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시간 빈곤, 이대로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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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한 친구가 있다. 대학에서 만났지만 대학 밖에서 만난 시간이 더 많은,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가장 오래된 친구. 친구는 일찍이 공부 하기 위해 대학을 떠나 문탁 인문학공동체로 갔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친구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엉덩이를 무겁게 만드는 것에 들이는 정성부터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삶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보았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일 년에 몇 번. 아주 오랜만에 어렵게 시간을 맞춰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늘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어느 날은 눈빛이, 어느 날은 향기가, 어느 날은 기운이, 어느 날은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그러면서도 잃지않는 발랄함이 나는 좋았다. 

  한 해에도 몇 번씩 어디서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는 게 익숙한 나는 한 곳에서 몇 년째 공부를 하며 관계를 맺어가는 친구가 신기하고 또 그 삶을 존경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어떤 곳일까. 어떤 사람들일까. 그 친구를 통해 가서 짧게 세미나도 하고 가끔 행사에도 갔지만 그곳에 있는 ‘청년’들이 내게 선명하게 와닿지는 않았었다. 


  최근 친구는 함께 공부하는 청년들과 공부가 일이되는 것을 고민하고 실험하는(?) ‘길드 다’를 열었다. 그리고 9월, 길드 다는 청년들의 짧은 강의를 유뷰트로 올리는 플랫폼 실험을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총 세 번에 걸쳐 진행되는 강의는 네 명의 청년이 각자의 주제를 갖고 15분-20분 정도의 짧은 강의를 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각 테마는 1. 고전 속 인물에게 묻다, 2.내가 중학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4. 목공 인문학, 으로 매 달 다른 주제를 다뤘다.


  지난 9월, 친구의 초대를 받고 길드 다에 갔다. 예전에도 친구가 자신이 여는 세미나에 초대를 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 것은 느낌이 달랐다. 친구의 ‘강의’를 통해 배우러 가는 첫 날. 그리고 이런 저런 행사에서 스치듯 만난 청년들을 긴 시간 만나는 첫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날, 앞에서 강의를 하는 청년들에게 약간의 동경 섞인 끌림을 느꼈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자원 삼아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식상하지 않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오늘, 길드 다의 마지막 강의를 갔다. 첫 참석 날에는 오직 내 친구를 보러 가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면 오늘은 ‘그들’이 할 이야기가 궁금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오늘 강의의 주제는 1. 공자할아버지 꼰대가 뭐에요? 2. 즐거움에 대하여(호모 루덴스) 3. SNS (한병철의 투명사회) 4. 마감: 정성을 들인다는 것 이었다. 

  첫 강의에서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맺은 관계를 ‘스승 관계’로 설명하고 현대 사회의 중요한 주제이자 사회 갈등인 세대갈등을 ‘꼰대와 청년’이 아닌 ‘꼰대 관계’로 정의하며 꼰대는 단지 나이든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이든 세대와 청년의 불통하는 ‘관계 문제’라고 설명한다. 반면 공자와 제자들이 맺은 관계, 또 강의에서 든 예로 영화 <굿 윌 헌팅>의 윌과 숀 선생님의 관계는 서로를 보살피고 지켜보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스승 관계’라며 “스승은 제자가 있을 때 비로소 스승이 되며 제자는 스승이 있어야 제자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성숙/완성시키는 존재”라고 풀어 냈다. 


  두 번째 강의에서는 책 <호모 루덴스>의 놀이개념을 빌려와 자신이 중학생 때 했던 ‘아이돌 팬질’에 대한 향수의 원인을 추적한다. 강의자는 그것을 “순수하게 즐겼던 놀이 경험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례로 자신이 일하는 어린이집의 아이들에 대해 전한다. 성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들의 시간. 아이들은 서로 규칙을 만들고 현실 세계를 모방하면서 공(空)의 시간을 채워나간다. 반면 현대사회에 경매와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질된 ‘놀이’를 짚으며 “여러분의 놀이 경험은 무엇인가요.”를 묻는다. 


  SNS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가성비 갑’ 관계 맺기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세 번째 강의는 한병철의 <투명사회>의 내용을 주 소재로 한다. 저자는 SNS에서 벌어지는 관계 맺기가 상대방을 알아가는 데에 들이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며 그것은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관계 맺기 방식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했다. 즉, 비슷한 취향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SNS 소통이 이뤄지고 있으며 상대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계를 ‘취소’하면 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유사성을 공유하며 맺는 관계, 타인을 만나지 않는 관계 맺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성비 갑’ 관계 맺기인 이유는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 시간을 들일 필요도, 친해지기 위해 낯섦을 견디는 감정 소모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강의자는 “이러한 관계 맺기는 결국 나와 다른 사람, 타인을 만나는 것을 점점 어렵게 한다.”고 했다. ‘나’는 SNS상에 있는 수많은 ‘나 들’을 만나며 이 사회를 ‘나와 닮은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닮은 사람들로 채워진 SNS 를 현실로 인식하면 할수록 사실은 만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타인을 만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네 번째 강의를 하는 강의자는 길드 다 공간에 있는 가구를 직접 제작한 목수로, 목공을 통해 얻은 질문과 문제의식에 대해 말한다. 이번 강의에서 그는 가구의 마감에 대해 얘기했다. 하나의 가구가 완성되기 까지 마감에 들여야 하는 시간과 정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그래서 목공의 발전 역사에서 마감 시간을 줄이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그것을 위해 개발된 신나 같은 화학 약품은 마감 시간을 단축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건강과 환경을 해치는 등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실제로 마감재 관련 일을 하는 분이나 목수들 중 암이나 원인 모를 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충격적이었다. 

  본래 가구는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하는 생활의 일부였다. 과거에는 하나의 집을 지을 때 옆에 나무를 심으며, “이 나무가 목재가 될 때까지 살 수 있는 집”을 지으려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무와 집은 순환된다. 그리고 그 순환 속에는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시간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가구는 유행 따라, 취향 따라 바꾸는, 빨리 만들고 빨리 망가져 빨리 바꾸는 소모품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산업 기술의 발전을 뜻하지 않는다. 그에 따른 환경 파괴와 여러 직업병을 발생시킨 책임을 묻게 되는 변화이다. 강의자는 이러한 속도에 따라가는 것을 멈추고 과거의 ‘오랜 시간을 들인 마감’에 담긴 지혜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각 강의가 다룬 주제와 소재는 달랐지만 나는 이 네 개의 강의가 하나의 단어로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 네 강의는 시간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잃어버린 어떤 시간에 대해서, 시간을 들이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시간을 버는 대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질문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현대 사회에서, 아마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점점 ‘소비’로 교체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는 소비하듯 나의 취향에 따라 맺거나 끊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물건을 사고 반품하듯이). 상대를 견디거나 돌보는 것은 ‘손해’보는 일이 되었다. 인간의 놀이는 소비사회에서 상품이 되어, 놀이에서 유사한 인간들이 공평한 규칙에 따라 경쟁하고 승패했던 것이 자본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블공정한 경쟁과 승패가 되었다. 소비는 개인의 ‘자유’일 뿐, 그것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파장에 대해선 질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은가? 

  기술이 발전되어 모든 것의 속도는 빨라졌는데,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를 ‘시간 빈곤자’로 느끼는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일까. 

  우리에겐 돈이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스펙을 쌓거나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이 아닌 ‘멈출 시간’이 필요하다고. 무언가를 하지 않고,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번 길드 다 강의를 통해 나는 추상적으로 내 안을 떠돌던 불편과 답답함을 정돈 할 언어들을 얻게 되었다. ‘아, 나의 그때에 대한 향수는 ‘놀이’에 대한 향수였구나.’ 하거나, 내가 지나온 경험과 관계들에서 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시간을 견디는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러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까,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야, 라며 스스로를 토닥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구를 만드는 일이 관계와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무를 잘 이해해야 좋은 가구를 만들 수 있듯이, 상대를 잘 이해해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는 것. 나의 의도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 ‘목공 마감의 타이밍을 아는 것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관계에 대한 조언들이 있지만, 결국 그 관계를 잘 아는 것은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문제의 해답은 그들이 공유한 관계 속에 감각적으로 녹아 있을 것이다. 


  표면은 심층을 반영할 수는 있어도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너’와 ‘나’ 사이에 쌓인 시간의 내용에 따라 비슷한 표면일지라도 각기 다른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에서 ‘말하기’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유, 그리고 “해일이 몰려와도 조개 껍데기를 줍겠다.”고 선언하는 일은 이 퇴적층의 차이를 보겠다는 것이 아닐까? 

그 퇴적층에 호기심을 갖는 일.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 


  오늘 길드 다에서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기뻤다. 내 소중한 친구를 만나서, 그들을 다시 만나서, 나와 비슷한 감각과 질문을 공유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 어디 있는 것 같아서 그랬다.

  그들의 강의가 식상하지 않게 느껴진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한 공부가 단순히 지식의 습득이나 ‘인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읽은 것에 질문을 더하고 생각과 의견을 덧붙여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낸 것 같았다. 

  카메라 앞이 낯설고 강의를 한다는 것을 무겁게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숙련된 이들이 여는 강좌에 비해 세련됨이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강의에서 자신감을 보았다. 하고 있는 말에 대한 자신감. 하고 있는 생각에 대한 자신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은 나에게 전해져 ‘힘’이 되었다. 


  이러한 만남은 나에게 짧은 여행이다. 중학교를 그만 두고 서울로 오고 가며 인문학 수업을 들었던 그때부터 시작된 내 방식의 여행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피곤하겠다.’ ‘힘들겠다’고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시간을 즐기고 내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어쩌면 내 일상에 필수적인 여행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나를 두고 얕은 관계만을 맺는 불안정안 청년 유랑자라고, 부유하는 청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랑은 때로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외로움을 느낄지라도 저기 어딘가, 나를 알고 이해하는 이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 탈출구가 된다. 불안정이 나를 안정케 할 때, 그것은 내게 ‘건강한 불안정’이지 않은가. 



작성자
길드다(多)
작성일
2019. 1. 2. 14:13