 사건을, 한 시대를 체감할 수 있다. 사건에 맞닥뜨린 주인공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적어도 그 역사적 사건의 일부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역사라 부르는 것이 개인들과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그 개인들과 연결되어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러한 텍스트들을 읽는 의의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개인의 시선에 마냥 파묻혀서는 안 된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도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한참동안 블라덱 슈피겔만의 이야기를 따라 들어가던 우리는,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와의 인터뷰를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순간순간 멈칫거린다. 작가는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작가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여과 없이 그려낸다.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블라덱 슈피겔만에게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 수용소에서의 물질적 곤궁은 블라덱으로 하여금 하잘 것 없는 물건 하나, 동전 한 푼에도 병적으로 집착하게 했고, 몇 번이고 당했던 배신은 그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이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평온의 시대에도 언제나 위험을 대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의 신념 속에서 자신이 홀로코스트를 겪었다는 사실과 ‘검둥이의 도둑질’을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충돌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극히 당연한 삶의 교훈이자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순간 우리는 블라덱의 이야기 궤도에서 한 발짝 물러선다. 그가 되어 그의 눈을 통해 1940년 폴란드 남부에서 일어난 그 참상을 응시하다가, 한 발짝 물러나 그의 뒤통수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됐을까? 그 기억들은 어떻게 그를 바꾸어 놓은 것일까? 그 기억이란 그에게 대체 무얼까?

그건 – 아우슈비츠는 그들에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그 위로 또 다른 질문이 던져진다.



“나치는 그렇다 치고 카포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 질문을 던진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에게는 이 질문을 던져할 이유가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전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사건들을 목도한 경험이 있었고, 봄 시즌 ‘학교’부터 꾸준히 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 아이가 ‘카포’와 ‘독일 사람들’에 대해 물었을 때 사실 그것은 그 때 부당한 사건들에 대하여 무심히 지나쳤던 ‘선생님들’과 ‘친구, 선배들’에 대하여 물은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 순간 그 녀석은 이미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4.   


이 날 수업이 끝날 무렵 나는 아이들에게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를 다룬 몇 가지 텍스트들을 더 전해주었다.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비밀일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것만은 직접 읽지 말고 네이버에서 찾아보라고만 했다) 등등.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였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던져야 할 질문, 우리 모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역사와 정치, 아득히 멀어보는 이야기들이 학교, 집, 마을과 마찬가지로 나와 맞닿아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질문들이 던져져야 한다.

그것을 되새기면서 나는 다음 수업을 준비하기로 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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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3. 22. 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